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4화 (244/402)

나도 기억남.

스쳐 지나가는 서울 풍경을 보며 박지영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렸을 적 이후로 처음 오는 서울은 참 많이 변해있었다. 부산도 큰 도시였지만, 서울과는 느낌이 매우 달랐다. 특히 높은 빌딩 숲들은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마음이 답답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 긴장되는데….”

박지영이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박지영은 강우가 서울로 돌아간다고 하자 따라나섰다. 큰집을 대표해 먼저 인사를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도착하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래 기억이 있는 강우와는 달리 기억도 희미한 친척들이었다. 이나은이 박지영의 손을 잡아주었다.

“다들 반겨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나중에 같이 올 때 올 걸 그랬나 봐.”

강우가 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아니야. 너 온다고 지금 다들 엄청 기다리는 중이라는데?”

“와~ 더 떨려.”

박지영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평일 오전의 서울은 평소보다는 한산했다. 택시는 빠르게 달려 강우 집이 있는 강남 압구정에 도착했다.

부우웅.

택시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강우가 알려준 아파트 동 앞에 택시기사가 택시를 멈춰 세웠다.

“감사합니다.”

강우가 택시비를 내며 인사했다. 택시기사가 강우를 보며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지금 하는 일 꼭 밀어붙이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강우가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강우를 알아본 택시기사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역사를 바로잡는 것에 대한 칭찬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탁. 탁.

이나은과 박지영도 택시에서 내렸다. 박지영이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우와…. 집 좋다.”

강우가 씩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세 사람이 문 앞으로 걸어갔다. 철문 너머로 시끌시끌한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아마 박지영이 온다고 잔뜩 무언가를 준비 중인가 보다. 강우가 거침없이 문을 열려고 했다.

“자…. 잠깐!”

박지영이 그런 강우를 붙잡았다. 그리고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이나은이 손가락을 동그라미를 그렸다.

“오케이. 화장 완벽 머리도 깔끔. 이쁘다.”

“후…. 이제 됐어.”

강우가 픽 웃으며 열쇠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역시나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손이 큰 어머니가 잔치라도 준비하는 모양이다.

“다녀왔습니다.”

강우가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강용이가 후다닥 달려 나왔다. 잔뜩 신난 표정을 보니 강우의 마음이 흐뭇해졌다.

“형아, 왔어?”

강우가 씩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강용이가 궁금한 듯 강우 뒤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강용아, 누나 왔어.”

“누나!”

강용이와 이나은이 반갑게 인사했다. 그리고 이나은 뒤쪽에서 박지영이 슬쩍 모습을 나타냈다. 순간 강용이와 박지영의 시선이 맞닿았다.

“어…. 안녕? 네가 강용이구나.”

“아…. 안녕하세요.”

강용이가 꾸벅 인사를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함이 흘렀다. 그때, 주방 쪽에서 어머니가 나왔다. 박지영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어머! 지영아!”

“작은엄마.”

박지영이 어렴풋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반가워했다. 어머니가 박지영에게 다가와 꼭 안아주었다.

“어쩜 이렇게 숙녀가 다 됐어. 잘 왔어.”

“네….”

박지영이 뭉클함을 느끼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가 박지영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박지영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어렸을 때 모습 많이 남아있네. 많이 보고 싶었어. 다들 잘 지내시지? 선영이도?”

“네, 저도 작은엄마 기억나요. 아빠도 강우가 와서 좋은 병실로 옮겨 줬고요. 엄마랑 언니도 잘 지내요. 그리고 우리 서울로 올 거예요.”

박지영의 말에 어머니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나은아, 강우랑 같이 다녀오느라 고생했어.”

“아니에요. 가서 재미있었어요.”

어머니가 이나은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늘 강우 옆을 차분히 지켜주는 이나은이 참 고마웠다.

“그래,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일단 안으로 들어와.”

“네.”

박지영이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넓고 깨끗한 집을 보고 작게 탄성을 뱉어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너무 늦게 찾아갔어….’

강우가 자책하며 미안함을 느꼈다. 어머니가 박지영을 거실로 데려갔다.

“일단 할아버지랑 작은아빠는 조금 있다가 오실 거야.”

“네.”

박지영이 조금은 어색한 듯 몸 둘 바를 몰랐다.

“소파에 앉아있어. 작은엄마가 먹을 것 좀 가져다줄게.”

“네.”

박지영이 소파에 앉았다. 이나은이 박지영 옆에 앉아주었다. 강용이는 아직 어색한지 소파가 아닌 바닥에 떨어져 앉았다.

“지영이 마실 거는 오렌지주스지?”

역시 어머니도 박지영이 좋아하는 것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박지영이 계속 집을 구경했다. 부러움이 가득한 박지영의 표정에 강우가 슬쩍 입을 열었다.

“넓지 크고?”

“으응….”

박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강우가 큰집을 위해 준비한 집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일까 싶었다.

“아 맞다. 잠깐만요.”

그때, 강용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간 강용이가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나왔다. 그리고는 박지영에게 무심한 듯 내밀었다.

“이거 누나 선물이에요. 내가 용돈 모은 거로 샀어요.”

“서…. 선물?”

박지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물까지 준비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강용이가 씩 웃었다.

“누나, 처음 만나는 기념이에요.”

“아…. 우리 처음은 아닌데.”

박지영이 싱긋 웃었다. 강용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웃음기를 띄며 말했다.

“그럼 우리 강용이 아주 아기였을 때 누나가 너 얼마나 이뻐했다고.”

“정말?”

강용이가 박지영을 바라보았다. 박지영이 싱긋 웃었다.

“그럼 강우랑 나랑 너 보겠다고 둘이서 기저귀 갈고 분유 타주고 그랬어. 물론, 서툴러서 네가 엄청나게 울기는 했지만.”

