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7화 (247/402)

돈은 나중에 벌어도 돼.

광복회 회장실에 강우가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할아버지와 최준이 있었다. 강우와 두 분 할아버지 맞은편에는 권태복 회장과 백도종 이사가 있었다.

“이제야 광복회가 제자리를 찾아가겠군.”

백도종 이사가 연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권태복 회장이 강우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는가? 지금 자네가 하려는 일들은 정말 민감한 문제들이라네.”

“알고 있습니다. 민감하고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그동안 나서는 사람도 없었고요.”

강우의 말에 권태복 회장이 부끄러운 기색을 떠올렸다. 백도종 이사도 민망한지 슬쩍 고개를 떨궜다.

“우리 강우는 한다면 하는 아이일세. 그리고 무모하게 덤비는 아이도 아니지. 이렇게 시작을 했다는 건 다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니 걱정하지 말게.”

할아버지의 말대로였다. 강우는 이제 자신이 있었다.

“일단 소송을 맡을 변호인단도 모두 고용한 상태입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 쪽에도요. 그리고 국내에 공개된 친일 명부는 재계를 시작으로 하나씩 하나씩 범위를 넓혀갈 생각입니다.”

강우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는 여론전이 될 겁니다. 저들은 어떡해서든 우리가 하려는 일을 폄하하고 방해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광복회의 역할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동안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광복회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이었다. 광복회가 독립투사들과 후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한다면 그것만큼 좋은 건 없었다. 강우는 그러기 위해 광복회의 썩은 부분을 도려낸 것이다.

“앞으로 광복회와 사단법인 광복은 한 몸처럼 움직일 겁니다. 회장님이 많이 협조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알겠네. 그건 걱정하지 말게. 최전선에 나서지는 못하더라도 지원은 아끼지 않음세.”

방어적 성향이 강한 권태복 회장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백도종 이사는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광복회와는 별도로 나도 적극적으로 돕겠네. 내가 가진 인맥을 총동원하겠네.”

백도종 이사는 오래전 국회의원을 지낸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통일부 장관을 역임도 했었다. 물론 정치판에 환멸을 느끼고 은퇴를 빨리했지만 말이다.

“감사합니다. 어르신들이 계시니 든든합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권태복 회장이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괜찮으면 내가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 괜찮겠나?”

“닭칼국수 사주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강우의 말에 권태복 회장이 부드럽게 웃었다.

“당연히 거기로 갈 생각이었지.”

* * *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강우가 운전하고 있었다. 조수석에는 박선영이 타고 있었고, 뒤쪽에는 할아버지와 최준이 있었다.

“누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조수석에 앉아있던 박선영이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강우를 보며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 정말 대단했어. 나도 강우처럼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박선영도 자신이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힘든 생활고에 하루하루를 살기 바빴을 뿐이었다. 강우는 그런 박선영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누나 재단 나와서 차근차근 일 배워 볼래요?”

“정말?”

박선영이 눈을 빛냈다. 상기된 얼굴을 보니 정말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 보였다. 강우가 씩 웃었다.

“네, 대신 내 누나라고 막 봐주고 그런 거 없어요. 진짜 밑에서부터 하나씩 배워야 해요.”

“당연하지. 나도 그런 건 싫어.”

강우가 고개를 끄덕했다. 박선영이 잔뜩 신이 난 표정이 되었다. 강우가 그런 박선영을 보며 미래의 기억을 떠올렸다.

‘선영이 누나가 원래 리더십도 있고 일 처리도 꼼꼼히 잘하는 스타일이었지.’

박선영이 미래에 일하게 된 곳도 사단법인 광복과 비슷한 일을 하는 곳이기는 했었다. 박선영은 남을 돕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허허…. 이거 아주 보기가 좋구나.”

뒷좌석에서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긴 세월을 두고 다시 만난 사촌 간에 우애가 깊으니 흐뭇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자네 손주들이 이리 든든히 있으니 부러워.”

최준이 부럽다는 듯 말했다. 할아버지가 최준의 손을 잡았다.

“형님, 어디 강우랑 선영이가 제 손주들이기만 합니까? 다 형님 손주들이라 생각하세요.”

