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4화 (254/402)

미안하다.

늦은 새벽. 가게 안에 강우와 이지용만이 남았다. 주인 할머니는 문을 닫을 준비로 한창이었다. 두 사람의 앞에는 소주병이 가득 놓여있었다.

“으으….”

이지용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강우는 술도 엄청 잘 마시는구나.”

주인 할머니가 주방 정리를 끝내고 나오며 말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너무 많이 마셔서….”

“괜찮아. 이런 날도 있는 거지. 그래도 오늘은 저번이랑 다르게 대성통곡은 안 하네. 덩치는 산만 한 게 목청은 또 왜 그리 큰지.”

주인 할머니가 손에 묻은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이지용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안쓰러운 듯 이지용을 바라보았다. 맨 처음 이지용이 가게에 오던 날이 떠올랐다. 쭈뼛거리며 혼자 들어오는 모습에 일단 앉으라고 했었다. 조금은 퉁명한 자신의 반응에 움찔하던 모습에 얼마나 순박한 아이인지 알 수가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 많이 울지는 않았죠?”

“그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줄 사람이 있어서 그랬나 봐.”

이지용은 강우에게 참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미국에서 있었던 성장 과정과 한국에 와서 있었던 일들을 말이다. 이지용은 특히 SLAM이라는 동아리에 들어간 것이 한국 생활의 버팀목이었다고 했다.

“지용이를 알게 된 지 4년이나 됐는데 이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돼서 참 미안하네요.”

“원래 자기가 말하기 전까지는 그 사연을 어찌 알겠니.”

주인 할머니도 이지용의 사연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강우와 이지용의 대화를 들으며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랐다. 그 덕분에 약속한 것보다 술을 더 내주었다.

“그동안 지용이 정겹게 살펴 주신 거 감사해요.”

“아니야.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나야 찾아오면 돈 받고 밥 준 거밖에 없어.”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주인 할머니의 틱틱거리는 듯하지만 정다운 말 한마디가 이지용에게는 큰 힘이었을 것이었다. 낯선 이국 생활에서 친구들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정을 느끼게 해주었을 것이다. 이게 바로 한국인의 정이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걱정하지 말어. 사연을 알게 된 이상 내 손주처럼 챙길 테니까.”

주인 할머니의 말에 강우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주인 할머니가 강우와 이지용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놈은 어떻게 데려갈 생각이야?”

“하하….”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지용을 일으켜 세웠다.

“아이고~ 이 산만 한 놈을 어찌 데리고 가려고? 그냥 술 깨면 가도 되는데.”

“아니에요.”

강우가 이지용을 둘러업었다. 주인 할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벌렸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강우가 씩 웃으며 주인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완전 가벼운데요?”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먹으러 올게요.”

“그래, 조심히 데려다주고. 아 참 집은 알고?”

걸음을 옮기던 강우가 우뚝 멈춰 섰다. 생각해보니 어디 사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주인 할머니가 집을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주인 할머니에게 인사를 한 강우가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가파른 언덕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이지용의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강우에게는 별문제 될 것이 없었다. 같이 언덕을 오르던 몇몇 사람들이 강우를 보고는 기함을 했다.

“와…….”

자신보다 덩치가 큰 이지용을 업고도 거침없이 언덕을 오르니 그럴만했다. 강우는 한참이나 언덕을 올랐다. 이윽고 강우가 허름한 빌라 앞에 도착했다.

‘하필 층수는 또 5층이네.’

강우가 차분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 층에 도착한 강우가 또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손을 뒤로 뻗어 이지용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찾았다.’

다행히도 주머니에서 금세 열쇠를 찾았다. 강우가 열쇠를 이용해 문을 열었다.

덜컥.

빌라의 현관문이 열리고 안쪽의 모습이 보였다. 텅 비어있는 작은 투룸 빌라에서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기저기 어지럽혀져 있는 방을 보니 무언가 가슴이 무거워졌다.

“후…….”

강우가 한쪽에 놓인 침대에 이지용을 내려놓았다. 강우보다 한 뼘은 더 큰 이지용의 무게에 침대가 출렁거렸다. 백 킬로에 육박하는 무게를 메고 가파른 언덕을 올랐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음…….’

강우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괴로워하는 이지용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듯했다. 강우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리고는 이지용이 잠든 방문을 조심히 닫았다.

“시작해 볼까.”

강우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집을 하나씩 하나씩 깔끔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강우가 긴 숨을 뱉어냈다. 쓱 주변을 둘러보고는 씩 웃었다.

‘이제 좀 사람 사는 집 같네.’

그렇게 집을 대충 치운 강우가 슬쩍 냉장고도 열어보았다. 역시나 텅 비어있는 냉장고에는 생수통 몇 병만이 있었다. 강우가 팔짱을 끼고 한참이나 냉장고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려 메모지랑 볼펜을 찾았다. 강우가 자리에 앉아 하나씩 하나씩 필요한 물품을 적기 시작했다.

‘오케이. 이 정도면 되겠지.’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언덕을 한참이나 내려가 슈퍼마켓에 도착했다. 제법 커다란 슈퍼마켓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강우가 슈퍼마켓 안에서 한참이나 장을 보았다. 혼자 있는 이지용이 요리를 해먹을 리는 없으니 주로 생필품과 라면 위주로 샀다. 그리고 3분 만에 먹을 수 있는 요리도 잔뜩 샀다.

삑. 삑.

계산이 시작되자 계산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잔뜩 사가는 경우가 있나 싶었을 것이다. 비닐봉지로도 한참이나 담길 정도였다. 이윽고 묵직한 쇼핑의 결과물을 양손 가득 들고 강우가 슈퍼마켓을 나왔다.

