소설리스트

263화 (263/402)

무…. 무슨 사이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 형아?

똑똑.

“강용아.”

이른 아침. 강우가 강용이 방문을 노크했다. 어젯밤 술자리가 길어져 늦게 들어온 강우였다. 반응이 없자 강우가 다시 노크했다. 그러자 문이 조심히 열리더니 부스스한 얼굴의 강용이가 나타났다.

“어, 형아.”

“늦게 잤어?”

퉁퉁 부은 얼굴을 보니 어제 늦게까지 게임이라도 했나 싶었다. 강용이가 손으로 눈을 비비며 답했다.

“지금 일어났어.”

“안에 잠깐 들어가도 돼?”

강용이가 허락의 의미로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강우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들어오는 강용이 방을 강우가 쓱 둘러보았다. 한쪽 벽면에 있는 장식장에는 온갖 피규어가 가득했다. 그 옆으로는 이제는 조금 시들해진 미니카들이 있었다. 벽면에는 온갖 애니메이션 포스터도 붙어있었다.

“출발 준비는 하고 있어?”

강우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응, 짐은 조금씩 싸고 있어.”

강용이의 말대로 침대 옆쪽으로 알맞은 크기의 여행 가방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지럽게 쌓여있는 짐들을 보고 강우가 픽 웃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 앞쪽으로 앉았다. 그리고 차분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제 진아랑 재밌게 놀았어?”

강우가 슬쩍 물었다. 강우 등 뒤에 있는 강용이가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어,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는데 그게 내가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느라 약속 시각을 깜빡한 거야. 그래서 만난 김에 햄버거를 먹었는데 또 그냥 헤어지기는 그래서 영화를 봤거든?”

“알았어. 알았어.”

강우가 웃음을 터트리며 알았다고 했다. 그런 강우를 보며 강용이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 어버버했나 싶었다.

“형아, 그런데 진아도 이번 프로그램에 같이 가고 싶다고 했어.”

“정말? 진아가?”

강우가 되물었다. 강용이가 잔뜩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어어. 진짜 가고 싶어 하던데 부모님이 허락해주실까 걱정하더라고.”

강용이가 강우를 향해 은근한 눈빛을 지었다. 그 눈빛을 받은 강우가 팔짱을 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강용이가 씩 웃었다.

“아아! 형아~”

오랜만에 보는 어린 동생의 애교에 강우가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의 부탁에 바로 백기를 들었다.

“오케이. 알겠어. 형아가 진아 부모님께 연락해볼게.”

“아싸!”

강용이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강우의 말이라면 안 통할 리가 없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강우는 든든한 손자였고, 아들이었고, 형이자 오빠 그리고 동생이었다. 강우가 말을 해준다면 분명히 허락할 것이었다.

“그런데 강용아, 진아랑은 무슨 사이야?”

강우의 기습 질문에 강용이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은 어린 강용이에게 무슨 사이냐는 말은 정말이지 충격적인 질문이었다.

“무…. 무슨 사이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 형아?”

“아니 그냥~ 영화도 같이 보고 신당동에 떡볶이도 같이 먹으러 가고 그러는 거 나랑 나은이랑 하는 거랑 똑같은데 뭐.”

강용이가 순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형아, 그럼 우리 사귀는 건가?”

“어?”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순진하고 풋풋한 강용이의 모습에 이내 웃음이 나왔다.

“그건 네가 결정하는 거지.”

“으음….”

강용이가 침음성을 뱉어냈다. 사실 아직 연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강용이었다. 가족의 막내로 이쁨만 받고 어리게 자라왔다. 폭풍우가 내리고 폭설이 내리던 과거에도 늘 강우와 아버지가 앞장서서 그늘막이 되어주었었다.

“진아 생각하면 어떤데? 막 좋고 웃음 나오지?”

“응?”

강용이가 이진아를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웃었다. 햄버거를 먹으며 감자튀김을 양보하던 이진아의 모습. 영화관에서 왜인지 모르지만, 잔뜩 굳었던 자신의 몸. 입에 묻은 떡볶이를 닦아주며 ‘어휴~ 칠칠치 못하게.’ 라며 다그치던 모습. 특히 코끝을 자극하던 샴푸 냄새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거봐. 좋아하는 거 맞네.”

강우가 강용이의 모습을 보며 단번에 알아차렸다. 강용이도 그제야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맞아. 형아, 나 진아 좋아하는 거 같은데.”

“이야…. 우리 막내가….”

강우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형아, 나 이제 어떡하지?”

“뭘 어떡해. 먼저 연락해봐.”

“어어.”

강용이가 주섬주섬 핸드폰을 찾았다. 강우가 짐을 마저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던 강우가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강용이가 핸드폰을 손에 든 채 강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 미안.”

강우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강용이 일어났지?”

마침 어머니가 강용이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강우가 방으로 들어가려는 어머니를 슬쩍 밀어냈다.

“엄마, 강용이 지금 중요한 순간이에요. 잠깐 혼자 놔두죠.”

“어? 중요한 일? 무슨 일 있어?”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랬다. 강우가 씩 웃었다.

“아니요. 그냥 있어요. 그런 게.”

“뭐야? 또 둘이 비밀 만든 거야?”

어머니가 살짝 눈을 흘겼다. 강우가 말없이 웃으며 어머니와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는 아버지가 출근 준비를 마치고 앉아있었다.

“강용이는?”

아버지가 강우와 어머니를 보고는 물었다.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몰라요. 뭐 중요한 일이 있다는데. 나오겠죠.”

“중요한 일?”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본능적으로 씩 웃었다. 아버지도 강우에게 들어 어제 강용이와 이진아가 만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남자에게 지켜줘야 할 비밀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먼저 먹자.”

