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6화 (246/402)
  • 나도 돼지갈비 콜.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우가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비어 있는 아파트에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강우가 안으로 들어서자 뒤쪽에서 큰어머니와 박선영이 따라 들어왔다.

    “가…. 강우야.”

    아파트 안을 확인한 큰어머니가 입을 벌리며 당황스러워했다. 너무나 넓은 평수에 깜짝 놀란 것이다. 더군다나 아파트가 위치한 곳이 강남이었으니 말이다.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우리 집이랑 최대한 가까운 곳을 구하려고 했는데 매물이 마땅치 않아서 조금 멀리 있는 곳으로 구했어요.”

    그래 봤자 걸어서 십 분 거리였지만 말이다.

    “마음에 들어. 그런데 너무 부담을 주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정도 해드릴 여유는 충분하니까요.”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박선영이 집을 둘러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크고 비싼 집이었지만, 더는 부담스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게 강우가 원하는 것이고 부탁한 것이었다.

    “일단 부산에서 가지고 온 짐 중에 정말 필요한 것만 옮길게요. 나머지 가전이랑 가구들은 지금부터 사러 가요.”

    큰어머니가 놀라 입을 벌렸다. 더 놀랄 일이 있나 싶었는데 강우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강우야, 그런 건 우리가 천천히 하나씩 살게.”

    “아니에요. 제가 사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강우가 큰어머니와 박선영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강우는 곧장 가전매장부터 향했다.

    “일단 냉장고랑 세탁기랑 텔레비전이랑 에어컨도 한 대 사요.”

    강우가 늘어놓은 목록에 큰어머니와 박선영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숫제 모든 살림을 새로 사줄 기세였다.

    “안녕하세요. 어떤 걸 보러 오셨습니까?”

    매장직원이 강우에게 다가왔다. 강우가 필요한 것들을 모두 말하자 매장직원이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안색을 찾고 친절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다 최신형으로 주세요.”

    “네네!”

    매장직원이 활짝 웃었다.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멀리서 백화점 직원이 한 명 달려왔다. 강우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이곳 VIP 담당 매니저입니다. 박강우 부사장님이 오셨다고 해서 안내를 해드리러 왔습니다.”

    “아…. 그런가요.”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언제 이 백화점 VIP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안내해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음…. 그럼 저 말고 저기 제 큰어머니랑 사촌 누나인데요. 오늘 쇼핑에 불편함 없이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네, 맡겨만 주십시오.”

    매니저의 태도는 공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우가 누구던가. 재계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떠오르는 중요 인물이었다. 박강우를 알아보고 연락을 해준 보안 요원들이 아니었다면 큰 실례를 범할뻔했다고 생각했다.

    “큰어머니 가전은 제가 마무리할게요. 가구랑 필요한 거 오늘 오신 김에 전부 사세요.”

    “그…. 그래도 될까?”

    큰어머니가 어안이 벙벙한 듯 답했다. 강우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품에서 카드를 꺼냈다. 강우가 박선영에게 다가가 카드를 손에 쥐여주었다.

    “이걸로는 나머지 필요한 거 사요. 옷이라든지 생필품이랑 그동안 가지고 싶었던 거도 전부요.”

    “강우야….”

    박선영이 머뭇거렸다. 그러자 강우가 씩 웃었다.

    “아니 인제 와서 딴소리하기 있어요? 내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죠?”

    “알겠어.”

    박선영이 씩 웃으며 카드를 받았다. 강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저는 일 층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부사장님, 따로 기다리실 곳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매니저가 강우를 향해 말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강우는 다른 직원의 안내를 받아 VIP 전용 휴게실에 도착했다. 휴게실에 앉은 강우가 그동안 밀린 신문도 보고 뉴스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여자들이 쇼핑을 시작했으니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똑똑.

    휴게실을 누군가 노크했다.

    “네.”

    덜컥.

    문이 열리고 매니저가 들어왔다.

    “가족분들 쇼핑이 끝나셨습니다.”

    “아…. 그래요?”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니 큰어머니와 박선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손에는 쇼핑백 몇 개가 들려있었다. 슬쩍 보니 옷과 신발 등 소소하게 쇼핑을 한 듯했다. 더 사라고 권하고 싶었지만, 강우는 참았다.

    ‘뭐…. 천천히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강우가 두 사람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필요한 거는 다 사셨어요?”

    “그래, 다 샀어. 고마워 강우야.”

    큰어머니가 강우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렇게 홀가분하게 무언가를 사본 적이 언제인가 싶었다. 강우가 박선영 손에 들린 쇼핑백을 보며 물었다.

    “누나는 가지고 싶은 거 다 사라니까.”

    “아니야. 나 정말 이거면 충분해.”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계산은 전부 끝났죠? 그럼 가전이랑 가구들 배송은 잘 부탁드립니다.”

    “네, 부사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강우가 씩 웃으며 인사를 했다. 매니저가 속으로 작게 탄성을 뱉어냈다. 다른 VIP들과는 달리 까탈스럽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강우였다.

    “큰엄마 이제 쇼핑했으니까 제가 맛있는 밥 사드릴게요.”

    “그래? 큰엄마가 오늘 복이 터졌네.”

    큰어머니가 활짝 웃었다. 고단한 삶의 무게로 주름진 큰어머니가 웃자 강우도 기분이 좋아졌다. 강우가 큰어머니와 박선영 손에 들린 쇼핑백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게요.”

    “아니야. 짐 많아서 무거워.”

    “제가 남는 게 힘이라서요.”

