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1화 (241/402)
  • 이렇게 세월이 흘렀네.

    부산대병원에 강우와 이나은 그리고 박지영이 도착했다. 해는 저물어 어둑해져 있었고, 후덥지근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병원 주변으로는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떤 이는 밝은 표정을 또 어떤 이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여기에 입원해 계시는구나.”

    “응.”

    병원에 도착하자 박지영은 크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박지영이 긴 숨을 뱉어냈다. 이나은이 박지영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녁까지 같이 있으며 제법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강우가 박지영을 돌아보았다. 얼굴에 떠올라 있는 그 긴장감을 강우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아버지와의 관계에 애먹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강우가 이나은과 박지영을 향해 말했다.

    “들어가자.”

    이나은과 박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곧장 큰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들어섰다. 북적이는 병원에 들어서자 특유의 약 냄새가 풍겨왔다. 강용이 때문에 병원을 자주 다녔던 강우의 코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어디로 가야 해?”

    “나 따라와.”

    박지영이 앞장을 섰다. 강우와 이나은이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상하게도 병원에 있는 엘리베이터는 유독 정적이 흘렀다.

    “......”

    “......”

    띵.

    문이 열리고 박지영이 먼저 내렸다. 강우와 이나은이 뒤를 따라 나왔다. 복도의 중앙에는 간호사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었다. 그 양쪽 복도로는 병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이쪽이야.”

    박지영이 왼쪽으로 꺾어 병실로 향했다. 간호사들이 강우와 이나은을 보더니 움찔했다. 하지만 더는 내색하지 않고 두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521호-

    큰아버지가 머무는 병실이었다. 슬쩍 문 옆을 확인하니 큰아버지 이름이 적혀있었다.

    -박정립-

    그 옆과 아래쪽으로도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드르륵.

    박지영이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었다. 병실 안쪽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대번에 입구로 향했다. 박지영이 뒤를 슬쩍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했다. 강우가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번에 한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병상의 옆쪽으로 익숙한 얼굴이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큰엄마.”

    “그래, 강우 왔구나. 훌쩍 컸네.”

    큰어머니의 얼굴에는 긴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주름진 얼굴에서 그동안의 고생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옆에는 사촌 누나인 박선영도 있었다. 박지영만큼 큰 키에 체격은 조금 더 컸다. 짧게 자른 단발머리에 간편한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영 누나.”

    “어. 안녕.”

    박선영이 짧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얼핏 보기에는 쌀쌀맞은 듯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강우는 알고 있었다. 미래 기억 속에서도 박선영은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남자로 태어났어야 딱 맞는다는 말도 듣고는 했다.

    “안녕하세요. 이나은이에요.”

    이나은이 큰어머니와 박선영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큰어머니가 이나은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요. 반가워요. 강우 큰엄마예요.”

    무뚝뚝한 박선영도 이나은에게는 관심을 드러냈다. 유명 연예인을 직접 보니 그럴 만도 했다. 박선영도 이제 이십 대 중반의 어린 나이였다.

    “안녕하세요. 박선영이에요.”

    인사가 끝나고 강우가 슬쩍 병상을 바라보았다. 큰아버지는 두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여보, 강우가 왔어요.”

    큰어머니가 큰아버지를 깨웠다. 잠에 빠져있던 큰아버지가 눈을 스르륵 떴다. 그리고 강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강우와 큰아버지의 시선이 맞닿았다.

    “큰아버지, 접니다. 강우.”

    “그래, 몰라볼 정도로 컸구나.”

    큰아버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큰아버지가 손짓으로 강우를 불렀다. 강우가 병상 옆에 앉았다.

    “어디 보자. 녀석…. 할아버지를 똑 닮았구나.”

    “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큰아버지가 손을 들어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 순간, 강우의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역시 미래 기억과 마찬가지로 큰아버지는 강우를 참 좋아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렇게 누워있는 모습만 보여줘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제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어요. 죄송해요.”

    강우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박지영이 이나은과 손을 맞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세월이 한참 지나 만났지만, 가족은 가족이었고, 핏줄은 핏줄이었나 싶었다.

    “그래, 뉴스에서 항상 소식은 접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일들을 해냈더구나. 큰아빠는 정말 네가 자랑스럽다.”

    “이게 다 할아버지 덕분이에요.”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큰아버지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리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참 대단하신 분이지.”

    “......”

    강우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큰어머니가 나섰다.

    “그래, 강우야. 할아버지 건강은 괜찮으셔?”

    “네, 예전에 종양이 있어서 수술을 받으셨는데 그 이후로는 괜찮으세요.”

    큰아버지가 움찔하며 강우의 말에 집중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그 뒤로는 꾸준히 병원도 다니시고요. 운동도 하고 그러세요.”

    “다리는? 항상 다리를 불편해하셨는데….”

    큰어머니가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큰어머니는 참 좋은 며느리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최선을 다했었다. 다만 큰아버지가 부산에 내려오고 할아버지를 만나지 않겠다고 하니 방법이 없었을 뿐이었다. 박씨 가문의 남자들은 전부 한 고집을 했기 때문이다.

    “다리도 계속 물리치료 받고 계세요.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랬구나…. 인사를 드리러 가야 했었는데….”

    큰어머니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동서는? 동서는 잘 지내?”

    “네, 엄마 잘 지내세요.”

