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박강용.
영화가 끝나고 강용이와 이진아가 밖으로 나왔다. 훌쩍 지나버린 시간에 강용이가 배를 쓱 문질렀다.
“배고프다.”
“그렇게 먹고?”
이진아가 강용이를 보며 말했다. 그러더니 이내 자신의 배를 만졌다.
“하긴 나도 배고프긴 하다.”
“떡볶이 먹으러 갈까?”
“난 즉석떡볶이.”
이진아가 해맑게 웃으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는 강용이가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걸어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신당동이었다.
부우웅.
달리는 버스 맨 뒷좌석에 강용이와 이진아가 나란히 앉았다. 창가에 앉은 이진아가 창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초여름의 바람이 창가를 통해 밀려 들어왔다. 강용이가 힐끗 이진아를 바라보았다. 창문으로 밀려 들어오는 바람에 이진아의 단발머리가 휘날리고 있었다.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리네….’
중학생이 되며 머리가 짧아진 이진아였다. 몇 번이고 만난 적이 있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느낌이 달랐다. 그 순간 버스가 덜컹거렸다.
“꺅.”
이진아의 몸이 붕 뜨더니 강용이 쪽으로 쏠렸다. 강용이가 본능적으로 팔을 쭉 뻗어 손잡이를 잡았다. 앞쪽으로 튕겨 나가려던 이진아의 몸이 강용이의 팔에 안겼다. 순간, 코끝을 자극하는 샴푸 냄새에 강용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 미안!”
이진아가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멍한 표정의 강용이를 보고는 킥하고 웃었다. 강용이가 빠르게 정신을 붙잡았다.
“아아…. 괜찮아.”
“응, 고마워.”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진아는 창밖을 바라보았고, 강용이는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렇게 버스가 달려 신당동에 도착했다.
삐이이-
강용이가 벨을 눌렀다. 이윽고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강용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맨 뒷좌석은 내려오기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이진아가 강용이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버스에서 내렸다. 아직 붙잡은 손을 발견한 강용이가 화들짝 놀라 손을 뺐다. 이진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빨리 가자 이러다가 해 지겠어.”
“어어….”
두 사람은 근처의 즉석떡볶이집으로 향했다.
딸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매콤하고 구수한 떡볶이 냄새가 느껴졌다. 강용이와 이진아가 비어있는 자리로 향했다.
“여기 즉석떡볶이 2인분이랑 라면 사리 햄 사리 추가해주세요.”
강용이가 거침없이 주문했다. 이진아가 수저를 놓으며 눈을 빛냈다.
“우아~ 진짜 맛있겠다.”
“많이 먹어.”
강용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학생인 강용이는 어머니에게 용돈을 받아서 썼다. 풍족한 강우 가족이었지만, 어머니는 큰 용돈을 주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강용이가 절약하고 검소하게 사는 법을 알기를 원했다. 하지만 부족할 정도로 주는 것은 아니었다. 강용이가 다니는 학교가 강남 압구정에 있었다. 대부분 학생이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었다. 어머니는 강용이가 기죽고 다니는 것을 원치는 않았다.
“그런데 강용아, 용돈 남았어?”
“어어. 걱정하지 마. 나에게는 든든한 후원자가 둘이나 있거든.”
강용이가 강우와 이재원을 떠올리며 든든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는 강용이가 용돈을 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이재원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척’ 하고 내밀면 두툼한 용돈이 ‘턱’ 하니 생기고는 했다.
“그래도, 너무 막 쓰지 말고 저축도 하고 아껴 써야 해.”
이진아의 말에 강용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가 항상 하던 말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같은 말이었다. 그리고 강용이는 세상에서 어머니가 가장 현명하고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순간, 강용이의 얼굴에 굳은 결심이 떠올랐다.
‘찾았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걱정하지 마. 나 용돈 받는 거 저축도 하고 있고. 부모님이랑 형 몰래 재단에 기부도 하고 있어.”
