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9화 (249/402)

오늘은 진짜 뭘 해도 즐거운가 봐.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강우와 친구들이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호프집은 금세 진정한 손님들로 가득 찼다. 별실에 있었지만, 대화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오늘은 진짜 뭘 해도 즐거운가 봐.”

이나은이 별실 문을 살짝 열어 밖을 살폈다. 온통 붉은색으로 가득 찬 호프집 안이 보였다. 흥에 넘치는 분위기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끝없이 새어 들어왔다. 그 기분 좋은 기운에 강우도 씩 웃었다.

‘IMF라는 길고 긴 터널 속에 있던 국민에게 2002년은 정말 못 잊을 해가 됐지.’

그리고 이때 얻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다시 대한민국을 뛰게 한 원동력일지도 몰랐다. 강우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이유는 있었다. 국민들은 지난 1년 남짓 동안 강우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사단법인 광복과 광복회가 연계해 진행하는 사업에 국민의 성금이 쏟아졌다.

‘친일 명부가 공개될수록 우리에게 압박이 시작됐다. 하지만 국민들의 힘으로 버텨낼 수 있었지.’

동양 무역과 대진 그룹의 구매 운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사단법인 광복에 후원금도 밀려들었다. 무엇보다 저들이 조종하고 사주하는 언론의 움직임에 흔들리지 않았다. 강우에게 그리고 강우와 함께해주는 조력자들에게 신뢰와 끝없는 지지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시작에 불과하다.’

제자리를 찾은 광복회와 함께 강우는 열심히 노력했다. 그 결과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의 복지는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한 상태였다. 하지만 강우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동양 무역과 대진 그룹이 더 부유해질수록 국민들의 성원이 더 모일수록 더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독립유공자분들과 후손들을 모두 돕고 나면 그다음은….’

성원을 보내준 국민들 차례라고 강우는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동양 무역과 대진 그룹은 사단법인 광복을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을 지원하는 단체에 머물게 할 생각이 없었다.

‘힘든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도 도울 수 있게 점점 범위를 넓혀간다.’

이미 운용하고 있는 장학지원금 외에도 강우는 구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은 정말 많았다. 강우는 그분들의 희생을 하나하나 놓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저들과 싸움은 이제 겨우 서막이 열렸을 뿐이니까.’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강우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강우의 한쪽 볼에 차가운 맥주잔이 닿아 있었다.

“뭐…. 뭐야?”

김춘배의 불콰하게 취한 얼굴이 맥주잔 너머로 보였다. 김춘배가 씩 웃었다.

“강우야~”

“왜 이래? 징그럽게.”

김춘배가 강우의 손에 맥주잔을 쥐여주었다.

“강우야, 저기 좀 봐라. 오늘 사장님이 특별 이벤트까지 준비하셨다던데. 이제 시작하려나 봐.”

“이벤트? 갑자기?”

강우가 슬쩍 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대목을 맞이해 호프집 사장님이 특별히 준비한 이벤트가 시작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문 MC까지 고용한 것으로 보아 제법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자자! 여러분 오늘도 목동 사거리의 대표 명물 벤허 호프집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MC의 행사 시작을 알리는 멘트와 함께 호프집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그 뜨거운 반응에 MC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이야~ 오늘 그렇게 응원을 하시고도 소리를 지를 힘이 남아있으시군요? 대단합니다 정말.-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늘은 벤허 호프집의 사장님께서 그동안 손님 여러분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드리기 위해 준비한 시간입니다. 작지만 내용은 튼실한 선물들도 준비되어 있으니 많은 참여와 성원 부탁드립니다.-

역시, 선물이라는 단어는 마법 그 자체였다.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남자들은 벌써 엉덩이를 들썩이며 선물을 쟁취할 준비를 했다.

-먼저 첫 번째 게임은 바로 500CC 잔에 든 생맥주를 가장 먼저 먹기입니다!-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흥미로워했다. 강우와 친구들도 별실 문을 활짝 열고는 행사에 집중했다. 생각해보면 지금 시기에 호프집에서 이런 행사를 자주 하고는 했다.

“안 나가?”

그때, 김춘배가 강우를 툭 하고 쳤다.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내가 왜 나가?”

“다들 너만 보고 있는데?”

강우가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강우를 보고 있었다. 강우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아니, 지금 너희들은 내가 저기 나가서 맥주 500CC 원샷하고 선물을 타왔으면 좋겠다는 거야?”