덜컥.

다시 빌라에 도착한 강우가 자리를 쇼핑해온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냉장고에는 간단한 밑반찬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주방 선반에는 라면과 3분 요리가 가득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또 정리한 강우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충분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종종 들여다봐야겠네. 엄마한테 말해서 밑반찬도 좀 해달라고 하고.’

오늘이야 급하게 구매했다고 하지만, 역시 어머니의 손맛을 따라올 음식은 없었다. 이윽고 마무리를 지은 강우가 현관에 섰다. 신발을 신고 문을 열고 나가려던 강우가 멈칫했다.

‘하…. 열쇠는 또 어쩐다냐.’

그뿐이 아니었다. 적막이 흐르는 집 안을 바라보니 왜인지 모를 미안함이 들었다. 다시 신발을 벗고 이지용이 잠든 방문을 슬쩍 열어보았다.

“으으….”

이지용은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옅은 신음을 뱉어내며 자고 있었다. 강우가 한숨을 쉬었다. 다시 방문을 닫고 나와 핸드폰을 꺼냈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의 신호음이 가더니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주무시다 깼는지 살짝 가라앉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저예요.”

-그래, 강우야. 집에 왜 안 와? 바빠?-

“아니요. 여기 지용이네 집인데요. 아무래도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야 할 거 같아요.”

-그래? 무슨 일 있어?-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어지간해서는 외박을 하지 않는 강우였다. 이지용의 집에서 자고 온다고 하니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니요. 별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지용이가 많이 취해서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요.”

-그래? 알겠어.-

어머니는 더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네, 내일 집에 가서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그래, 조심히 있다가 와.-

장성한 아들이 걱정스러운 건 어느 어머니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강우가 스르륵 웃었다.

“네, 주무세요.”

툭.

통화가 끝나고 강우가 다시 침대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슬쩍 침대를 바라보니 이미 이지용만으로도 포화상태였다. 양쪽으로 튀어나온 팔과 침대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발끝에 강우가 픽 웃었다. 이지용의 덩치는 참 컸다. 강우가 옷장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이지용이 잠든 탓에 정리하지 못한 방이었다.

‘음….’

강우가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방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깔끔한 성격이 그냥 자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렇게 조용히 정리하던 강우가 침대 옆에 있는 탁자에 시선이 멈췄다. 그곳에는 이지용과 양부모님이 찍은 사진 액자가 있었다. 인자하게 웃고 있는 양부모님 사이에는 어린 이지용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강우가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한참 액자를 바라보던 강우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옷장을 열었다. 다행히도 침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혼자 산다면서 침구는 또 준비해놨네.’

강우가 침구를 꺼내 침대 옆에 깔았다. 잠자리에 누운 강우가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제도 밤을 새웠지만, 강해진 신체 능력은 도통 피곤을 몰랐다. 더군다나 잠자리까지 바뀌었으니 더 그랬다.

째깍. 째깍.

탁자 위의 시계가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강우가 잠이 들었다.

* * *

늦은 밤. 낡은 고아원 앞에 한 명의 여성이 나타났다. 여성의 품에는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가 안겨 있었다. 여성이 품 안에 아기를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가야….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해. 너라도 꼭 행복하게 살아.”

여성이 결심한 듯 강보에 싸인 아기를 고아원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이윽고 이상함을 감지한 것일까? 혼자 놓인 아기가 목청이 찢어져라. 울어댔다.

끼익.

고아원 문이 열리고 한 남성이 나왔다. 문 앞에 놓인 아기를 확인한 남성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조심히 아기를 안아 들었다.

“너도 버림받은 거니?”

남성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어떤 방법을 써도 아기의 운명을 바꿀 방법은 이제 없었다. 남성이 한숨을 푹 쉬고는 여성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헉!”

강우가 헛숨을 들이키며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니 분명 이지용의 집이었다. 강우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꿈이었나….”

강우가 꿈을 더듬었다. 기억나는 것은 고아원 건물의 모습과 남성의 얼굴 그리고 ‘애육원’이라는 고아원 이름이었다.

“강우야, 일어났냐?”

그 순간, 방문이 열리고 이지용이 들어왔다. 잔뜩 미안한 표정을 한 이지용의 모습에 강우가 한쪽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 지금 아침이야. 네가 안 일어나길래 내가 커튼 쳐놨다.”

이지용이 커튼을 걷자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햇살이 마치 꿈이 사실이라는 듯 탁자 위의 액자를 가리켰다. 강우가 사진 속 이지용을 바라본 뒤 조심히 입을 열었다.

“지용아.”

“어?”

강우가 조심히 물었다. 친구가 가진 아픔의 기억을 함부로 묻기가 조심스러웠다.

“혹시, 너 있던 고아원 이름이 애육원이야?”

“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어제 말했어?”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꿈에서 보았던 것이 정말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꿈속의 여인도 그리고 남성도 모두 실존한다는 것이었다.

“어, 네가 어제 말했다.”

강우가 그 사실을 숨기며 답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랬냐…. 어제는 정말 미안했다. 그리고 고맙다.”

이지용이 깨끗해진 집을 둘러보며 미안해했다. 강우가 이지용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괜찮아. 친구끼리 다 그런 거지 뭐. 아침 먹어야지 기다려봐. 내가 밥해줄게.”

“어…. 그게 내가 해놨다.”

이지용이 멋쩍게 웃었다. 강우가 ‘정말?’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난리가 난 주방과 그 앞쪽에 놓인 밥상에는 라면과 3분 요리가 놓여있었다. 강우가 이지용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어떡하면 라면이랑 3분 요리하는데 주방을 폭파해 놓을 수가 있냐?”

이지용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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