    강우가 짐을 모두 들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양손을 위로 들었다 내렸다. 큰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딸만 있는 큰어머니에게 강우라는 아들은 참 든든한 존재였다.

    “뭐 좋아하세요?”

    “글쎄?”

    큰어머니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외식다운 외식을 해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 났다. 강우가 슬쩍 물었다.

    “그럼 돼지갈비 어떠세요?”

    “돼지갈비? 맛있겠다.”

    박선영도 환하게 웃으며 동의했다.

    “나도 돼지갈비 콜.”

    세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백화점을 벗어났다. 그리고 근처의 돼지갈빗집에 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 * *

    스르륵.

    강우가 운전하는 고급 세단이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 앞에 들어섰다. 강우네 집에서 십 분 남짓한 거리인 이곳은 강우가 큰집을 위해 준비한 아파트였다.

    “큰엄마 저는 바로 가볼 데가 있어서요. 여기 열쇠요.”

    강우가 큰어머니에게 집 열쇠를 드렸다. 큰어머니가 열쇠를 받으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 되었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강우가 박선영을 보며 말했다.

    “저 먼저 갈게요.”

    “어디 가는 거야? 일하러?”

    박선영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 일은 아니고요. 광복회에 좀 가요. 할아버지가 거기 계신다고 해서요.”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박선영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강우가 잠시 박선영을 바라보았다.

    “누나도요?”

    “응, 나 꼭 네가 하는 일을 보고 싶어.”

    지금 박선영은 부산에서 올라오며 직장도 그만둔 상태였다.

    “안 될 거 없죠. 같이 가요.”

    “알겠어. 빨리 준비할게.”

    박선영이 방으로 들어가 가지고 온 짐을 풀었다. 그리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화장까지 금세 마치고 나왔다. 생기가 도는 박선영 얼굴을 보니 강우도 기분이 좋아졌다.

    “다녀오겠습니다.”

    “엄마, 갔다 올게요.”

    강우와 박선영이 집을 나갔다. 큰어머니가 강우와 박선영이 나간 곳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강우가 전해준 집 열쇠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마워 강우야.’

    큰어머니가 열쇠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는 행복해질 나날을 떠올리며 또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을 품었다.

    * * *

    광복회 회의실이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상석에 앉아있는 권태복 회장이 회의실의 한쪽을 바라보았다. 텅 비어 버린 자리를 보고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나창식 이사가 해임되자 그를 따르는 많은 이사진이 광복회를 나갔다.

    덜컥.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와 최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심해 있던 권태복 회장이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을 반겼다.

    “이보게 재봉, 어찌 됐는가?”

    권태복 회장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할아버지가 비어 있는 반대편으로 가 앉았다. 최준도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회의실 안의 시선이 할아버지에게 집중됐다.

    “그룹 본사에서 지원 허가가 떨어졌네. 곧 광복회에 공문이 날아올걸세.”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이사진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광복회의 자금줄과 같았던 나창식이 나가고 자금이 말라가던 차였다. 광복회는 비영리 단체이다 보니 지출이 수입보다 많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제 기능을 못 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도움을 받는 독립운동가들과 후손들이 있었다.

    “다행이네. 다행이야. 대진 그룹이 정말 큰일을 해주었어.”

    권태복 회장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할아버지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뭐라고 했는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지 않았나.”

    “고맙네.”

    권태복 회장이 할아버지를 향해 고마움을 표현했다. 할아버지가 남아있는 이사진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대신 조건이 있네. 앞으로 광복회는 사단법인 광복에서 지정한 감사를 철저히 받아야 할걸세. 그리고 지금 진행하고 있는 사업들도 재검토해야 할거고.”

    “전적으로 따르겠네.”

    권태복 회장이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단법인 광복이 하는 일들이 모두 대단히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창식 그 작자가 그동안 저질러 놓은 짓들이 너무 많습니다.”

    백도종 이사가 비어 있는 자리를 보며 살짝 몸을 떨었다. 그동안 나창식과 그 일당들이 저질러 놓은 폐해들과 비리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내부감사를 진행하며 백도종 이사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광복회 자금을 유용한 것은 물론이고, 사업 지원 대상자 선정에도 크게 관여한 정황이 있었다.

    “그것 또한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할 테지.”

    할아버지가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권태복 회장이 조금 걱정스러운지 한숨을 뱉어냈다.

    “우리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광복하던 그 당시에도 해내지 못한 일들을….”

    그 순간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해야 합니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강우가 나타났다. 강우 옆에는 블라우스와 정장 치마를 잘 차려입은 박선영이 있었다. 박선영은 오늘 하루 강우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강우는 허락했다.

    “강우야.”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고는 반가워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박선영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박선영도 살짝 웃었다. 강우가 걸음을 옮겨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강우가 등장하자 회의실 안의 시선이 모두 쏠렸다. 강우가 이사회 한 분 한 분과 눈을 마주쳤다. 나창식과 일당들이 나가고 남은 진정한 독립투사들이었다.

    “먼저 국내에 남아있는 배신자들의 친일 행적을 마저 공개할 겁니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강우는 전쟁을 선포하고 있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나서 일제에 강제 징용된 수많은 강제노역자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과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소송도 저희가 맡을 생각입니다.”

    권태복 회장의 눈이 놀라움에 크게 떠졌다. 백도종 이사는 알 수 없는 기운을 느끼며 몸이 달아올랐다. 강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광복회가 정상으로 돌아오면 그때부터 시작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이사진들이 손뼉을 치며 강우의 뜻에 지지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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