“그럼 그럼 나야 그러면 좋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 훈훈한 공기가 흘렀다.

* * *

이른 아침. 강우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를 발로 툭 눌러 끄고 창문을 열었다.

짹- 짹-

이른 새벽 뿌연 안개가 낀 거리에 새가 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아직 출근도 전인지 아파트 단지는 한산했다. 강우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우두둑. 우두둑.

온몸에서 뼈 소리가 나며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전역한 이후로 운동량이 확 준 강우였다.

‘헬스장이라도 다녀야 하나.’

강우가 방 안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온몸의 잔근육들이 불끈불끈 성을 내며 움직였다.

덜컥.

방을 나온 강우가 거실에 있는 할아버지와 최준을 발견했다. 두 분은 아침 일찍 시작하는 뉴스를 보고 계셨다. 뉴스에서는 마침 친일 명단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단법인 광복에서 2차로 발표한 친일 명부에는 재계의 유명 인사들이 대거….-

할아버지와 최준은 주먹을 움켜쥔 채 뉴스를 보고 있었다. 강우가 그런 두 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면을 바라보는 두 분의 얼굴에는 옅은 분노가 느껴졌다. 사회 곳곳에 뿌리박은 저들의 존재는 생각보다 광범위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강우가 두 분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잔뜩 집중하고 계시던 두 분 할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래, 잘 잤니?”

“네.”

강우가 다시 꾸벅 인사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샤워를 하고 나온 강우가 다시 방에 들어갔다. 로션을 바르고 옷을 챙겨입는 순간.

뚜르르. 뚜르르.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른 새벽에 누군가 싶은 강우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강우야, 나야 정호.-

강우가 눈을 크게 뜨며 반가워했다. 정말 오랜만에 연락이 온 연정호였다.

“정호야!”

-오늘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냐?-

역시 깔끔히 용무만 말하는 연정호였다. 강우가 변하지 않은 친구의 스타일에 픽 웃었다.

“없어도 내야지. 이게 얼마 만인데.”

-알았어. 그럼 네가 서초동으로 좀 와주라. 내가 시간이 많지가 않아서.-

역시 마이페이스인 연정호였다.

“알겠다. 지금 준비하고 나갈까?”

-그럼 나야 좋지. 만나서 아침이나 먹자.-

“오케이. 연락할게.”

강우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주방에서 아침 준비가 한창이던 어머니가 강우를 불렀다.

“아들, 어디 가? 아침 먹어야지.”

“저 약속이요.”

강우가 급하게 현관을 나섰다. 할아버지와 최준 그리고 어머니가 현관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후, 강우가 서초동 사법연수원 앞에 도착했다. 강우가 핸드폰을 꺼내 연정호에게 연락했다.

“나야. 지금 연수원 앞이다.”

-지금 나갈게.-

강우가 차를 주차하고 연수원 입구에 섰다. 이른 새벽 연수원의 앞은 고요했다. 그렇게 조금 지나자 연수원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양복을 잘 차려입은 연정호였다.

“정호야!”

강우가 반가움에 손을 흔들었다. 강우가 제대할 때 마침 연수원에 입소해 얼굴을 보기 힘들었었다. 연정호가 강우를 발견하고는 마주 손을 흔들었다.

“박강우!”

강우에게 다가온 연정호가 환하게 웃었다. 강우의 시선이 연정호가 입은 양복의 가슴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연수생 신분을 증명하는 배지가 당당히 달려있었다. 강우가 다시 연정호를 바라보았다. 가슴에 달린 배지만큼 당당한 표정을 한 연정호였다.

“잘 지냈냐? 신수가 훤하다?”

“훤하기는 아주 죽을 맛이다. 그나저나 너는 더 건강해진 거 같다?”

연정호가 강우의 몸을 만지작거렸다. 강우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연정호가 픽 웃더니 강우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시간이 별로 없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좋지.”

강우와 연정호가 연수원을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콩나물국밥집으로 향했다.

“이모, 여기 국밥 두 그릇이요.”

연정호가 익숙한 듯 주문했다. 강우가 수저를 놓으며 물었다.

“자주 오나 봐?”

