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8화 (248/402)
  • 한국이 이긴다.

    2002년 6월. 긴 IMF의 터널에서 공식적으로는 벗어난 한국은 축제의 도가니에 빠져있었다. 사람들은 한동안 억눌렸던 감정을 폭발이라도 시키듯 달아올랐다. 거리는 온통 붉은 물결이 가득했고, 어디를 가던 축구 이야기뿐이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사방에서 일사불란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온통 붉은 물결이 가득 찬 광화문 광장에는 응원의 열기로 가득했다. 그 무리 속에는 강우가 앉아있었다. 강우를 중심으로는 신원주와 채보라, 김춘배와 김혜지, 남재식과 박지혜가 앉아있었다.

    “아아…. 어떡해?”

    강우 옆에 앉아있는 박지영이 탄식을 뱉어냈다. 경기는 끝나가고 있었고, 점수는 대한민국이 0:1로 지고 있었다. 이대로 끝난다면 지쳐있던 국민을 위로해 주었던 한여름 밤의 꿈은 끝이었다. 박지영뿐만이 아니었다. 강우 주변을 지키듯 둘러앉은 친구들도 잔뜩 낙담해 있었다.

    “아직 안 끝났다. 좀만 기다려봐. 동점 골 넣을 거야.”

    강우의 말에 친구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비단 이번 경우만이 아니었다. 월드컵이 시작하고 강우는 한국의 성적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친구들도 이제는 완전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골 넣는 거 놓친다?”

    박지영과 친구들이 다시 대형 스크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후반전 끝 무렵이었다.

    “어어어어?”

    친구들이 비명을 질렀다. 대한민국 선수 한 명이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우당탕 공을 잡았다. 그 순간 강우가 슬쩍 귀를 막았다. 이윽고 광화문 일대가 엄청난 환호성과 비명으로 가득 찼다.

    -우아아아!-

    -고오오오올!-

    마치 땅이 흔들리는듯한 느낌이었다. 극적인 동점 골에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있었다. 강우는 차분히 앉아 온통 난리가 난 주변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아…. 이런 건 또 별로네….’

    미래 기억으로 결과를 알고 있는 강우였다. 각본 없는 드라마를 보는 친구들과는 달리 강우에게는 이미 완결까지의 대본도 있었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쳐 갔다.

    “강우야, 너 어떻게 알았어?”

    얼굴에 태극마크를 그린 박지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대박! 박강우 너 진짜 뭔데?!”

    친구들이 강우를 우르르 덮치며 비명을 질렀다. 강우가 두 눈을 감고 태연히 자세를 유지했다. 친구들이 한바탕 강우를 가지고 놀았다.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고 목을 조르고 난리가 났다. 강우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대박! 대박!”

    친구들이 자리에 앉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연장전 가면 한국이 이긴다.”

    그 말에 친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숨을 죽이고 스크린에 집중했다. 연장전이 진행되던 순간이었다.

    “우아아아!”

    “박강우 이 미친놈!!”

    극적인 역전 골이 터졌다. 광장이 다시 광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강우는 고개를 끄덕하며 미래 기억이 확실함을 다시 느꼈다.

    ‘아…. 지영이 요리실력 때 한 번 틀렸지.’

    강우가 슬쩍 박지영을 바라보았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 오며 부산 친구들과 멀어진 박지영이었다. 그런 박지영을 위해 강우가 친구들을 소개해주었다. 동갑내기이기도 했고, 원체 붙임성도 좋은 박지영은 금세 친구들과 친해졌다.

    “야야! 그만 좀 하라고.”

    강우가 친구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때다 싶어 강우에게 장난을 치던 친구들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강우야, 너 진짜 대박이다.”

    박지영이 강우를 보며 엄지를 ‘척’ 들었다. 무려 축구 강호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었다. 첫 실점을 했을 때는 모두가 좌절했었다. 그런데 강우는 한국이 승리할 것을 정확히 예측했다. 더군다나 연장전에 극적인 골든골까지 예측했다.

    “내가 원래 감이 좋잖아. 감이.”

    “아니 그래도 이건 좀 심한데?”

    박지영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골 넣는 시간이랑 선수까지 말해줬으면 아주 기절을 했겠네.’

