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0화 (240/402)
  • 다들 사는 게 힘들었어.

    오랜만에 만나는 사촌이었지만,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미래의 기억이 떠오르며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미래에 박지영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강우 사촌인 박지영도 평범한 삶을 살아갔다. 평범하게 학교를 나와 보훈처의 취업 지원 시스템으로 대기업에 취직했었다.

    ‘하지만 텃세 때문에 금세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

    대기업을 그만두고 박지영은 중소기업을 다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한 아이를 낳고 맞벌이를 하며 힘들게 살았다. IMF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대한민국은 중산층이 완전히 사라진 시대가 되고 만다. 사람들은 타고난 수저를 논하고 일확천금이 아니면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친척들 모두 삶에 치여 어렵게 살았지.’

    강우가 박지영을 힐끗 바라보았다. 눈앞에 싱긋 웃고 있는 사촌에게도 독립투사의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지영아.”

    “와….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사촌이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니까 정말 신기하다.”

    박지영이 강우를 이리저리 살폈다. 강우가 어색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강우를 모두 살핀 박지영이 이나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입을 살짝 벌렸다.

    “대박. 진짜 예쁘다.”

    “안녕하세요.”

    이나은이 살짝 당황하며 인사를 했다. 박지영도 인사를 했다.

    “아…. 네, 안녕하…. 그런데 강우랑 동갑이면 나랑도 동갑인데. 우리 친구 해요.”

    “그래.”

    화끈한 박지영의 성격에 이나은이 조금은 당황한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미래 기억에도 잘 모르던 사촌은 화끈한 성격을 가진 듯했다.

    “밥 먹었어?”

    “밥? 아직??”

    “그럼 일단 타. 우리 밥 먹으러 가자.”

    “만나자마자 밥. 좋지.”

    박지영이 거침없이 뒷좌석에 탔다. 강우가 차를 출발시켰다.

    “뭐 먹으려고?”

    박지영이 앞쪽으로 몸을 쭉 빼며 물었다.

    “돼지국밥?”

    “타지 사람들은 부산만 오면 꼭 그것부터 먹더라. 오케이. 내가 맛집으로 안내할게.”

    박지영이 호기롭게 외쳤다. 이나은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박지영의 말투가 강우와 닮아있음을 느꼈다. 강우도 픽하고 웃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사실인가 보다. 이윽고 세 사람이 국밥집에 도착했다.

    “어? 여기 예전에 나도 왔던 곳인데.”

    “정말? 너 부산 왔었어?”

    박지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우가 움찔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 몇 년 전에 친구들이랑.”

    “아…. 그랬구나. 연락하지 내가 가이드 해줬을 텐데.”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그 당시도 연락해볼까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연락하지 않고 지낸 세월이 참 길었다.

    “친구들이랑 단체로 오기도 해서 그랬지.”

    “그래….”

    박지영도 비슷한 마음이었나 보다. 더는 묻지 않았다. 박지영이 앞장서서 가게로 들어갔다.

    “이모! 나 왔어요.”

    “어머? 이게 누구야? 지영이 오랜만에 왔네.”

    국밥집 주인아주머니가 박지영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이나은이 강우에게 슬쩍 물었다.

    “지방은 원래 다들 친하게 지내나?”

    “설마…. 부산이 얼마나 큰 도시인데.”

    박지영이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이리에 와서 앉아.”

    강우와 이나은이 자리에 앉았다.

    “이모, 국밥 세 그릇이요! 고기 듬뿍!”

    “알았어!”

    주문이 끝나고 박지영이 수저통에서 식기를 꺼내 놓아 주었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흐르자 강우가 입을 열었다.

    “여기 단골이야?”

    “여기? 아…. 넌 모르겠다. 여기 우리 엄마가 예전에 일했던 곳이야. 나도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했었고.”

    “그래? 사실 예전에 부산 왔을 때도 친구들이랑 여기서 밥 먹었었어.”

    “진짜? 하긴 여기가 제일 맛있긴 하지.”

    이윽고 국밥이 나오고 식사가 시작됐다. 이나은은 배가 고팠는지 정말 열심히 비웠다. 박지영도 질세라 국밥을 후루룩 먹었다. 역시 대식가 박씨가문다운 모습이었다.

    “이모, 잘 먹었어요. 오늘은 사촌이 놀러 와서 일찍 가요.”

    “그래?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지.”

    “다음에요.”

    국밥집 주인아주머니가 강우와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특히 강우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지영이 사촌 박강우라고 합니다. 몇 년 전에 여기 먹으러 왔었어요.”

    “몇 년 전을 내가 어찌 기억하나? 어디 보자. 여기는 나쁜 놈들 때려잡는 박강우고 여기 이쁜 아가씨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 맞지?”

    강우와 이나은이 동시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주인아주머니가 박지영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지영이한테 친척이 있었나?”

    “네, 있어요. 저도 친척.”

    박지영이 싱긋 웃었다. 강우가 계산하고 세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이제 밥도 먹었으니까 우리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할까?”

    “그래.”

    이나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나는 잠깐 시장 구경 좀 하고 있을게.”

    “아니야. 같이 가. 너 혼자 다니면 시장 난리나. 같이 가.”

    “응.”

    이나은이 알겠다고 했다. 이나은도 함께 간다고 하니 강우도 조금은 안심이 됐다. 세 사람은 근처의 카페로 갔다.

    “뭐 마실래?”

    강우의 질문에 박지영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난 오렌지 주스.”

    “어?”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나은은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박지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오렌지 주스 마시면 안 돼?”

    “아니. 강우도 오렌지 주스 좋아하거든.”

    박지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엄마한테 들었어. 강우하고 나하고 어렸을 때 오렌지 주스 서로 마신다고 싸웠다더라고.”

