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이것도 예상한 거야?
늦은 밤. 강우가 집을 나섰다.
스르륵.
고급세단이 강우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이재원이 차에서 내렸다.
“와. 연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네.”
“미안해요.”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재원이 픽하고 웃으며 강우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잘 다녀왔지?”
“네.”
“물론 잘 해결하고 왔을 테고.”
“그것도 네.”
강우와 이재원이 씩 웃었다. 이재원이 강우 어깨를 툭 치고 앞장섰다.
“편의점이나 가자.”
“오케이.”
늦은 여름밤 편의점 앞에서 먹는 야식만큼 훌륭한 게 또 있을까. 두 사람은 곧장 편의점으로 향했다.
딸랑.
문을 열고 편의점에 들어온 두 사람이 경쟁하듯 먹을 것을 사기 시작했다. 물건을 집던 강우가 슬쩍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먹는 양이 엄청나게 늘어난 자신이야 그렇다 치고.
“형 굶었어요?”
이재원은 왜 저리 많이 사나 싶었다.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 오늘 점심부터 못 먹었다.”
“왜 굶고 다녀요.”
이재원이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인상을 썼다.
“누가 폭탄을 터트려놓고 자리를 비운 덕분이랄까?”
“아….”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전자레인지 앞에 나란히 섰다. 강우는 햄버거를 이재원은 샌드위치를 넣었다.
지이잉-
돌아가는 전자레인지를 바라보며 이재원이 물었다.
“집은?”
“근처에 구했어요.”
“참 너도 대단해. 그렇게 일일이 다 챙기고 사는 거 보면.”
“가족이니까요.”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이라면 이해 못 했을 말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 네 말이 맞지. 가족이니까. 그런데 언제 올라오셔?”
“병실에 자리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심장 수술이 쉽지 않을 텐데 잘됐으면 좋겠다.”
“저도요.”
띠- 띠-
전자레인지가 소리를 내며 조리가 끝났음을 알렸다. 강우가 전자레인지를 열어 햄버거와 샌드위치를 꺼냈다. 두 사람이 편의점 밖으로 나가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할아버지도 그러시고 너희 큰아버지도 그러시고 왜 이렇게 다들 몸이 안 좋으시냐?”
“음…. 그러게요.”
강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박씨 가문에는 병을 얻는 사람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저지른 업보 때문이라고 늘 한탄스러워하기도 하셨다. 할아버지 손에 죽은 적들의 숫자가 수십의 단위를 넘어갔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 왜 오라고 했었어요?”
강우가 물었다. 이재원이 살짝 망설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음…. 그게 말이야. 사실 본사에 LS그룹에서 연락이 왔었다.”
“무슨 연락이요?”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이번에 우리 재단에서 추진하고 있는 역사 현장 체험 프로그램 있잖냐.”
“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는 하얼빈을 시작으로 중국 중경까지 이어지는 독립운동 역사 체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었다.
“LS 그룹에서 거기에 지원을 좀 하고 싶다고 하더라.”
“음…. 그래요?”
강우가 별로 놀라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설마 이것도 예상한 거야?”
“조금요?”
사실 LS 그룹의 창업주는 독립운동가를 지원한 역사도 있었다. 그리고 먼 미래에도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지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주변에 알리는 스타일은 아니었지.’
그런 LS 그룹이 먼저 손을 뻗어온 것이었다.
“아마 이번에 네가 터트린 일 때문에 국민 관심이 쏠리니까 먼저 나선 거 같은데 말이야.”
“그건 아닐 거에요. 그렇게 머리 굴리는 기업은 아닐 거니까요.”
강우가 씩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거 때문에 나를 보자고 한 거예요? 그냥 통화로 하지.”
“그게 말이야 LS 그룹 본부장이 직접 찾아왔었어. 너를 만나고 싶다고.”
강우가 이제야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LS그룹 본부장이라면 이재원처럼 차기 회장이 유력한 인물이었다. 즉 재벌 2세라는 이야기였다.
