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1화 (251/402)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선선한 바람이 부는 아파트 단지를 강우와 큰아버지가 걷고 있었다. 강우가 힐끗 큰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부산대 병원에서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진 모습이었다. 뼈밖에 없듯 말랐던 몸에는 살이 붙어 보기 좋았고, 심장이 좋지 못해 창백했던 얼굴에는 혈색도 띠고 있었다.

“날씨가 참 좋구나.”

큰아버지가 크게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한동안 병원에 있던 터라 신선한 공기마저 새로웠다.

“아침이라 공기도 좋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큰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인생의 절벽에서 나타나 자신과 가족을 잡아당겨 준 고마운 아이였다. 그리고 가문의 숙원을 이루어주고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저 고맙고 미안할 뿐이었다.

“그래,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말인데 조만간 내가 도울 일이 없을까 한다만.”

“네? 아니에요. 아직 조금 더 쉬셔야죠.”

강우가 화들짝 놀라 말했다. 수술이 대성공으로 끝났다고 하지만, 아직 재활치료도 받는 큰아버지였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며 건강을 체크도 해야 했다. 강우는 큰아버지가 조금은 더 푹 쉬셨으면 했다.

“아니다. 사람은 가만히 쉬면 점점 녹스는 법이야. 뭐라도 해야겠어. 대단한 자리를 달라는 게 아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면 충분해.”

“......”

강우가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큰아버지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인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염치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

“아니에요.”

강우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큰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미안함이 가득 담긴 눈빛을 지었다.

“정식이에게 모두 들었다. 정말 대단한 일들을 해냈더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가족들은 전부 힘들게 살았을 거야. 역시 우리 가문의 장손답구나. 큰아빠는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었어요. 제 가족들이니까요.”

“그래, 하지만 장남인 나는 그러지 못했지.”

“그건 큰아버지 잘못이 아니에요. 모두가 힘들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강우의 위로에 큰아버지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강우를 보며 자신의 이십 대를 돌아보니 참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또 이렇게 된 세상을 원망했을 뿐이었다. 또 한때는 아버지가 왜 세상에 타협하지 않는지 이해도 못 했었고.’

하지만 강우는 달랐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정말 놀라운 일을 해냈다. 흔히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득권은 권고해졌고, 개천에서는 용이 날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개천에 잠들어 있던 용이었던 거지.’

큰아버지가 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고맙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마. 그게 내 건강에도 좋을 거 같아.”

“네, 큰아버지.”

강우가 씩 웃었다.

“그나저나 정말 괜찮겠니? 잠을 한숨도 못 자고 학교에 가야겠구나.”

“학교 가는 길에 잠깐 눈붙이면 충분해요.”

이윽고 강우와 큰아버지가 아침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응원의 열기가 남아있던 거실은 어느새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아주버니, 산책 잘 갔다 오셨어요?”

주방에서는 어머니가 아침을 준비 중이었다. 그 옆에는 큰어머니도 활짝 웃고 있었다.

“여보, 강우랑 산책하니까 좋죠?”

“그러게. 아침을 안 먹어도 든든할 만큼.”

덜컥.

방문이 열리고 학교에 갈 준비를 끝낸 강용이가 나왔다. 부스스한 얼굴을 보니 밤새 응원을 한 모양이다. 강용이가 강우를 슬쩍 보더니 살짝 미간을 좁혔다.

“형아, 8강전 때는 나랑 같이 응원하기로 한 거 까먹으면 안 된다.”

“어어….”

강우가 미안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어젯밤 응원에 강용이도 같이 가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아직 중학생인 강용이를 데리고 나갈 수는 없었다.

“좋아. 그럼 다음 응원은 집에서 또 다 모이는 거로 결정.”

강용이가 씩 웃으며 식탁에 앉았다. 이제는 제법 체격도 커진 강용이었다. 화장실 쪽에서는 박선영이 나왔다. 잘 차려입은 박선영은 출근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다음에 또? 작은엄마 힘드실 텐데.”

“괜찮아. 다 모이면 즐겁고 좋지.”

어머니가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옆에 있는 큰어머니와의 하루하루가 즐거울 따름이었다. 긴 세월 떨어져 있었지만, 원래부터 사이가 너무 좋았던 사이였다.

“빨리들 먹고 나갈 준비들 해요.”

큰어머니가 국을 뜨며 말했다.

“다들 잘 주무셨어요?”

역시 출근 준비를 마친 아버지가 방에서 나왔다. 양복을 잘 차려입고 특유의 이 대 팔 머리를 하고서였다.

“아버님은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 방을 슬쩍 바라보았다.

“어제 너무 늦게 주무셔서 피곤하신가 봐. 조금 더 주무신대.”

“네, 그럼 나중에 제가 따로 식사 차려드릴게요. 먼저들 드세요.”

늘어난 식구만큼 더 커진 식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물론, 밤을 새우고 온 박지영은 강우 방에서 꿈나라에 빠져 있었다.

“지영이 누나 내가 깨우고 올까?”

강용이가 강우 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박선영이 강용이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자라고 놔두자. 있다가 할아버지랑 같이 먹으면 되니까.”

“응, 누나.”

식사가 시작됐다. 큰집 식구들의 집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이렇게 자주 모여서 밥을 먹고는 했다. 떨어져 있던 시간을 보상하려는 듯 더 끈끈해지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후루룩. 후루룩.

큰어머니가 끓인 국은 정말 맛있었다. 큰어머니는 부산에서 식당일을 오래 하셨다. 공장에 있는 식당에서도 일하셨고, 일반 음식점에서도 일하셨다. 어머니만큼 손맛이 좋았다.

