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7화 (257/402)
  • 겁이요? 제가요?

    다음 날. 강우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슬쩍 창문을 바라보니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강우가 침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드르륵.

    창문을 여니 상쾌한 아침 공기에서 옅은 더위가 느껴졌다. 여름의 시작과 함께 방학의 시작도 함께였다.

    덜컥.

    문을 열고 나가자 강용이는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학교보다는 늦은 방학을 하는 중학교였다.

    “강용이, 학교 가?”

    “어어. 형아, 나갔다 올게.”

    강용이가 문을 열고 후다닥 달려 나갔다. 슬쩍 거실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등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어제 집에 찾아온 이지용과 노느라 늦게 자더니 지각을 할 모양이다.

    “강우, 일어났니? 밥 먹을래?”

    “네.”

    강우는 어머니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출근 준비를 했다. 학교가 방학을 했으니 이제 다시 사업에 몰두할 시간이었다. 깔끔한 정장을 잘 차려입은 강우가 집을 나섰다.

    스르륵.

    기다렸다는 듯 고급 세단이 다가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강우가 익숙하게 차에 올라탔다.

    “부사장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네, 아침 식사하셨죠?”

    “네, 든든히 먹고 왔습니다.”

    “그럼 먼저 재단으로 가주세요.”

    강우의 오늘 첫 일정은 사단법인 광복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최근 가장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곳이 바로 재단이었다. 친일명부에 계속해서 여러 인사가 추가되면서 엄청난 견제를 받기도 했다.

    “부사장님, 오늘 일정이십니다.”

    옆좌석에 앉아있던 최 비서가 강우에게 스케줄이 적힌 수첩을 보여주었다. 재단 방문을 시작으로 동양 무역을 들러서 저녁에는 대진 그룹 본사 주최 파티까지 가야 했다. 특히 오늘 있을 파티는 여러 대기업 관계자들과 유명 정치인들이 참석하기로 했다.

    “음….”

    강우가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파티는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는 강우였다. 그런 강우의 표정을 읽은 최 비서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꼭 참석해 달라고 사장님께서 부탁하셨습니다.”

    “알겠어요.”

    강우가 작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그러자 최 비서가 안도의 빛을 내비쳤다. 최 비서가 강우를 슬쩍 바라보았다. 막대한 부와 명예를 손에 거머쥔 젊은 상사는 다른 재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화려한 연회장 조명과 고급 샴페인 그리고 고급 음식들보다 연기가 자욱한 고깃집에서 소주를 좋아했다. 돈을 움켜쥐고 호화로운 생활보다는 늘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같이 부대끼는 것을 좋아했다.

    ‘참…. 대단한 분이시지.’

    더군다나 기업 경영의 투명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온갖 편법을 이용해 세금을 줄이는 일은 절대 상상도 못 했다. 다른 대기업들이 일감 몰아주기는 물론이고 하청업체를 통해 원가절감을 하고 있지만, 강우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런 강우의 소신과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는 배경은 절묘한 시너지를 냈다. 언론은 호의적이었고, 정계와 재계의 인사들이 강우와 인연을 만들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런데도 항상 신중히 그리고 겸손히 움직이시는 분.’

    최 비서가 존경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한참 어렸지만, 평생을 따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최 비서의 시선에 강우가 움찔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최 비서가 상념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그사이 차량은 달리고 달려 사단법인 광복의 건물에 도착했다. 강우와 최 비서가 고급 세단에서 내렸다.

    “부사장님.”

    강우가 온다는 소식에 벌써 직원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강우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곧장 건물 안으로 향했다.

    따르릉. 따르릉.

    “네, 사단법인 광복입니다.”

    밀려드는 전화에 사무실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직원들의 표정은 모두 밝았다.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다들 고생 많으시네요.”

    강우가 직원들을 한 명 한 명씩 격려했다. 그리고는 최 비서를 향해 말했다.

    “직원들 간식이나 필요한 거 있으면 취합해서 전부 사다 드리세요.”

    “네, 부사장님.”

    최 비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역시 직원들 챙기는 건 일등인 강우였다. 강우는 곧장 이사장실로 향했다. 현재 사단법인 광복은 강우에게 완벽히 주어진 상태였다. 강우가 이사장실에 자리하자 사무실에 활기가 더해졌다. 그동안 신경을 쓴다고는 했지만, 학업 때문에 전념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직원 몇 명이 들어왔다. 강우가 책상 위의 서류를 검토하며 말했다.

    “앉으세요.”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에 앉았다. 평소 편하게 대해주는 강우였지만, 그래도 업무는 업무였다. 특히 재단에 관련된 일에는 꼼꼼하고 정확하게 체크했다.

    “먼저 유공자 지원 사업부부터 시작할까요?”

    “네, 부사장님.”

    지이잉-

    이사장실 맞은편으로 스크린이 내려왔다. 빔프로젝터가 작동하고 사업 현황 보고서가 떠올랐다. 강우가 차트를 넘겼다.

    “보고 시작하세요.”

    “네, 부사장님.”

    유공자 지원사업 부서 담당자가 보고를 시작했다.

    “먼저 3차 주거 안정 사업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현재 저희가 파악한 생존해 계신 유공자분들과 후손들에 대한 주거 보급률이 이제 80%에 육박했습니다.”

    “나머지 20%는 4차 사업에서 진행하는 건가요?”

    강우의 질문에 직원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나머지 분들은 현재 살고 계신 곳에서 머물겠다고 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렇군요.”

    그럴 만도 했다. 모든 사람이 삶의 터전을 떠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모든 유공자와 후손들이 어렵게만 사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이 힘들 뿐이었다.