“아…. 그랬군요. 이거 죄송하네요. 사적인 일 때문에.”
“아니야. 그쪽에서도 사전에 약속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거라서 미안하다고 하더라. 대신 날짜 잡아서 다시 미팅하기로 했다.”
“좋네요. 자금이 늘어나면 그만큼 더 많은 지원자를 모집할 수 있으니까.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어 보이네요.”
“오케이. 알겠다.”
잠깐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이 햄버거와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먹던 이재원이 컥컥거리며 가슴을 쳤다. 강우가 음료를 따서 내밀었다. 이재원이 벌컥 마시더니 살았다는 표정을 했다.
“땡큐. 숨넘어가는 줄 알았네.”
“천천히 좀 먹어요.”
이재원이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만들며 남은 샌드위치를 먹었다. 강우는 진작에 다 먹고 이재원이 폭풍 식사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이제 더는 나도 방패막이가 못 돼 줄 거 같아.”
“방패막이요?”
“그래, 우리 형들도 그렇고 주변에서 너 좀 모임에 데리고 나오라고 난리라니까.”
늘 사교모임에 초대가 쏟아지는 강우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었다. 체질상 그런 자리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바쁘기도 했었다.
“음…. 그럼 큰아버지 수술 잘 마무리되고 한번 약속 잡아봐요.”
“오케이. 그건 재중이 형한테 맡기면 딱 맞겠다.”
이재중은 재벌 2세들 사이에서도 알아주는 마당발이었다. 두 사람은 편의점 앞에 앉아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사업 이야기부터 시작해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 그리고 한참 진행 중인 연애 이야기까지. 정말이지 할 이야기가 많았다.
* * *
서울대 병원 앞에 강우와 박지영이 있었다. 박지영은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윽고 멀리서 구급차 한 대가 나타났다.
“저건가?”
박지영이 구급차를 가리켰다. 병원 근처에 오자 사이렌 소리를 끈 구급차가 서울대 병원 응급실 앞쪽에 섰다.
드르륵.
뒷문이 열리고 의료진 몇 명이 내렸다. 이윽고 큰아버지가 누워있는 이동식 병상이 내렸다.
“아빠!!”
박지영이 대번에 소리치며 달려갔다. 큰아버지가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현을 했다. 강우도 큰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그래, 조금 피곤한 거 빼고는 괜찮다.”
마지막으로 보호자로 함께 탄 박선영이 내렸다.
“누나, 큰엄마는요?”
“응, 오고 계셔.”
큰아버지는 곧장 준비된 병실로 향했다. 큰아버지가 특실에 도착했다. 이윽고 간호사들이 들어와 큰아버지에게 필요한 장치들을 설치했다. 간호사들이 한창 분주하던 때였다. 나이가 조금 든 의사가 병실에 들어왔다. 그 뒤에는 젊은 의사들이 잔뜩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서울대 병원 흉부외과 김준완 교수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정립 환자 보호자입니다.”
강우가 나서서 인사를 나누었다. 보호자라는 강우의 말에 박선영과 박지영이 든든한 기분을 느꼈다.
“일단 의료 기록은 전부 검토했습니다. 환자분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 바로 수술 일정을 잡을 생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우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훌륭하신 분의 후손분을 수술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렇게 김준완 교수는 큰아버지 상태를 한동안 체크하고는 병실을 나갔다. 널찍한 특실에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자 한적한 기운이 감돌았다.
“누나 좀 힘들었죠? 조금 있다가 큰어머니 오시면 우리 집에 모시고 다녀오세요. 다들 기다려요.”
“맞아, 언니 작은 엄마가 엄청 기다리셔. 그리고 강용이 보면 귀여워서 깜짝 놀랄걸? 장군이보다 귀엽다고.”
박지영의 말에 박선영이 피식 웃었다.
“그래, 알았어.”
