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5화 (255/402)
  • 대진 그룹 승.

    가파른 언덕을 내려오는 강우의 뒤를 이지용이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은 이지용이 주뼛주뼛 강우를 따라잡았다.

    “바로 학교로 갈 거지?”

    “그래야지. 시간이 애매해서.”

    “바쁠 텐데 내가 시간을 너무 뺏어서 미안하다.”

    언덕을 내려가던 강우가 멈춰 섰다. 그리고 이지용을 보며 씩 웃었다.

    “미안하면 다음부터는 집 정리 좀 잘하고 살자.”

    “아…. 미안.”

    이지용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오늘 아침 자신이 저질러 놓은 참혹한 현장을 정리한 것은 다름 아닌 강우였다. 집을 치우며 잔소리를 하는 강우의 모습에 한쪽에 차렷 자세로 서 있었던 이지용이었다.

    “아무리 혼자 산다지만, 집 청소도 하고 밥도 해 먹고 그래라. 좀 깨끗하게 사람답게 살자고.”

    “어어….”

    강우의 잔소리가 폭발했다. 이지용의 넓은 어깨가 점점 좁아졌다.

    “사람이 혼자 산다고 그렇게 대충 살면 안 된다고. 알겠지?”

    “알겠다. 미안하다.”

    그렇게 언덕을 내려가던 두 사람이 어제 들렀던 뼈해장국 집 앞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부터 열려있는 가게에 강우가 감탄했다. 참 부지런한 주인 할머니였다.

    “해장할래?”

    강우가 물었다. 이지용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지난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혼날 거 같은데….”

    “괜찮아.”

    강우가 이지용을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주인 할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특유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 그렇지 않아도 해장국 끓여 놨어.”

    강우와 이지용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인 할머니가 내준 것은 의외의 메뉴였다. 뼈해장국이 아닌 콩나물국이었다.

    “할머니, 이거….”

    이지용이 주인 할머니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인 할머니가 조금은 무심한 듯 이지용의 등을 툭툭 두들겨 주었다.

    “이거 먹고 속 풀어.”

    그 말에 담긴 여러 가지 뜻에 이지용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콩나물국을 먹기 시작했다. 강우도 말없이 같이 밥을 먹어주었다.

    “안녕히 계세요.”

    가게를 나오며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주인 할머니가 강우를 보며 밝게 웃었다.

    “그래, 강우 또 먹으러 와라.”

    “네, 종종 들르겠습니다.”

    강우와 이지용이 밖으로 나왔다. 이지용이 가게 입구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할머니가 너 보고는 웃네.”

    “사람을 잘 알아보시는 거지.”

    강우의 말에 이지용이 실소를 흘렸다. 강우가 이지용의 어깨를 툭 치고 앞장서 나갔다.

    “아침도 든든히 먹었으니까 이제 가보자고.”

    “오케이.”

    이윽고 강우와 이지용이 전철역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 정 기사가 집 앞에 왔다가 허탕을 친 건 미안할 따름이었다.

    덜컹. 덜컹.

    아침 일찍 강의가 있는 터라 지하철은 만원이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 강우와 이지용의 머리가 튀어나온 콩나물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강우와 이지용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이 동시에 피식 웃었다.

    띠리리리.

    -이번 내리실 역은 서울대입구역….-

    강우와 이지용이 수많은 인파를 뚫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곧장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각자의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 잘 들어라.”

    “어어…. 있다가 점심 같이 먹을까?”

    이지용의 말에 강우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리 무려 점심 저녁 아침 그리고 또 점심 같이 먹는 건데? 내가 나은이랑도 그렇게는 안 먹어 봤거든? 일없다.”

    “하하….”

    이지용이 멋쩍게 웃었다. 강우가 픽 웃으며 이지용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 강의실로 향했다. 오늘은 2002학년도 1학기의 종강식이 있는 날이었다. 즉 방학의 시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학생들의 표정은 밝았다. 이윽고 강의실에 도착한 강우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 선배님.”

    그때, 강우의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우가 힐끗 뒤를 돌아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 재민아.”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송재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주신 카드요….”

    “아….”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송재민과 함께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송재민이 품에서 카드를 꺼내 강우에게 내밀었다.

    “선배님, 이 카드 돌려드리겠습니다.”

    “어? 왜?”

    강우가 카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송재민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선배님에게 부담을 더 드릴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미 여러 곳에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계시니까요. 동아리원들 정도는 제가 챙길 수 있습니다.”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후배가 선배 걱정을 하냐? 그냥 줄 만해서 그런 거니까 받아. 네 이야기는 들었다. SJ 그룹 손자라며? 너야 풍족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까지 그럴 거로 생각하지 말고. 동아리원들 그걸로 잘 챙겨줘.”

    송재민이 강우를 보는 눈빛에 존경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역시나 듣던 대로 멋진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서울대에 오기를 그리고 경영학과를 선택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선배님. 그럼 부담 없이 잘 쓰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점심 사주실 수 있을까요?”

    “점심? 뭐…. 그러자.”

    송재민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리고는 살짝 머뭇거리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럼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아…. 잠깐.”

    강우가 송재민의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주었다. 송재민이 세상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그럼 점심때 연락 드리겠습니다.”

    “어어….”

    송재민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강우에게서 멀어져 갔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동아리원 연락처에 자신의 번호가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왜 번호를 모르고 있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허당기가 보이네….’

    강우가 픽 웃었다. 그리고 다시 강의실로 돌아갔다.

    * * *

    “야! 박강우.”

    강의실을 나서는 강우를 향해 이재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강우가 고개를 돌리니 이재원이 씩씩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왜요?”

    “너, 어제 외박했다며?”