    그렇게 한참이 지나도 광란의 분위기는 꺼질 줄 몰랐다. 경기가 끝났음에도 광장에 설치된 특설무대에서는 축하 공연이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성을 지르고 모르는 사람들도 서로 얼싸안고 난리도 아니었다.

    “강우야, 이제 행사 다 끝난 거 같아. 나은이 마중 가자.”

    대혼란 속에서 박지영이 강우를 끌어당겼다. 강우가 힐끗 광장 앞에 준비된 무대를 바라보았다. 이나은은 방송국에서 준비한 오늘 행사의 무대 MC였다. 강우와 박지영이 행사에 참여한 연예인들이 사용하는 대기 천막으로 향했다. 엄청난 인파를 뚫고 가느라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애들아, 오래 기다렸어?”

    이윽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이나은이 나왔다. 진하게 했던 화장까지 지운 이나은은 수수한 모습이었다. 박지영이 환하게 웃으며 이나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냉큼 팔짱을 꼈다.

    “아…. 맨날.”

    박지영이 서울로 오고 나서 팔짱을 낄 선수를 항상 뺏기는 강우였다. 이나은이 박지영과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이나은과 함께 무대 MC를 보았던 남성이 천막에서 나왔다.

    “나은 씨, 오늘 수고했어요.”

    “네, 선배님도 수고 많으셨어요.”

    “나은 씨랑은 호흡이 잘 맞아서 참 좋아요. 다음에도 또 같이 일해봅시다.”

    “네.”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강우가 남성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지금 눈앞의 개그맨은 강우가 몇 년 전에 영입한 대진 엔터 소속의 개그맨이었다. 지금도 서서히 인기를 얻어가고 있었고, 먼 미래에는 독보적인 위치에 서는 남성이었다.

    “아이고 부사장님!”

    남성이 강우를 알아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힘든 시기에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직접 만나 계약하자고 해준 고마운 사람이 바로 강우였다.

    “오늘 진행 잘하시던데요?”

    “그런 말씀 마세요.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 말이 들리기나 하는지 걱정도 되고, 또 너무 사람들이 몰려서 관중분들이 행여 다치기나 하면 어쩔까 걱정도 되고요. 아무튼, 오늘 나은 씨가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뻔했습니다.”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알려진 대로 수다 그 자체인 남성이었다. 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겸손함과 관중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묻어있었다.

    “저도 그 무리 속에서 깔려 죽을뻔했습니다.”

    “하하! 부사장님도 참.”

    남성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말을 이어가려 했다. 강우가 움찔하며 선수를 쳤다.

    “그럼 빨리 가서 쉬세요. 오늘 스케줄 끝이시죠?”

    “네, 오늘은 이 행사 때문에 스케줄을 전부 비워놨습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광장에서 있었던 행사는 대진 엔터가 주관사였으니 말이다. 강우는 미래 기억으로 2002년 월드컵을 이용한 여러 가지 마케팅을 선점한 상태였다. 월드컵 시작 전에는 한국 국가대표에 대한 기대감이 적었으니 관심이 있던 기업들이 적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부분의 행사랑 광고를 독점하는 바람에 다른 기업들이 배가 아파 죽으려고 한다던데.’

    이윽고 남성이 그만 가보겠다며 돌아갔다. 이나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다들 어디 갔어? 안 왔어?”

    “같이 있었지.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길에 다 흩어졌다. 사람이 워낙 많아야 말이지.”

    강우가 대기 천막을 둘러싸고 있는 펜스 너머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여름밤의 열기는 도저히 식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전화해 보자.”

    이나은이 핸드폰을 꺼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발신 자체가 먹통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으니 전파가 정상적으로 오고 갈 리가 없었다.

    -고객이 전화를….-

    몇 번이고 전화 연결을 시도하던 이나은이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강우야, 어떡하지? 연락이 안 되는데.”

    “음….”

    강우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애들이 눈치가 있으면 거기로 오겠지.”

    “거기? 아~”

    이나은이 알겠다는 듯 웃었다. 강우가 말한 곳은 친구들과 항상 모이는 목동사거리의 호프집일 것이었다.

    * * *

    딸랑.

    가게 문이 열리고 강우와 이나은 그리고 박지영이 들어섰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가게 안의 모습에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를 알아본 가게 사장님이 반색하며 다가왔다.

    “강우, 왔구나? 나은이도 왔네?”

    강우와 이나은이 꾸벅 인사를 했다. 단골이다 보니 사장님과는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애들은요?”