친구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했다.

“어.”

강우가 마지막으로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입을 가리고 웃던 이나은이 나가보라며 강우를 슬쩍 밀었다. 강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사람의 말은 몰라도 이나은이 나가서 상을 타오라면 돌격이었다.

“좋아. 나도 간다.”

강우가 손을 번쩍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게임을 위해 만들어진 계산대 옆 특별 무대로 향했다. 무대라고 해봐야 테이블 몇 개를 치우고 급하게 만든 것이었지만 말이다.

-자~ 오늘도 여자친구의 권유로 용감히 자리에 나온 남성분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앗? 여성분도 한 분 계십니다!-

행사 MC가 참가자들의 신상을 간단히 물으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시끌벅적한 호프집의 분위기 덕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열심히 진행했다. 그렇게 인터뷰가 진행되고 유일한 여성 참가자의 인터뷰 시간이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지금 이벤트 참가자 중 홍일점이신데요. 맥주를 정말 잘 드시나 보군요?-

MC의 질문에 여성이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강우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사실 여기 있는 박강우 님 팬이라서요! 싸인 받으러 나왔습니다!!!”

여성의 말에 강우가 흠칫했다. MC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강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기겁을 했다.

-서…. 설마! 그 박강우 씨이십니까?-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어둡기도 하고 온통 같은 색 옷에 강우 얼굴에도 잔뜩 페인팅이 되어 있었다. 강우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친구들의 마수에 탄생한 작품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그제야 사람들이 강우를 알아보았다. 순간, 호프집 안이 난리가 났다. 남녀를 불문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강우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곳에서도 느낄 수 있는 국민의 성원에 강우가 감사함을 느꼈다. 사방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며 조금이나마 그 마음을 표현했다.

“안녕하세요. 박강우입니다.”

-이야~ 이거 벤허 호프가 정말 명소이기는 한가 봅니다. 이렇게 유명한 분이 함께라니요.-

MC가 감탄성을 뱉어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나은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강우가 가는 곳에는 거의 항상 이나은이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MC도 빠르게 눈치를 채고 대응했다.

-혹시 탤런트 이나은 씨도 함께이십니까? 계시면 손 한 번만 들어주세요!-

MC의 말이 끝나자 이나은이 벌떡 일어나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뭇 남성들이 광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하지만 곧 여자친구들에게 제압을 당해 잠잠해졌다.

-이…. 이거 정말 계실 줄 몰랐는데요. 사장님 도대체 이 가게 정체가 뭐죠?-

MC의 질문에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강우랑 나은이가 예전부터 여기 단골이었습니다!”

자랑스러워하는 사장님의 표정에 MC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분을 이해할 것 같았다. 유명인사가 단골집이라니 뿌듯 할만했다. 그렇게 간단한 인터뷰가 끝나고 게임이 준비됐다. 홍일점으로 참가했던 여성은 목적한 바를 이루고 자리로 돌아갔다. 강우와 다른 세 명의 남자까지 총 네 명의 참가자가 결정됐다.

-자 준비된 500CC를 들어주세요.-

강우와 남성들이 잔을 들었다.

-지금 들고 있는 500CC 호프를 가장 먼저 마시는 분에게 오늘 안주 공짜권을 선물로 드립니다!-

나름 파격적인 상품에 호프집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친구들도 강우를 향해 힘을 내라며 파이팅을 외쳤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자 준비해주시고요. 셋을 세고 나면 시작입니다. 하나! 둘! 셋!-

카운트가 끝나고 참가자들이 일제히 잔을 들었다. 강우가 여유롭게 잔을 들어 목구멍을 개방했다. 그리고 ‘꿀꺽’하고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탁.

강우가 잔을 내려놓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치 마술처럼 사라진 500CC 맥주의 모습에 MC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겨우 반쯤 마시던 참가자들은 강우가 다 마셔 버린지 모를 정도였다. 강우가 MC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바…. 박강우 님이 1등입니다. 아니 지금 제 눈앞에서 뭐가 벌어진 거죠?-

MC가 당황하며 말하자 김춘배가 소리쳤다.

“괴물 같은 놈!”

호프집 안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강우가 MC를 향해 다가가 손을 ‘척’ 내밀었다. 게임은 게임이고 1등은 자신이었다.

“1등 선물 주세요.”