    큰어머니와 어머니의 사이도 좋았다. 다만 못 본 세월이 너무 길었을 뿐이었다. 큰어머니가 또 생각난 듯 물었다.

    “강용이는? 정말 많이 컸겠다.”

    “네, 엄청 컸어요. 이제는 중학생이니까요.”

    큰집 사람들은 강용이를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강용이는 큰집 사람들을 기억 못 할 것이었다. 강용이가 태어나고 일 년 후 큰집과의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랬구나…. 미안해 강우야, 크는 모습도 하나도 못 보고. 이렇게 세월이 흘렀네.”

    큰어머니가 강우의 손을 잡아주었다. 강우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큰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몸은 많이 안 좋으세요?”

    “......”

    큰아버지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강우에게 병에 대해 이야기부터 하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자신은 가장이었고, 여기서 쓰러진다면 가족의 앞날을 책임질 수 없었다.

    “대동맥협착증이라고 하더구나….”

    “대동맥협착증이요?”

    강우가 잘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큰아버지가 설명을 이어갔다.

    “심장에 대동맥 판막이 좁아져서 몸에 무리가 가고 있는 상태야.”

    “수술이 필요한 거죠?”

    큰아버지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슴을 절개해서 심장을 일시 멈추고 판막을 교체하는 대수술이라고 하더구나.”

    “아….”

    강우가 탄식을 뱉어냈다. 위험하다는 말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큰어머니가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대. 그런데 우리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이렇게 연락을 하게 됐어. 사실 큰아빠는 절대 연락은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그럴 거면 다 같이 죽자고 했어.”

    “큰엄마….”

    강우가 화들짝 놀라 큰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여보…….”

    큰아버지가 큰어머니를 나지막이 불렀다.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강우가 큰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잘하셨어요. 우리 박 씨 남자들이 쓸데없는 고집이 세서 그래요.”

    “강우야….”

    강우의 말에 큰아버지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은 사실이라 부정할 수도 없었다. 강우의 농담 섞인 말에 큰어머니가 희미하게 웃었다.

    “수술은 최대한 빨리 날 잡아서 하시는 거로 해요.”

    “돈이 많이 들어간다더구나.”

    큰아버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았지만, 힘들게 살아온 세월이 반사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 부담할 거예요.”

    “.....미안하다. 거절하지 않으마.”

    큰아버지도 거절하지는 못했다. 목숨이 달렸기 때문이었다. 큰아버지가 알겠다고 하자 큰어머니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박지영은 환하게 웃었다. 다만 박선영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가족이잖아요.”

    “그래……. 가족이지….”

    큰아버지가 회한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가족이라는 두 글자가 오늘은 유독 크게 와닿았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만났어도 어색하지 않은 강우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강우가 병실을 쓱 둘러보았다. 다인실인 만큼 주변의 시선이 모두 이곳에 쏠려있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모두 강우와 이나은을 알아봤다.

    “텔레비전에서 본 것보다 훨씬 훤칠하네요.”

    “어머~ 어쩜 저리 이쁠까?”

    강우와 이나은이 주변을 향해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병실 안이 잠깐 소란스러워졌다.

    “아니 우리 박 선생님께 이렇게 유명한 조카가 있었어요?”

    “진작에 말 좀 해주지 그랬어요. 우리 아들이 얼마나 팬인데.”

    병실이 소란스러워지자 강우가 민망한 표정이 되었다. 이나은은 싱긋 웃으며 연신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박지영이 흐뭇하게 강우와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오던 박지영에게 강우와 이나은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병실 안의 사람들이 다시 조용히 있어 주었다. 강우가 큰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일단 쉬고 계세요.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요.”

    “저녁은 먹었어?”

    큰아버지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병상 위쪽에 있는 보관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빵이 잔뜩 들어있었다. 생각해보니 큰아버지는 빵을 참 좋아하셨었다.

    “아직요. 조금 있다가 먹으려고요.”

    “배고프겠네. 일단 이거라도 먹어.”

    큰아버지가 단팥빵 두 개를 쥐여주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빵을 받았다.

    “잘 먹겠습니다.”

    강우가 빵을 챙겨서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이나은과 박지영이 그 뒤를 따라 나왔다. 마지막으로 박선영이 병실에서 나왔다. 손에는 오렌지주스가 들려있었다.

    “이거랑 같이 마셔.”

    “네, 누나.”

    강우가 오렌지주스를 받아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렌지주스네요….”

    “너 그거 좋아하잖아.”

    강우가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강우가 오렌지주스까지 품에 챙겼다. 박선영이 입을 열었다.

    “와줘서 고마워.”

    그 말을 끝으로 박선영이 병실로 들어갔다. 박지영이 강우에게 다가오더니 싱긋 웃었다.

    “언니가 너 온다고 사실 엄청 기다렸어. 오랜만에 본다고. 그런데 언니 성격이 원래 좀 무뚝뚝한 거 알지?”

    “음…. 기억나.”

    강우가 고개를 끄덕했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나은과 박지영이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강우야, 어디가?”

    “원무팀에.”

    이나은이 고개를 끄덕했다. 박지영이 빠르게 걸어 강우 옆에 섰다.

    “강우야, 병원비가 많이 나왔을 텐데…. 미안해.”

    강우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박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할 거 없어. 그리고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미안해하지도 거절하지도 마.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다 따라오면 돼.”

    강우의 말에 박지영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세월이 흘러 나타난 친척은 세상 그 누구보다 든든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