    강우가 가게를 둘러봤다. 그러자 사장님이 안쪽에 있는 별실을 가리켰다.

    “저기 모여 있다.”

    “네, 고맙습니다.”

    강우가 별실로 다가갔다. 자주 오는 강우와 친구들을 위해 특별히 별실 형태의 장소도 새로 만든 사장님이었다. 강우와 이나은을 알아보는 손님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꼭 강우와 친구들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드르륵.

    별실 문을 열자 친구들이 마치 패잔병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뭐야? 왜들 이리 지쳐있어?”

    강우를 발견한 김춘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진짜 인파를 뚫고 왔다.”

    “그 와중에 또 춘배 알아본 사람들도 있어서 사인까지 해주고 사람은 몰리고 난리도 아니었어.”

    김혜지가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다며 몸을 떨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래도, 이제는 알아봐 주는 분들도 많고 좋잖아.”

    “그렇기는 하지.”

    김춘배가 헤벌쭉 웃으며 좋아했다.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김춘배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영화에도 출연하고 드라마도 출연했다. 이제는 제법 인지도를 쌓아 배우 김춘배라는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쟤는 아까부터 핸드폰만 붙잡고 있다.”

    김춘배가 남재식을 가리켰다. 남재식과 박지혜는 핸드폰을 같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법 심각한 남재식의 표정에 강우가 물었다.

    “왜? 서버 터졌어?”

    “어, 지금 고객 센터 게시판이 난리라고 연락이 왔네.”

    남재식은 2002년 월드컵을 모티브로 한 모바일 축구게임을 출시한 상태였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이 대성공하자 다운로드 수가 폭등하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축구게임뿐만이 아니었다. JG 소프트는 모바일 게임 시장을 장악한 상태였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었다. PC 게임 시장에서도 한국 1위의 기업이었다.

    “어차피 오늘 복구 못 할걸? 기본적인 통화도 안 되는 상황인데.”

    “하…. 그러겠지.”

    결국, 남재식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박지혜가 그런 남재식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빠, 너무 속끓이지 마. 고객들도 다 이해해 주겠지.”

    “응.”

    남재식과 박지혜가 서로를 바라보더니 좋아죽겠다는 듯했다. 그 닭살이 돋는 모습을 지켜보던 신원주가 한마디를 했다.

    “거참 사람 많은 데서 자제 좀 하자.”

    “왜?! 우리가 남이야?”

    신원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

    친구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와 이나은이 자리에 앉았다. 박지영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문은 했어?”

    강우가 텅 빈 테이블 위를 바라보며 물었다. 신원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주변을 가리켰다.

    “주문은 했지. 그런데 일단 저것부터 다 정리하고 천천히 해주신다고 하더라. 아마 조금 있으면 손님들도 더 몰릴 거고.”

    거리로 뛰쳐나간 사람들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면 다시 모여들 것이 분명했다. 오늘 이 분위기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케이. 그럼 나머지 애들도 온다고 했으니까 천천히 기다리자.”

    늦게 합류할 멤버는 연정호와 조민정 그리고 박광웅이었다. 안주도 술도 없었지만, 강우와 친구들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각자의 자리에서 바쁜 만큼 오늘 모인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드르륵.

    이윽고 문이 열리고 양복을 입은 연정호가 나타났다.

    “미안, 늦었다.”

    “미안~”

    조민정도 함께였다.

    “이야~ 우리 영감님! 이제 오시는 겁니까?”

    최근 형사물에 출연했던 김춘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연정호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난 왜 나를 영감님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니까? 이렇게 젊은 영감 봤냐?”

    “하는 건 영감님 맞지 뭐.”

    조민정의 말에 연정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별실 문이 열리고 주문한 음식들과 술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문한 양이 많아서 사장님도 함께였다.

    “이야…. 이거 우리 단골손님들 다 모였네?”

    가게 사장이 강우와 친구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직도 가게 안을 조심스럽게 들어오던 강우와 친구들의 모습이 생생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이렇게 각자의 자리를 잡은 모습을 보니 괜히 자신이 뿌듯했다.

    “자자. 오늘은 8강 진출 기념으로 안주는 무료로 쏜다.”

    사장님의 선언에 강우와 친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돈이 얼마나 많든지 어떤 자리에 있든지 공짜라는 말은 참 매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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