“잘 먹었습니다.”

“먼저 갈게요.”

등교가 시급한 강용이와 출근이 급한 박선영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강우가 현관으로 달려가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척 들었다.

“오늘도 파이팅!”

강용이가 강우를 보며 씩 웃었다.

“형아도 학교 잘 갔다 와.”

“어.”

강우가 구두를 구겨 신고 있는 박선영을 향해 말했다.

“오늘 점심 지나서 출근인데 벌써 나가요?”

“응, 가서 할 게 많아.”

박선영은 현재 사단법인 광복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강우는 그런 박선영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물론, 강우의 친척이라고 해서 특별대우는 없었다. 박선영은 제일 말단직위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일을 배워가고 있었다.

“오늘 사무실 올 거야?”

“아니요. 오늘은 학교만 가요.”

박선영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용이와 박선영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큰어머니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박선영의 생기 넘치는 모습에 부모로서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도 나가볼게요. 형, 집에 가서 푹 쉬어요.”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아버지가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했다.

“그래, 오늘도 고생하고 와라.”

“집에 가서 쉬다가 저녁에 밥 같이 먹으러 와요.”

아버지도 큰아버지를 참 그리워했나 보다. 날이면 날마다 같이 밥을 먹었다. 큰집이 사는 곳으로 갈 때도 있었고, 강우 집으로 올 때도 있었다.

“그래, 알겠어.”

아버지가 출근하고 강우도 학교에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 2학년이 된 강우였다. 사실 학교를 졸업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그만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졸업해야 한다며 강력히 주장했다.

쏴아아아-

샤워를 마치고 강우가 방으로 들어갔다.

“음냐….”

강우 침대에는 박지영이 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동갑내기인 사촌은 강우를 참 편해했다. 행여 박지영이 깰까 조심히 옷장을 열은 강우가 대학생다운 복장을 챙겨입었다. 한동안은 늘 정장을 입었던 터라 거울에 비친 모습이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준비 끝났니?”

가방을 메고 방을 나오자 거실에는 어머니와 큰어머니가 있었다. 두 분은 커피를 마시고 과일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함께 보고 있었다.

“네.”

“이리 와서 과일 좀 먹고 가. 아직 시간 있지?”

강우가 거실로 가서 탁자 앞에 앉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온통 월드컵에 관련된 이야기들뿐이었다. 큰어머니가 강우에게 과일을 하나 주며 말했다.

“우리 지영이가 강우 반만 닮았으면 좋겠네. 밤새워 놀고도 이렇게 일어나서 할 일 하고.”

“하하….”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편입 공부를 하는 박지영이 밤새워 논 것이 걱정되시나 보다. 어머니가 큰어머니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형님, 지영이 공부 열심히 하잖아요. 지금 나라가 다 축제 분위기인데. 조금 쉬게 해주세요.”

“그래도…. 빨리 시험에 붙어야지. 언제까지 강우한테 도움만 받을 수는 없잖아.”

큰어머니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큰집이 서울로 오면서 강우 가족에게 너무 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가족이지만, 그래도 넋 놓고 도움만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음…. 큰어머니가 부담스러우신가 보네.’

강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큰어머니 제가 제안할 게 하나 있는데요.”

“제안?”

큰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조금 전 아침에 산책하면서요. 큰아버지가 회사에 나와서 뭐라도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아직 큰아버지가 건강도 그렇고 조금 더 쉬셔야 할 거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어머니와 큰어머니가 강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강우 입에서 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했다. 강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단법인 광복에서 노숙자분들과 결식아동들 대상으로 급식 지원을 하고 있는 거 아시죠?”

“응, 알고 있어. 우리 강우가 참 좋은 일 많이 하는 거.”

“그거를 큰어머니가 좀 담당해주시는 게 어떨까요? 아 물론 운영은 재단에서 하고요 제공되는 도시락을 제조하는 거를 담당해주셨으면 해요.”

큰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망설였다. 그렇게 큰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내가 그렇게 큰일을 할 수 있을까?”

“네, 하실 수 있을 거예요. 큰어머니 식당에서 오래 경험이 있으시잖아요.”

강우의 말이 끝나자 어머니도 큰어머니에게 힘을 주었다.

“형님,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저도 도울게요 같이 해봐요.”

“그럴까?”

큰어머니가 자신감을 얻고 흥미를 보였다. 강우가 씩 웃었다.

“네, 그렇지 않아도 경험이 많은 분이 필요했어요. 재단에 일손도 부족하고요”

“알겠어. 그럼 큰아빠랑 상의해볼게.”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학교 다녀올게요.”

“그래, 조심히 다녀와.”

강우가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스르륵.

고급 세단이 기다렸다는 듯 강우 앞으로 나타났다. 강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장 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부사장님. 학교까지 모시겠습니다.”

“아…. 학교는 제가 가도 되는데….”

장 기사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안 됩니다. 그럼 제가 정말 큰일이 납니다.”

“알겠어요. 그럼 정문까지만 부탁드려요.”

강우가 차에 올라탔다.

“출발하겠습니다.”

고급 세단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 * *

스르륵.

서울대 정문에 고급 세단이 멈춰 섰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강우가 내렸다.

“오늘 감사했어요.”

“수업 끝나는 시간에 맞춰 오겠습니다.”

괜찮다고 하려던 강우가 이내 포기했다. 그런다고 오지 않을 장 기사가 아니었다.

“네, 그럼 연락드릴게요.”

“네, 부사장님.”

고급 세단이 떠나갔다. 그와 동시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선배님!”

“강우 선배님!”

강우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경영학과 후배들이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를 가나 참 시끄러운 강우의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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