    “강우가 그때부터 오렌지 주스를 좋아했구나.”

    이나은이 눈을 빛냈다. 아주 짧은 기억의 단편이었지만, 강우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듣는 건 흥미로웠다. 그전에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주문하고 올게.”

    이나은이 벌떡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강우와 박지영 단둘이 남았다.

    “잘 컸네.”

    “어?”

    “너 잘 컸다고. 늠름하네. 장가가도 되겠어.”

    “하하….”

    박지영의 말에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박지영이 킥하고 웃었다.

    “우리 어렸을 때 기억나? 너랑 나랑 손잡고 다니면.”

    “사람들이 쌍둥이냐고 했었지.”

    아주 오래전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며 두 사람이 픽하고 웃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윽고 이나은이 음료를 들고 돌아왔다.

    “그런데 나은아, 강우랑 나랑 닮았어?”

    박지영이 오렌지 주스를 쭉 마시고는 물었다.

    “음….”

    이나은이 강우와 박지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미소 지었다.

    “응, 많이 닮았어. 아까도 한 번에 알아봤거든.”

    “내가 손해 보는 느낌인데….”

    박지영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거든?”

    “그러셔?”

    강우와 박지영이 금세 티격태격했다.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오른 것일까. 두 사람이 금세 픽 웃었다. 강우가 박지영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그동안 연락 못 해서.”

    “뭐….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미래의 기억 속 세상과는 달리 두 사람이 떨어져 지낸 80~90년대는 연락이 끊기면 찾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강우와 박지영이 서로를 힐끗 살폈다.

    “너야 뭐 하고 지냈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고. 나는 부산 외대 다니고 있어. 영문학과.”

    “그랬구나. 아 참 선영이 누나는?”

    강우가 박지영의 친언니이자 자신의 사촌 누나인 박선영에 관해 물었다.

    “언니는 학교 졸업하고 회사에 다녀.”

    “아…. 그렇구나.”

    박선영은 강우보다 네 살이 많았다. 강우 기억에도 박선영에 대한 것은 상당 부분 남아있었다.

    “언니도 너 온 거 알고 있어. 있다가 저녁에 퇴근하고 곧장 집으로 오기로 했어.”

    “큰아버지는?”

    “병원에 계셔….”

    박지영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큰아버지의 건강이 점점 악화하고 있었다. 심장에 문제가 생겨 큰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심장 수술에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고, 큰아버지 사정은 좋지 못했다. 강우는 그 소식을 듣고 미안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바로 인사드리러 갈까?”

    “아니야. 있다가 저녁에 엄마도 오고 언니도 오면 그때 가자.”

    박지영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강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큰아버지 혼자 계셔도 되는 건가?”

    “병원에 계시니까 괜찮아.”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심이 가득한 강우 표정을 본 이나은이 조용히 손을 잡아주었다. 박지영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사실 오늘 내가 먼저 보자고 한 건 이유가 있어.”

    강우가 마시던 오렌지 주스를 내려놓았다. 이나은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박지영에게서 어떤 말이 흘러나올까 싶었다.

    “사실 어렸을 적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았어. 명절 때마다 외가 사람들이랑 만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고, 어렸을 적 기억 속에는 분명히 작은아빠도 작은엄마도 그리고 너도 있는데 만나지 않는 게 이상하지도 않았어.”

    박지영이 숨을 골랐다. 부산은 외가 친척이 사는 곳이었다. 큰아버지는 부산에 내려와 터를 잡고 살았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지는 않았다. 외가 쪽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외가 쪽에 도움을 받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큰아버지는 힘겹게 사셨다.’

    강우가 떠오르는 미래 기억을 떨쳐냈다. 이제는 다시 그런 삶을 살게 할 수 없다고 다짐했다. 강우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있었다.

    “다들 사는 게 힘들었어. 우리도 큰아버지도.”

    “맞아. 그래서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아. 나에게는 자랑스러운 할아버지니까. 작은 아빠도 마찬가지야. 일이 잘되시고 나서부터는 아빠한테 연락해서 매번 도와주려고 했던 거 나도 알아. 다만 우리 아빠가 너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박지영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박지영은 행여 자존심 강한 큰아버지가 강우 도움을 거절할까 걱정한 것이었다. 물론, 먼저 연락을 했으니 그럴 확률은 낮았지만, 자식으로서는 걱정이 앞섰다.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내가 찾아온 거야. 큰아버지가 나 제법 예뻐하셨잖아?”

    “맞아. 그랬지. 아빠가 너랑 나랑 바꾸자고 한 거 알지? 내가 지금도 그거 가지고 아빠한테 뭐라고 한다니까?”

    박지영이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자 큰아버지는 강우와 박지영을 바꾸자고도 했었다. 큰아버지는 딸이 둘이고 아버지는 이제 막 첫째 아들을 보았으니 말이다. 물론, 아버지가 펄펄 뛰며 거절했었다고 했다.

    “나도 들었어.”

    강우도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사실 오랜만에 만나기 전에 조금 걱정했거든. 네가 뉴스나 신문에서 봤을 때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는데. 혹시 모르니까.”

    “그랬구나.”

    “그런데 직접 보니까 알겠네. 이제 안심이야.”

    강우가 씩 웃었다.

    “그래,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 내가 나서서 다 해결하고 올라갈 거니까.”

    박지영이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절박한 상황에서 나타난 강우라는 존재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긴 세월을 떨어져 지냈지만, 가족이라는 존재는 이렇게 좋은 거구나 싶었다.

    “고마워.”

    박지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나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지영 옆에 앉았다. 그리고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미안함을 느꼈다.

    ‘너무 늦게 온 건 아닌지….’

    늦었을지는 몰랐다. 하지만 강우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멀어진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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