-아! 네네! 여기 있습니다.-

강우가 하얀색 봉투를 건네받았다. 슬쩍 안을 바라보니 –1일 안주 무료-라고 적힌 쿠폰이 들어있었다. 강우가 위풍당당 친구들을 향해 돌아왔다.

“와~ 박강우, 그거를 이 악물고 일등을 하네.”

친구들이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강우가 씩 웃었다.

“알지? 나 지고는 못 사는 거.”

“역시 우리 사촌이 최고네.”

박지영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게임은 점점 무르익어갔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이벤트가 남게 되었다. 역시 단골 게임인 여자친구 오래 안고 있기였다.

“우리도 나갈까?”

강우가 이나은을 향해 물었다.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당연하지. 선물 준다는데.”

역시 그 남자친구에 그 여자친구였다. 두 사람이 게임에 참가하러 나가자 또 환호성이 터졌다. 특히 이나은을 향한 남성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나은! 이나은!”

이나은은 그런 반응에 익숙했다.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남성들이 광분하며 뒤로 넘어갔다.

-이야~ 이거 오늘 제대로 날을 잡았습니다. 박강우 님과 이나은 님이 커플 오래 안고 버티기 게임에 참가하다니요. 여러분 다들 핸드폰 있으시죠? 이거 귀한 장면입니다. 다들 사진이라도 찍으세요.-

MC의 말에 사람들이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냈다. 2000년대가 넘으며 핸드폰 역시 보급이 끝난 상태였다. 또한, 핸드폰 기계 자체의 성능이 크게 발달한 시기였다.

-그럼 준비하시고. 시작해주세요.-

MC의 시작 선언과 함께 남성들이 여자친구를 번쩍 안아 들었다. 강우도 마찬가지로 이나은을 안았다. 환호성과 비명이 난무했다.

“안 무거워?”

이나은이 강우에게 매달린 채로 귓가에 속삭였다. 강우가 씩 웃었다.

“전혀? 완전 깃털 같은데?”

물론, 키도 크고 무게도 나가는 이나은이 정말 깃털 같은 무게인 것은 아니었다. 대진 엔터의 중요한 규칙 중 하나가 연예인의 건강한 삶이었다. 무리한 다이어트나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만들지 않았다.

“꺅!”

시간이 조금 흐르고 첫 번째 탈락자가 나왔다. 다른 남성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강우는 너무 태연했다.

-아니! 이게 뭡니까? 박강우 님은 멀쩡해 보이십니다. 정말 안 힘드십니까?-

MC가 강우에게 마이크를 가져다 댔다.

“네, 해가 뜰 때까지도 가능합니다.”

강우의 말에 이번에 여성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건장한 체격만큼 힘도 강한 강우였다. 그렇게 하나둘씩 탈락자가 생기고 결국, 강우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우승자는 박강우 님과 이나은 님 커플입니다! 상품으로는 사장님이 특별히 준비하신 한 달 맥주 무제한 쿠폰입니다!-

강우와 이나은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와…. 안주 공짜에.”

“술까지 공짜네?”

강우와 이나은이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는 커플이 다 해 먹네 아주!”

김춘배의 말에 강우가 쿠폰을 흔들며 말했다.

“아…. 이거 누구 주려고 했는데.”

“미안하다 친구야.”

김춘배가 바로 양손을 합치며 빌었다. 그 모습에 친구들이 또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가 슬쩍 별실 밖을 바라보았다. 행사가 끝나고 분위기는 최고조였다. 강우가 슬쩍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좀 심했지?”

“맞아.”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박지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강우, 네가 나가는 건 반칙이지.”

“맞아. 저 인간병기라면 온종일도 안고 있을걸?”

친구들이 공감하며 말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생각해보니 좀 미안하네.”

강우가 계산대에 있는 사장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사장님, 오늘 여기 계산은 제가 전부 할게요.”

“강우야,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에요. 오늘 정말 재밌었고, 좋은 날이잖아요.”

강우의 말에 사장님이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강우는 참 멋진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때였다.

-여러분! 오늘 박강우 님이 골든벨을 울리신답니다!! 마음껏 즐기세요!-

강우의 말을 들은 MC가 마이크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순간, 호프집 안이 떠나갈 듯 시끄러워졌다. 마치 역전 골을 넣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이왕 쏘는 거 제대로 쏘지 뭐….’

그렇게라도 지금 이 기분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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