“와? 정말? 강용이 진짜 멋있다.”
이진아가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강용이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내가 나이는 어려도 생각은 어리지 않다고. 이번 방학에도 독립운동 역사체험 프로그램도 가기로 했어.”
“진짜?”
이진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진아 역시 사단법인 광복에서 시행하는 독립운동 역사체험 프로그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프로그램에 대해 자세한 안내를 해주는 팸플릿이 왔었다.
“응, 방학하고 며칠 있다가 바로 출발해.”
“아…. 나도 가고 싶다.”
이진아가 두 손을 꼭 모으며 눈을 빛냈다.
“진아도 그러면 부모님께 말해봐.”
“그러고 싶은데….”
이진아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이도 어린 자신을 부모님이 보내줄까 걱정이었다. 경비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모든 것이 무료였다. 말 그대로 몸만 오면 될 정도였다.
“나도 가는데 뭐. 가서 잘 이야기해봐. 이번에 가면 정말 좋을 거야. 그리고 북경에서는 우리 큰아버지도 만날 거거든. 거기 가면 정말 재밌는 형이랑 누나도 있어.”
“큰아버지? 서울에 계신 거 아니었어?”
“아…. 그건 우리 한국 큰아버지고 중국에 또 있어.”
강용이의 말에 이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이윽고 주문한 즉석떡볶이가 나왔다.
딸칵. 딸칵.
가스버너에 불이 들어왔다. 강용이와 이진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빠각.
강용이가 라면을 반으로 부숴서는 떡볶이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입맛을 다셨다. 박씨 집안 남자들은 밀가루를 참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라면 사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즉석떡볶이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전의를 불태우며 젓가락을 들었다.
“너는 라면 불은 게 좋아? 아니면 바삭한 게 좋아?”
“나는 거의 안 익은 라면이 맛있더라.”
강용이가 씩 웃었다. 최종관문도 통과였다.
“맛있겠다. 빨리 먹자.”
“응.”
후루룩. 후루룩.
두 사람이 라면을 흡입했다. 중간중간 집어먹는 단무지의 달콤하고 짭짤한 맛에 두 사람이 탄성을 뱉어냈다.
“사장님, 콜라도 주세요.”
강우가 음료까지 시켰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정신없이 떡볶이에 심취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배가 차오를 때쯤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강용이의 가방에서 진동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강용이가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꺼냈다. 강우가 이번 생일을 맞이해 사준 것이었다.
“여보세요? 형이야?”
-어, 그래 강용아. 지금 어디야?-
전화를 건 것은 바로 강우였다.
“나 지금 떡볶이 먹으러 왔어.”
-떡볶이? 학교 근처야? 조금만 기다려 형이 데리러 갈게.-
“어어….”
강용이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이진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진아가 입 모양으로 ‘강우 오빠?’라고 물었다. 강용이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형, 나 진아랑 신당동이야.”
-신당동? 진아랑?-
그 말을 끝으로 강우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어. 재밌게 놀다 와.-
통화가 끊어졌다. 이진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강우 오빠야?”
“어? 어어….”
“여기로 오신데? 나 강우 오빠 못 본 지 좀 돼서 보고 싶은데!”
강우가 군대에 가고 2년 동안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올해는 아직 모임이 이루어진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여름방학 시즌과 휴가 시즌이 되면 다들 모일 것이었다.
“아니, 형 오늘 엄청 바쁘데. 아마 종일 일하고 밤까지 일할걸?”
강용이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 * *
동양 무역의 부사장실에서 강우가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와…. 박강용.”
조금 전 대진 그룹 멀티플렉스 운영부에서 전화가 왔었다. 메가 플렉스 강남점에서 VIP 카드가 사용됐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용에 불편이 없는지도 물어왔었다.
‘분명 두 장이라고 했었지. 진아랑 둘이 봤나 보네.’