    “네, 지용이네 집에서 잤는데요?”

    이재원이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왜 이렇게 화가 났나 싶었다.

    “그랬냐….”

    “아니, 나 감시해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아…. 어제 집에 갔었거든.”

    “왜요?”

    “밥 얻어먹으러. 엄마 지방에 공연 가셨거든.”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세아가 지방에 연극공연을 하러 간다고는 들었었다. 집에 혼자남은 이재원이 저녁을 먹으러 강우 집에 왔었나 보다.

    “점심 아직이지? 당분간 학교 올 일 없는데 우리 학생 식당가서 밥 먹자.”

    “점심 약속 있는데요?”

    이재원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누구랑?”

    “재민이요.”

    이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익숙한 듯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더니 곧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재민이? 혹시 송재민? 경영학과 이번에 들어온?”

    “네, 그리고 SLAM 총무요.”

    이재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SJ 그룹의 손자인 송재민은 이재원도 잘 알고 있었다. 현재 SJ 그룹을 이끄는 사장의 아들이었다. 즉, 재벌 3세였다.

    “왜? 할 말 있대?”

    “아니요. 그냥 먹자던데요?”

    이재원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가.”

    “음…. 그래요 그럼.”

    안 될 것은 없었다. 이재원도 경영학과 선배였고, SLAM 소속이었으니까 말이다. 두 사람이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종강 날이었지만, 식당 앞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재원이 그 모습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참 내가 한 일이지만 이만큼 잘한 일이 있나 싶다.”

    “인정합니다.”

    강우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송재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의 신호가 울리고 덜컥 통화가 연결됐다.

    -네! 선배님!-

    “어디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더니 송재민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 맞다 점심 약속! 죄…. 죄송합니다! 깜빡했습니다. 지금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어? 어어….”

    툭.

    통화가 끊기고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나랑 점심 약속한 거 까먹었나 본데요?”

    이재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 송재민에 대한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놈 괴짜 중의 괴짜라더니 범상치 않네.”

    “괴짜요?”

    “어, SJ 그룹 손자 중에 괴짜가 있다고들 하지. 자기 하고 싶은 거에 꽂히면 앞뒤 안 가리고 주변 시선도 별로 신경 안 쓰고 그런다더라. 아마 가족들도 포기한 상태라고 하던데?”

    “아….”

    강우의 머리가 띵하고 아파져 왔다. 왜 자신의 주변에는 이런 별종들만 꼬이나 싶었다. 이재원이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 송재민이 이번에는 너한테 꽂혔나 본데? 고생 좀 하겠다?”

    “후…….”

    강우가 긴 숨을 뱉어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어디 자신의 주변에 이런 케이스가 한두 번이던가. 당장 눈앞의 이재원만 하더라도 그랬었으니 말이다.

    “왜? 내가 왜?”

    강우의 시선을 느낀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찔리는 게 있는지 이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한쪽에서 송재민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미친 듯이 달려왔는지 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헉헉…. 선배님, 죄…. 죄송합니다. 제가 건망증이 심해서 깜빡했습니다. 절대 선배님을….”

    “아…. 알겠어. 진정하고 숨 좀 돌려라.”

    강우의 말에 송재민이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안정을 찾은 송재민이 민망한 듯 웃었다.

    “오늘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들어가시죠.”

    “선배가 후배한테 얻어먹는 법은 난 들어본 적이 없다.”

    이재원이 질세라 끼어들었다. 송재민이 이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옅은 긴장감이 흘렀다. 강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중간에 있는 내가 산다.”

    강우가 안으로 들어가자 이재원과 송재민이 황급히 뒤를 따랐다. 강우는 곧장 계산대로 가서 메뉴를 주문했다.

    “돈가스 세 개 주세요.”

    일방적인 메뉴 선정이었지만, 이재원도 송재민도 토를 달지 못했다. 다만 강우의 좌우에 나란히 섰을 뿐이었다. 강우가 식권을 받아 배식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몫으로 나온 돈가스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오늘 종강인데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요?”

    “선배님, 다들 방학 동안 여기 축소 운영한다고 난리입니다. 방학 기간에도 정상적으로 운영하면 안 됩니까?”

    송재민이 돈가스 쟁반을 들고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의 학생들도 송재민의 말에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형, 그렇다는데요?”

    강우가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이재원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거 한번 상의를 해봐야겠네.”

    “큭….”

    송재민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조금만 일찍 입학했어도 이 식당은 SJ 그룹의 몫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후후….”

    이재원이 송재민의 어깨를 툭 치고는 한쪽을 가리켰다. 송재민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침음성을 뱉어냈다.

    -축. 서울대 학생 식당 개관. 대진 그룹 기부.-

    라고 적혀있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이재원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한숨을 푹 쉬더니 비어있는 자리로 향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선배님.”

    경영학과 후배들은 물론이고 다른 학과 후배들도 강우와 이재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미소를 지어주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일단 먹자.”

    강우의 말에 송재민이 눈을 빛냈다.

    “잘 먹겠습니다.”

    “그래, 많이 먹어라.”

    이재원이 무심한 듯 말했다. 송재민이 이재원을 힐끗 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세 남자의 먹방이 시작됐다. 주변의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재원과 송재민이 마주 앉아있는 그림 때문이었다. 대진 그룹과 SJ 그룹의 치열한 사업 전쟁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주변의 분위기를 의식한 탓일까 두 사람이 경쟁적으로 돈가스를 먹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윽고 이재원이 먼저 돈가스를 다 먹었다.

    탁.

    포크를 내려놓은 이재원이 재빠르게 외쳤다.

    “대진 그룹 승.”

    송재민이 분하다는 듯 침음성을 뱉어냈다. 강우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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