“할아버지는요?”

강우가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를 물었다. 어머니가 국을 뜨며 답했다.

“응, 큰할아버지 집에 가셨어.”

“네.”

할아버지는 요즘 부쩍 최준의 집에 가시는 일이 많았다. 새벽같이 일어나 최준의 집에 가서 밥도 먹고 하루를 보내다 오시고는 했다. 할아버지에게 최준은 친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음….’

강우가 문득 막내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실종되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이니 할아버지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강용이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고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강우가 속으로 결심을 내렸다.

‘지용이 친부모님을 찾으면서 같이 한번 찾아봐야겠어.’

강우가 할아버지를 만나 한국전쟁 때의 이야기와 그 후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새 들어 강력해진 능력이라면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출근할 거지?”

“네, 오늘은 먼저 대진 그룹 본사 들어갔다가 갈게요. 처리할 일이 있거든요.”

“그래?”

아버지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어제 송경식과 있었던 대화를 알려주었다. 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야? 정말 SJ 그룹이랑 업무협약을 맺기로 했어?”

“네, 어차피 국내시장의 파이는 한정적이니까요. 서로 집중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게 이익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냈다. 서로 간에 이런 양보가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대단하구나. 재원이도 그리고 그 송경식이라는 사람도.”

“사실 현 상황을 보면 대진 그룹이 압승을 거두고 있는 게 맞죠. 그런데 뭐든지 한 기업이 독점하는 체제로 가는 건 독점을 한 기업에도 좋은 일은 아니라고 봐요. 서로 적당한 견제도 하고 상생을 해야 더 효율이 나는 거죠.”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가진 올바른 경영관이 참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대기업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자리에 있는 아들의 모습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들 참 대단해. 아빠는 정말 네가 자랑스럽다.”

“다 아버지한테 배운 거죠.”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어머니가 그런 부자를 바라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밥을 모두 먹은 강우와 아버지가 출근길에 나섰다. 아버지는 동양 무역으로 강우는 대진 그룹으로였다.

스르륵.

고급 세단이 다가와 강우와 아버지 앞에 섰다. 강우와 아버지가 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고급 세단은 먼저 동양 무역으로 향해 아버지를 내려 드렸다. 그리고 대진 그룹 본사를 향해 출발했다.

* * *

그룹 본사 로비에 강우가 들어섰다. 웅성거리던 그룹 로비의 시선이 단번에 강우에게 쏠렸다.

“부사장님!”

그룹 전략본부실의 부장이 달려와 강우를 마중했다. 강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네, 부사장님.”

지금 강우를 마중 나온 인물은 강준혁 부장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룹 내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강우에게 큰 도움이 되는 인물이었다.

“준비는 됐나요?”

“네, 지금 대회의실에 모두 모여 있습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대진 그룹과 SJ 그룹의 합작사업을 위한 첫 내부 회의를 가지는 날이었다. 오늘 있을 회의를 통해서 두 그룹 간의 사업 양해 각서(MOU) 체결을 위한 청사진이 나올 것이었다.

“그럼 우리 쪽 준비는 어찌 됐는지 점검 한번 해보겠습니다.”

“네, 부사장님.”

강준혁 부장이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대진 그룹의 실무를 손에 쥔 이후로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먼저 사원들은 복지가 말도 안 되게 바뀌었다. 대진 그룹의 사내 복지는 다른 대기업들이 충격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좋았다. 그런 이유로 대진 그룹의 사원들 모두가 강우를 참 좋아하고 편해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업무에 관해서는 정말이지….’

귀신은 피해 가도 강우의 업무점검은 대충 빠져나갈 수 없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강우는 수많은 업무를 총괄하면서도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고,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는 했다. 그룹 내에서는 머릿속에 슈퍼컴퓨터라도 들은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프로젝트 준비는 다 끝난 상태입니까?”

“네, 부사장님이 지시하신 이후 계속해서 수정 보완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좋네요.”

사실 강우는 대진 그룹 단독으로 준비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있었다. 다만 대진 그룹 혼자 감당하기에는 국내시장 경쟁도 치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제 있었던 송경식과의 단판을 통해 드디어 국내시장 경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물론, 더 협의를 거쳐야 하겠지만.’

강우는 미래의 기억보다 빨리 한국 문화산업의 세계 시장 도전에 나설 생각이었다. 지금부터 씨앗을 뿌려야지만, 먼 미래에 든든히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내가 가진 미래 기억으로 문화산업에 관련된 것들은 모두 선점해 주지.’

이윽고 강우가 엘리베이터에 도착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그것도 강우가 없앤 상태였다.

“부사장님, 이쪽으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강우와 강준혁 부장이 올라탔다.

띵.

이윽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우가 곧장 대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안에는 실무진들이 모여 있었다.

“부사장, 왔습니까?”

회의실에는 이재원도 있었다. 오늘은 강우에게 힘을 제대로 실어줄 작정인지 상석도 비운 채 앉아있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사장님, 조금 늦었습니다.”

“아니야. 우리가 너무 일찍 모여 있었지.”

이재원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우가 나타나자 잔뜩 긴장한 실무진들을 보며 씩 웃었다. 강우가 슬쩍 상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재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상석에 앉으라며 눈짓을 했다. 강우가 상석에 앉았다.

“시작하죠.”

강우의 말과 함께 대회의실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강준혁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한국 문화산업의 세계화를 위한 장기 프로젝트 ‘백범’의 사업 계획서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오래전 누군가가 그토록 염원했던 문화강국의 시작이 지금 이 자리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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