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2화 (242/402)

할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어 하세요.

부산대병원 원무과 안이 들썩이고 있었다. 그 한쪽에는 강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이윽고 원무과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전부 해결됐나요?”

“아…. 여기 있습니다.”

원무과장이 두꺼운 영수증을 내밀었다. 그동안 밀린 병원비를 수납한 영수증이었다. 심장병인 만큼 그동안 들어간 치료비가 만만치 않았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특실로 옮기는 건 언제쯤 가능할까요?”

“오늘 오후에 바로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무과장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일 처리가 끝나고 강우가 영수증을 챙겼다. 그리고 원무과를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저…. 박강우 부사장님.”

“네?”

원무과장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뒤로는 직원 한 명이 사진기를 들고 나타났다.

“죄송한데 기념사진 한 방만 찍을 수 있을까요?”

“아…. 네.”

강우가 원무과장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원무과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이나은 씨도 함께….”

“아…. 네.”

강우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 의자에 앉아있던 이나은을 손짓으로 불렀다. 이나은이 벌떡 일어나 강우에게 다가왔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사진 같이 찍자고 하셔서.”

사진을 찍어주고 강우와 이나은이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박지영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씩 웃어주었다.

“다 해결했어. 그리고 특실로 옮겨달라고도 했고.”

“특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박지영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지금 해드릴 수 있는 게 이거뿐이라서 그래. 부담 갖지 말고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

“으응….”

강우의 확고한 표정에 박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는 이번 일을 강하게 밀어붙이기로 했다. 가족인 만큼 더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었고, 강우는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사실 병원도 서울로 옮기고 싶어.”

“서울? 너무 멀지 않을까?”

박지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산에서 서울은 먼 거리였다.

“그렇긴 한데. 이왕이면 최고의 시설에서 수술을 받게 해드리고 싶은데….”

강우의 걱정은 아직 풀리지 않은 할아버지와의 관계였다. 서울에 가면 할아버지가 있으니 큰아버지가 가시려고 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이번 부산행에 작정하고 왔다. 그러니 그냥 올라갈 생각은 없었다.

“음…. 그럼 아빠랑 잘 이야기해봐.”

“알겠어. 일단 병실부터 옮기고 나서.”

강우와 이나은 그리고 박지영이 병실로 돌아갔다. 박지영에게 연락을 받았는지 큰어머니는 병실을 옮길 준비가 한창이었다. 박선영은 창가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빠! 강우가….”

박지영이 신이 나서 입을 열려는 순간.

“강우야, 나랑 이야기 좀.”

박선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담담한 표정에 박지영이 움찔하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드르륵.

박선영이 문을 열고 나갔다. 강우가 이나은에게 병실에 있으라고 말하고 뒤를 따라나섰다.

“일 층에 가면 매점 있어. 거기로 좀 가.”

“네, 누나.”

강우와 박선영이 일 층에 있는 매점에 도착했다. 박선영이 캔커피를 두 개 사더니 말없이 병원 밖으로 나갔다. 병원을 나서자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마 비가 오려는 모양이다.

“벤치로 좀 가.”

“네.”

강우와 박선영이 주변에 있던 벤치에 가서 앉았다. 어두컴컴한 주변을 가로등 몇 개가 비춰주고 있었다. 박선영이 강우에게 캔커피를 내밀었다.

“오렌지주스는 많이 마신 거 같아서. 커피 괜찮지?”

“네, 커피도 좋아해요.”

사실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사촌 누나의 성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딸칵.

강우와 박선영이 후루룩 커피를 마셨다.

“강우야.”

“네, 누나 말씀하세요.”

박선영이 긴 숨을 뱉어냈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나왔다. 박선영이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강우가 뉴스에 처음 얼굴을 비추는 순간 박선영은 대번에 강우를 알아보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는 했지만, 어렸을 적 얼굴이 남아있었다. 더군다나 그 옆에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먼저 고맙다고 말할게. 네가 와줘서 아버지가 많이 안심하시는 거 같아.”

“아니에요. 제가 그동안….”

“그런데 강우야.”

박선영이 결심을 한 듯 말을 이어갔다.

“사실 아빠가 작은아빠한테 연락했을 때 많이 놀랐어. 아빠는 그동안 작은아빠나 할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한 번도 하지 않았거든. 네가 뉴스에 처음 나오던 날 말 없이 소주를 드시며 웃으시는 건 본 적이 있지만 말이야. 그래서 네가 이렇게 와줘서 아빠가 마음을 열은 걸 수도 있어. 그런데 난 솔직히 겁이 나.”

“......”

강우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는 박선영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틀어진 가족간의 관계에 다시 불이 붙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관계라는 것이 그랬다. 친구라던지 다른 인간관계의 회복보다 틀어진 가족관의 관계는 더 회복하기 힘들다. 가족이 주는 상처가 더 크고 깊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네가 와서 하나하나 다 해결해주고 그러고 나면 힘들게 버티던 우리 가족의 삶이 한 번에 무너질 수도 있을 거 같아서 무서워. 이제는 더는 주저앉을 곳도 없거든….”

“누나….”

강우가 찌릿한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동안의 고생을 박선영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힘겹게 삶의 터전을 버텨 오던 큰집의 가족들은 다시 뒤로 돌아갈까 두려웠을 것이었다. 강우가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차분히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누나가 하는 걱정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요. 제가 이번에 부산에 온건 그냥 큰아버지 병원비 때문이 아니에요. 저는 할아버지랑 큰아버지도 화해시킬 거고요. 아버지랑 큰아버지도 다시 예전 관계로 돌릴 거에요. 그리고 누나랑 지영이도 그냥 이렇게 놔둘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지켜만 봐줘요.”