    “그럼, 그분들에게도 지원해드릴 만한 방법을 찾아보죠. 예를 들면 지금 살고 계신 거주지 보수라던지 아니면 생활 지원금이라든지요.”

    “네, 부사장님. 꼼꼼히 체크하겠습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유공자 지원부서에서 독립유공자들과 후손에 대한 지원사업은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유공자 지원 사업부에서 새로 시작한 사업 분야가 있었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분들에 대한 지원사업 모델은 완성된 건가요?”

    “지금 내부적으로 논의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한국전쟁 유공자분들에 대한 생계지원 자금을 조성 중입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수가 남은 독립유공자분들과는 달리 한국전쟁의 유공자분들과 후손분들은 정말 많은 숫자였다. 물론, 모두를 돕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어려운 분들만 찾아도 그랬다. 그래서 강우는 이 사업을 시작하는 데 매우 신중했다.

    ‘어설프게 돕는 건 하지 않는 것만 못할 수도 있으니까.’

    강우는 반짝하는 희망이 아니라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완벽하게 준비가 될 때까지 사업을 더 확장하는 것은 보류하겠습니다.”

    “네, 부사장님.”

    그 뒤로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강우는 여러 사업 분야를 꼼꼼히 살피고 또 점검했다. 장학금 지원사업은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남재식에게 부탁해 만든 재단 홈페이지에서 신청을 받고 있었다. 지원사업으로 장학금만 주는 것도 아니었다. 멘토링 장학 사업, 리더육성 프로그램, 배움교육지원 사업, 글로벌 인재 지원사업 등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사단법인 광복의 이런 프로그램들은 IMF로 힘들어진 학생들에게 가뭄에 내린 한줄기 비와 같았다.

    “홈페이지에 지원자가 너무 몰려서 다 지원을 해주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음…. 그런가요.”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대진 그룹이 대기업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학생을 도와줄 수는 없었다. 다만 모두가 힘든 시기인 게 문제였다.

    “그래도 지원 대상자 범위를 가능하면 넓혀 주세요.”

    “네, 그룹 본사와 협의해 보겠습니다.”

    강우는 늘 그렇듯이 최대한 많은 사람을 돕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이 받은 능력과 그리고 지금 쌓아온 것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모든 보고가 끝났다. 강우는 마지막으로 결재서류들을 점검했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늘 그렇듯이 재단은 사명감으로 일해야 하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대한민국에 남은 상처를 치료해준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부탁드립니다.”

    강우의 말에 직원들의 얼굴에 의욕이 가득 떠올랐다. 그럴 만도 했다. 사단법인 광복의 직원 대우와 복지는 동종 업계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직원들도 사람인지라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직원들이 한 명씩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강우가 그중에 한 명을 불러세웠다.

    “김 주임님.”

    “네, 부사장님.”

    강우가 불러세운 김 주임은 유공자 지원 사업부를 담당하고 있었다. 강우가 메모지를 꺼내 메모를 했다.

    -광주. 애육원.-

    강우가 메모지를 김 주임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 시설에 대해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김 주임이 메모지를 받고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부탁드립니다.”

    “네, 맡겨만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김 주임이 이사장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강우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잠시 의자에 몸을 기대어 있던 강우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네.”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문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 강우가 너무나 반갑게 웃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이사님!”

    “부사장님, 언제 오셨습니까?”

    반가운 얼굴의 정체는 바로 김광일 기자였다.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사단법인 광복의 홍보팀과 미디어팀을 담당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왔습니다. 말 편하게 하세요.”

    “그래, 방학하자마자 바로 또 여기로 달려온 거야?”

    김광일 기자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우가 자리에 앉으며 씩 웃었다.

    “그럼요. 제가 방학한다고 뭐 할 게 있나요. 죽어라 일해야죠.”

    “하긴…. 강우, 네 어깨에 달린 식구들이 몇이냐? 물론, 나까지 포함해서.”

    김광일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강우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오늘은 사무실에 계셨네요?”

    김광일은 보통 외부일정으로 바빴다. 홍보팀과 미디어팀을 맡고 있으니 그럴만했다. 김광일이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강우는 언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무기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친일명부의 발표와 함께 쏟아진 가짜 뉴스들과 언론을 통한 공격들도 있었다. 드러난 진실을 덮기 위해 온갖 방해 공작도 있었다. 강우는 그런 언론공작과 여론몰이에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여론이라는 건 보이는 대로 흘러가기 마련이야. 대응해야 하지.’

    가랑비에 옷이 젖듯 저들은 조금씩 여론을 뒤집으려 할 것이다. 사단법인 광복은 그런 저들의 계략을 막기 위해 지속해서 언론에 사업내용을 배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신문을 펴내고 홍보물을 제작해 배포했다.

    -독립신문.-

    재단에서 정기적으로 발행하고 있는 신문이었다. 김광일은 저들의 은밀하고 치명적인 공격을 막는 방패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김광성은 그 일을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마침 오늘은 스케줄을 빼놨지. 네가 여기로 올 게 분명하니까 말이야.”

    “역시.”

    강우가 감탄했다. 김광일은 참 눈치도 빠르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김광일이 강우를 보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대진 그룹에서 연회 있는 거 들었지?”

    “네, 그렇지 않아도 참석하라고 난리네요.”

    김광일이 씩 웃었다. 평소 강우가 그런 모임에 가기를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는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나도 참석할 예정이거든. 너도 꼭 참석해야 해.”

    “그래요?”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와는 다른 반응의 김광일이었다.

    “그래, 네가 자꾸 몸을 사리니까 다들 겁먹은 줄 알고 있다고.”

    “겁이요? 제가요?”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좋아요.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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