“기숙사 밥 질릴 때 가끔?”

이윽고 주문한 국밥이 나왔다. 두 사람이 말없이 발을 말아 후루룩후루룩 먹었다. 순식간에 식사가 끝났다. 강우가 계산대로 가서 계산했다.

“내가 살게.”

“됐다. 연수원생이 돈이 어딨다고.”

연정호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연수생이 월급을 받긴 했지만. 적은 액수였다. 그 돈으로 집에 돈을 부치고 한 달 생활까지 하려면 빠듯한 게 사실이었다.

“커피?”

가게 밖으로 나오지 커피 자판기가 있었다. 자판기 커피를 좋아하는 연정호를 위해 강우가 커피를 뽑았다. 자신의 것으로는 율무차를 뽑았다.

“어디가 앉을 때 없나?”

“이쪽으로 가자.”

연정호가 앞장서서 걸었다.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벤치가 있었다. 강우와 연정호가 나란히 앉았다.

“입대할 때도 못 가보고 제대하고도 못 가서 미안하다.”

연정호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미안하기는 너 사법고시 준비하는 거 알고 있었는데 뭐…. 그리고 나 제대할 때에는 연수원에 있었잖냐.”

“그래도.”

미안해하는 연정호의 어깨를 강우가 툭툭 건드렸다.

“그래도 나 배웅도 안 하고 마중도 안 나온 보람은 있네. 이렇게 떡하니 사시도 패스하고.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네가 공부에 미친 건 알았지만 진짜 대단해.”

“하하….”

강우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연정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축하한다. 역대 최연소 합격자라며?”

“뭐…. 그렇게 됐다.”

연정호가 사시에 합격한 나이는 무려 23살이었다. 강우가 가진 미래 기억에 의하면 이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것이다.

“진짜 그게 가능하냐?”

“죽어라 공부만 했지.”

연정호가 지난 고시 생활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책에만 묻혀 살았던 시간이었다.

“뭐가 그리 급해서 이렇게 일찍 사시 도전을 한 거야? 빨리 사시 합격하고 변호사라도 되려고?”

형편이 좋지 못한 연정호의 가족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변호사가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물론 검사나 판사가 돼도 미래가 보장되지만, 변호사가 되어 직접 돈을 버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주로 가난한 고시 합격생들이 검사나 판사가 되어 부잣집 딸들과 결혼하는 그런 경우지….’

하지만 강우는 연정호를 잘 알았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연정호였다. 그리고 자신을 뒷바라지한 조민정과 헤어질 마음도 절대 없을 것이었다. 연정호는 신의가 있고 강직한 성격이었다.

“아니. 나 변호사 안 할 건데?”

연정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강우가 연정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했던 생각이 틀렸나 싶었다.

“그럼? 검사? 판사?”

연정호가 씩 웃으며 답했다.

“나 검사할 거야. 돈은 나중에 벌어도 돼.”

“어?”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연정호가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내가 왜 죽어라 고시 공부했는지 아냐? 하루라도 빨리 너를 돕고 싶어서야.”

“나를?”

연정호가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고시 공부를 결심하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너랑 나랑 화장실에서 싸운 날. 나는 너를 원망하고 질투했어. 그런데 너는 그런 나를 돕기 위해서 학교에 장학금 제도까지 만들었었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연정호와 술 한잔하며 나눈 이야기였다.

“그랬었지. 저번에 이야기했었잖아.”

연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나는 다짐했다. 내 모든 힘을 걸고 너를 돕겠다고. 그래서 고시에 죽어라 매달렸다.”

“야….”

강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몰랐던 친구의 마음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연정호가 다 마시고 난 종이컵을 움켜쥐었다.

“검사가 되겠다는 사람으로 이런 말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거 안다. 하지만 나는 너라면 내가 생각하는 정의를 벗어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

강우가 말없이 연정호를 바라보았다. 연정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연수 기간도 남았고. 검사가 돼도 일개 평검사니까 무슨 힘이 있을까 싶기도 해.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저 높은 곳까지 가서 네가 꿈꾸는 일을 도울 테니까.”

연정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연정호를 올려다보았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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