강우의 말에 박선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만난 강우는 그저 성인이 된 것뿐만이 아니었다.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잘 컸네…. 우리 강우.”

박선영이 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 느끼는 사촌 누나의 따듯한 손길에 강우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늘 장남으로 첫째로 남을, 동생을 쓰다듬어 준 자신이었다. 강우가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내가 얼마나 잘 컸는데.”

“어?”

박선영이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성격만큼이나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강우는 그 웃음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뭐야?! 둘이 한바탕하나 했더니. 나만 빼놓고 커피 데이트했어?”

멀리 어둑한 가로등 뒤편에서 박지영이 나타났다. 박선영이 박지영을 보며 픽 웃었다.

“너는 언니를 그렇게 몰라? 내가 강우를 왜 잡아?”

“언니 성격이 워낙….”

“야! 박지영! 어지간히 해라.”

박선영의 일침에 박지영이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그리고 강우와 박선영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박지영이 하늘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와~ 오늘 하늘 진짜 예쁘다 그치?”

“예쁘긴. 비가 오려는지 어두컴컴한데.”

툭. 툭.

그 말과 동시에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박선영이 벌떡 일어나더니 투덜거렸다.

“하여간, 우리 비를 몰고 다녀요. 비를.”

“미안.”

박지영이 병원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강우와 박선영이 뒤를 따라 달렸다.

쏴아아아-

이윽고 빗줄기는 거세지고 눈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세 사람이 병실에 도착했다.

“아유~ 안 도와줘도 되는데….”

“아니에요. 같이하면 편해요.”

짐을 싸는 큰어머니를 이나은이 돕고 있었다. 박선영과 박지영이 깜짝 놀라 이나은을 말렸다. 하지만 이나은은 끝까지 짐을 싸는 것을 도왔다. 이윽고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박정립 환자분 병실 옮기시겠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큰아버지 몸에 붙어있는 각종 장비를 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동식 장비로 다시 달아주었다. 큰아버지가 침대에 누워 강우를 불렀다.

“강우야.”

“네, 큰아버지.”

“이렇게까지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아니에요. 이제부터 제가 세상에서 제일 편하게 모실 거예요.”

큰아버지가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큰아버지는 병원 최상층에 있는 특실로 옮겨졌다.

“우와~ 병실 넓은 거 봐.”

박지영이 감탄성을 터트렸다. 큰어머니도 입을 살짝 벌리고 놀란 기색이었다.

“강우야, 이렇게 큰 병실을 쓰면 너무 비싸지 않니?”

“걱정하지 마세요.”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큰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박선영도 남몰래 웃으며 짐을 풀었다. 이나은도 도왔다. 의사와 간호사가 의료장비들을 다시 정리해주고는 병실 밖으로 나갔다. 강우가 의사를 따라 나갔다.

“저…. 선생님.”

“네?”

돌아가려던 의사가 걸음을 멈추고 강우를 바라보았다.

“저희 큰아버지 수술은 언제로 예정되어 있는 겁니까?”

“음…. 그게 가슴을 절제하고 심장을 잠시 멈추기까지 하는 대수술이라 환자분의 컨디션도 봐야 하고 여러 가지 절차가 있습니다.”

의사가 곤란한 듯한 표정을 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장비를 갈아주러 온 인턴일 것이었다.

“아. 그렇군요. 설명 감사합니다.”

“저…. 혹시 나중에 시간이 되면 이나은 님이랑 사진을…. 아 저만 찍겠다는 건 아닙니다. 의국 식구들이 전부 이나은 님 팬이라.”

의사의 말에 간호사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강우도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저희 큰아버지 잘 부탁드립니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수시로 확인하겠습니다.”

의사가 신이 나서 돌아갔다. 간호사가 왜인지 강우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갔다. 아마 의사의 주책이 미안하다는 뜻일 것이다.

드르륵.

강우가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넓어진 병실에 친척들이 모여있으니 강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강우가 큰아버지 옆에 앉았다.

“이제 수술을 해야 한대요.”

“그래….”

큰아버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큰 수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서울로 병원을 옮겨서 수술받으시는 게 어떠세요?”

“서울?”

큰아버지 얼굴이 어두워졌다.

“네, 아무래도 큰 수술이다 보니까요.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수술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부산대병원도 큰 병원이야.”

큰아버지 말에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지만 솔직히 서울에 있는 병원에 비교할 만큼은 아니었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이왕이면 제일 좋은 곳에서 수술받게 해드리고 싶어요.”

“음….”

큰아버지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렸다. 강우가 큰아버지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어 하세요. 그리고 아버지도요.”

“강우야….”

강우의 따듯한 손길에 큰아버지의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가족이라는 것은 이런 존재일 것이다. 따듯한 손길 한번 그리고 따듯한 말 한마디. 그것이면 서로 간의 상처와 앙금을 풀기에 충분했다.

“서울로 가요. 가서 수술받고 건강하게 퇴원하셔야죠. 그리고 강용이도 보시고요 할아버지랑 아버지도 만나서 술도 한잔하셔야죠.”

“......”

강우가 가족들을 언급하자 큰아버지가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긴 숨을 차례 뱉어냈다.

“그래, 가자.”

큰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큰집 식구들이 안도의 숨을 뱉어냈다. 강우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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