항상 어리기만 했던 막내가 이제는 이성과 데이트를 하나 보다. 강우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손에 들린 핸드폰을 다시 품에 넣었다.
지이잉-
그 순간 다시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강용이에게 문자가 와있었다.
-형아, 엄마랑 아빠한테는 비밀. 나 오늘 조금 늦어.-
강우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사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직원들이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시 정시에 퇴근을 중요시하는 동양 무역다운 풍경이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직원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퇴근을 시작했다. 서로 밝게 웃으며 술 약속을 잡기도 했다. 하루가 끝나고 즐거운 퇴근길이야말로 직장생활의 꽃이었다.
똑똑.
강우가 사장실 문을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아버지가 서류를 보며 한창 업무를 보고 계셨다.
“아버지, 저 먼저 갈게요.”
“그래, 오늘 문화인의 밤에 간다고 했지?”
“네.”
“아 참. 강용이는 연락해 봤어?”
“아…. 그게 친구들이랑 놀고 있데요.”
“또 피시방 갔구나?”
강우가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씩 웃었다.
“네, 그런가 봐요. 그런데 혹시 아버지도 문화인의 밤 행사 같이 가실래요?”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움찔했다. 그러더니 민망한 듯 미소를 지었다.
“오늘 마사토랑 저녁 약속이 있어서.”
역시 아버지도 강우만큼 그런 자리는 싫어했다.
“네, 그럼 혼자 다녀올게요.”
“그래, 잘 다녀오고 누가 괴롭히면 아빠한테 전화하고.”
“네.”
강우가 사장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왔다.
띵.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자 최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동양 무역의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우와 함께 동양 무역에 올 때마다 최 비서는 편안함을 느끼고는 했다. 특히 동양 무역 직원 몇 명과는 사적으로 만나 술자리도 가질 정도였다.
“부사장님.”
최 비서가 강우를 발견하고는 대화를 멈추고 다가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언제나 그러시듯 딱 정시입니다.”
최 비서가 동양 무역 직원들을 보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야근이 없기로 유명한 동양 무역의 사내 복지는 대진 그룹 내에서도 유명했다. 그리고 강우는 대진 그룹의 근무 환경도 조금씩 개선 중이었다.
“오늘 연회가 몇 시죠?”
“일곱 시부터입니다.”
“바로 출발하면 되겠네요.”
강우의 말에 최 비서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들르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네?”
최 비서가 결심을 내린 듯 말했다.
“사장님께서 부사장님을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로 만들어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부터 먼저 미용실에 가셔서 머리를 손질하고 메이크업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연회에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으실 겁니다.”
“.......”
강우가 잠시 침묵했다. 최 비서가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강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왕 가주기로 한 거 어쩔 수 없죠.”
스르륵.
고급 세단이 다가왔다.
“부사장님, 모시겠습니다.”
최 비서가 뒷문을 열어주었다. 강우가 고급 세단에 몸을 실었다. 이윽고 강우는 최 비서에게 이끌려 미용실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한참이나 머리를 하고 메이크업까지 받았다. 머리와 메이크업을 한 강우의 모습에 미용실 직원들이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부사장님, 연예인 저리 가라세요. 정말 잘생기셨어요.”
“감사합니다.”
이윽고 강우는 의상실에 도착해서 평소보다 잔뜩 힘이 들어간 파티 의상까지 챙겨입었다. 의상실 직원들이 또 강우를 보며 난리가 났다.
“다리가 엄청나게 기세요. 몸매도….”
여직원들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런 강우를 보며 최 비서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상사라고 생각했다.
“와…. 부사장님, 오늘 정말 멋지십니다.”
이윽고 완벽한 변신을 끝낸 강우를 보며 최 비서가 감탄했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려 하다가 멈칫했다.
“아…. 이거 영 어색하네요.”
“그럼 연회장으로 바로 출발하시죠.”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끝났고, 이제 처음으로 이런 모임에 모습을 드러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