큰아버지는 긴 이동이 힘드셨는지 곧 잠이 드셨다. 한참이 지나 큰어머니가 병원에 도착했고, 박선영과 함께 강우 집으로 향했다. 큰어머니가 얼마나 떨려 하시던지 아직도 그 얼굴이 생생했다. 병실에는 강우와 박지영이 남았다.
똑똑.
이윽고 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이나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박지영이 환하게 웃으며 절친이 된 이나은을 반겼다.
“그럼 우리 다녀올게.”
“어, 재밌게 놀다 와.”
오늘은 이나은과 박지영이 약속을 잡은 날이었다. 이나은이 박지영에게 쇼핑하자고 제안했고, 박지영은 대번에 좋다고 했다. 이나은과 박지영이 병실을 나갔다. 강우와 큰아버지만이 병실에 남았다.
‘......’
강우는 잠든 큰아버지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미래 기억 속에 큰아버지의 장례식까지 치렀던 강우였다. 심장이 좋지 못해 일찍 돌아가신 큰아버지였다.
‘이번에는 오래 사셨으면.’
강우가 나서서 최고의 의료진에게 수술을 받게 할 것이다. 그리고 꾸준히 관리를 받고 재활도 하셔야 할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났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렸다. 강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나은과 박지영이 벌써 돌아왔나 싶었다. 하지만 열린 문 사이로 들어선 것은 이나은과 박지영이 아니었다.
“정립아….”
복잡한 표정의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강우가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지금 주무시고….”
그 순간.
“강우야, 나 좀 일으켜줄래?”
오랜만에 듣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큰아버지가 눈을 떴다. 강우가 큰아버지를 부축했다. 큰아버지가 침대에 기대앉은 채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그 목소리에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원망도 죄송함도 그리고 그리움도 말이다. 강우가 슬쩍 자리를 비워주려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동시에 강우를 붙잡았다.
“강우야.”
강우가 움찔하며 나가려던 것을 멈췄다. 아직 어색한 두 분 사이에 강우라는 존재가 필요한 것 같았다. 강우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몸은 좀 괜찮은 거야?”
할아버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큰아버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답했다.
“네, 수술받으면 괜찮대요. 아버지.”
“그래, 나도 여기서 수술을 받았는데 서울대 의사들이 아주 실력이 좋아. 아무 걱정하지 말고 치료 잘 받으면 금세 건강해질 게다.”
“네, 아버지….”
큰아버지가 나지막이 답했다. 할아버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긴 숨을 뱉어냈다.
“미안하다. 막내를 그렇게 보낸 건 다 내 잘못이야. 그 당시 나도 너무 경황이 없고 슬퍼서 너에게 함부로 대했구나.”
“아니에요. 제가 어른스럽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불효자를 용서해 주세요.”
큰아버지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상체라도 절을 하려 했다. 할아버지가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하다.”
할아버지가 병상으로 다가가 큰아버지를 안아주었다. 큰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마주 안고는 눈물을 흘렸다. 고작 이렇게 한 번의 포옹으로 풀릴 응어리를 왜 부여잡고 살았는지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강우가 붉어지는 눈시울을 훔치며 슬쩍 몸을 돌렸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리고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만의 시간을 위해 병실을 나섰다. 병실 밖 복도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날 편의점에서 보았던 슬픈 표정 그대로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가 강우를 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강우가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형님은?”
“할아버지랑 이야기 중이세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을 바라보며 망설이는 걸음을 떼지 못했다. 강우가 그런 아버지의 등을 슬쩍 떠밀었다.
“빨리 가보세요. 지금 아니면 안 돼요.”
“.....”
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강우가 다시 아버지를 밀었다.
“빨리요. 가서 할아버지도 큰아버지도 위로해 드리세요.”
“알겠다.”
아버지가 병실로 들어갔다. 큰아버지가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곧 세 남자의 대성통곡이 시작됐다. 강우가 병실 앞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긴 숨을 뱉어냈다.
‘됐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