“나도 기억남.”

강우가 픽 웃었다. 그러자 강용이가 한결 편안해진 표정을 지으며 박지영 옆에 앉았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편하게 대한다.”

“어어?”

박지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미래 기억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강용이와 박지영은 나름 친하게 지냈었다. 사이가 멀어져 소원했던 틈에도 종종 만나 밥도 먹고 그랬었다. 그런 두 사람이 달라진 미래에서 얼마나 친해질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자~ 이거 먹으면서 본격적인 시간 여행을 가볼까?”

어머니가 쟁반 가득 먹을 것을 가지고 왔다. 거실 탁자에 먹을 것을 놓은 어머니가 텔레비전이 놓인 장식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어느 집이나 그랬듯 앨범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앨범 보면서 먹자.”

어머니가 꺼낸 앨범에는 지나온 강우 가족의 일상이 담겨있었다. 박지영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앨범에 집중했다.

“이건 강우 중학생 때고….”

어머니가 앨범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했다. 마치 지나간 세월을 이으려는 듯 열심이었다. 박지영도 잔뜩 집중해 앨범을 바라보았다. 강우 가족의 흘러온 세월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즐거워했다. 거실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정말이요?”

“그럼, 이때 강우가 나서서 작은아빠한테….”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강우가 변한 순간의 이야기부터였다. 어머니는 강우가 해낸 것들 하나하나를 설명했고, 박지영은 연신 탄성을 뱉어냈다. 이나은은 다시 들어도 대단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강용이는 강우를 향해 엄지를 척 들었다.

“전 그럼 조금 쉬고 올게요.”

결국, 민망함에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온 강우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후…….”

짧은 부산행이었지만, 심적으로 쏟아부은 에너지는 대단했다. 다행히도 큰집 식구들이 따듯하게 받아주어 일이 잘 풀렸다. 강우가 내심 걱정했던 자신을 나무랐다.

‘그래 가족에게는 먼저 다가가면 되는 거야.’

강우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형아!”

잠시 후, 강우 귓가에 강용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강우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강용이와 박지영이 강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친해진 만큼 두 사람의 장난스러운 표정도 닮아있었다.

“어…. 미안 깜빡 잠들었네.”

“할아버지랑 아빠랑 집 앞이시래.”

강우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강용이는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갔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집 현관문 담당이 강용이거든.”

“응, 아까 말해주더라.”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잠깐 눈을 붙인 사이 참 자세히도 설명했다 싶었다. 박지영이 강우를 보며 심호흡했다.

“할아버지랑 작은아빠 보는 거 진짜 긴장돼.”

“괜찮아. 두 분 다 엄청 이뻐해 주실 거야.”

강우와 박지영이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와 이나은은 주방에서 저녁 준비에 한창이었다. 강우가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아 참…. 재원이 형한테 가기로 했는데….’

다시 방으로 들어가 충전을 해 놓은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이재원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제법 쌓여있었다. 진동으로 해 놓았건만 못 알아차릴 만큼 잠들었나 보다. 강우가 이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회의라도 들어갔나 싶었다.

‘뭐…. 있다가 밤늦게 보든지 해야겠네.’

오늘은 집에 찾아온 박지영이랑 있어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강우가 다시 방을 나갔다. 박지영이 현관 쪽을 응시한 채 긴장하고 있었다.

딩동. 딩동.

벨이 울렸다. 현관에서 보초병처럼 대기하던 강용이가 후다닥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 아빠! 집에 지영이 누나가 왔어요!”

강용이가 시끌벅적 소리쳤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웃음을 터트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박지영이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저 지영이에요.”

박지영이 인사하자 할아버지가 제자리에 굳듯이 멈춰 섰다. 그리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박지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손녀가 아주 예쁘게 잘 자랐구나.”

“네….”

할아버지가 박지영을 살짝 안아주었다. 박지영의 오래된 기억 속에 남아있던 할아버지의 포근한 느낌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던 아버지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코끝을 찡그리고 있는 걸 보니 분명 벅찬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작은아빠….”

“지영이구나. 그래 잘 왔다.”

아버지도 박지영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가족들의 따듯한 환대에 박지영이 싱긋 웃었다. 주방에서 그 모습을 보던 어머니가 앞치마로 눈물을 훔쳤다. 이나은이 어머니를 살짝 안아주었다.

“그럼 이야기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빠르게 저녁을 준비했다. 이나은도 열심히 도왔다. 앉아있던 박지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작은엄마 나도 도울게요.”

“아니야. 넌 오늘 쉬고 있어.”

박지영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인데 제가 뭐라도 하고 싶어요.”

어머니가 박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싱긋 웃었다. 가족들에게 줄 저녁을 조금이라도 거들고 싶은 그 마음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럼 이것만 도와줘.”

“네.”

박지영이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미래 기억을 떠올렸다.

‘지영이가 손재주도 뛰어나고 음식 솜씨도 좋았었지.’

미래에 한참 유행하는 SNS에 올라오는 박지영의 음식들과 수공예품들은 강우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던 기억이 있었다.

“자~ 준비 끝.”

잠시 후. 저녁 식사가 모두 준비됐다. 모두의 관심이 박지영이 거든 요리에 집중됐다. 할아버지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 우리 손녀가 만든 찌개를 좀 먹어볼까?”

할아버지가 첫술을 뜨셨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두 번째로 찌개를 드셨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맛있구나.”

강우가 이상하다 싶은 표정을 지으며 찌개를 먹었다. 그리고 살짝 미간을 좁혔다. 가끔 정말 가끔 미래 기억이 틀리는 일도 있나 싶었다.

‘아니면 SNS로 보는 게 다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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