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9화 (239/402)

어? 저 사람 아니야?

치이이익.

기차가 부산역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강우가 먼저 내렸다. 강우가 손을 기차 쪽으로 뻗었다. 이나은이 강우 손을 잡고는 플랫폼에 내려섰다.

“고마워.”

“푹 잤어?”

이나은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부산까지 오는 내내 강우에게 기대어 잠들었었다. 그 어떤 좋은 곳보다 강우 어깨에 기댄 순간이 가장 편했다.

“어깨 괜찮아?”

“그럼, 우리 나은이가 새털같이 가벼워서 멀쩡하다고.”

강우가 이나은이 기댄 쪽 팔을 붕붕 휘둘렀다. 과장된 강우의 표정과 행동에 이나은이 킥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플랫폼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박강우다. 이나은도 있어.”

“뭐야? 둘이 여행 왔나 봐.”

역시나 사람들이 강우와 이나은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강우가 이나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나가자.”

“으응.”

이나은도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는 강우를 따랐다. 하지만 이나은만 가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강우도 너무 잘 알아보았다. 특히 뉴스에서 온통 강우에 대해 나오니 더 잘 알아보았다. 이윽고 강우와 이나은이 부산역을 벗어났다.

“으아…. 역 나오는 게 이렇게 힘드냐.”

“그래도 나왔으니까 됐지.”

역 안에서 몇 번이나 사람들에게 붙잡힌 두 사람이었다.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찍어주고는 했다. 이나은이 양팔을 벌리더니 크게 숨을 들이셨다.

“아~ 좋다. 부산 냄새.”

“부산 냄새가 무슨 냄새야?”

강우가 코를 킁킁거리며 물었다. 이나은이 살짝 눈을 흘겼다.

“있어 그런 게.”

강우가 씩 웃고는 앞장섰다. 두 사람은 근처의 렌터카 회사로 향했다. 부산에서 일정이 바쁜 강우는 차를 빌린 상태였다. 강우와 이나은이 렌터카 회사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 맙소사!”

더운 여름 축 늘어져 있던 렌터카 회사 직원이 화들짝 놀랐다. 사실 박강우라는 이름으로 대여 예약이 왔을 때 슬쩍 생각했었다. 강우와 이나은이 오는 거 아니냐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박강우 이름으로 렌트 예약했습니다.”

“자…. 잠시만요.”

직원이 허둥댔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계약서들이 우당탕 떨어질 정도였다. 강우와 이나은이 떨어진 서류철들을 주워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이나은이 내미는 서류철을 직원이 손을 덜덜 떨며 받았다. 작은 소란이 생기자 사무실 안쪽에서 지점장이 나왔다.

“무슨 일이고?”

나른한 표정의 지점장이 강우와 이나은을 발견했다. 지점장이 눈을 비비더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화들짝 놀랐다.

“이…. 이게 무슨 일이고!! 아이고!”

지점장이 강우에게 달려왔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는 순간.

“탤런트 이나은 씨 아닙니까?”

강우를 스쳐 지나가 이나은에게 다가갔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지점장이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종이랑 펜 갖고 와. 빨리!”

직원들이 커다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나은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가린다고 가렸는데…. 한 번에 알아보시네요.”

“아닙니다. 위장은 완벽했습니다. 저기 박강우 씨 보고 정신 차린 겁니다.”

강우가 또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렌터카 부산역 지점이 발칵 뒤집혔다. 강우와 이나은은 한참이나 직원들의 환대를 받았다.

“저희 렌터카를 이용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조금 전에 찍은 사진을 지점에 걸어놓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렌트가 지점장이 멋쩍어하며 물었다.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렌터카 반납하면서 사진에 사인도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계약을 끝내고 강우와 이나은이 밖으로 나왔다. 강우가 빌린 차량으로 다가가 운전석에 타려 했다. 그러자 이나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우야, 내가 운전하면 안 돼?”

“나은이가?”

강우가 잠시 망설였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면허를 딴 이나은이었다. 다만 운전을 자주 한 적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생글생글 웃는 이나은에게 강우가 본능적으로 키를 내밀었다. 도저히 안 된다고 할 수 없는 미소였다.

“그래, 좋아.”

그리고 잠시 후, 강우는 그 한마디가 가져온 후폭풍을 몸소 체험 중이었다.

부아아아앙!

“나…. 나은아! 너무 빠…. 빨…. 으악.”

과속 단속이 걸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나은은 터프한 운전 실력을 자랑했다. 강우가 화들짝 놀라 잡은 손잡이에 땀이 흥건할 정도였다.

“강우야! 나 운전 잘하지?”

“어? 어어…. 앞을 봐! 앞에!”

운전이 난폭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던 부산이었다. 그런 곳에서 이나은은 운전 실력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강우도 점점 이나은을 신뢰하고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강우가 잔뜩 신난 이나은의 옆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최소한 운전 가르쳐주다가 싸울 일은 없겠네.’

이나은은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차를 몰았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숙소로 예약한 호텔이었다. 호텔 주차장에 들어선 이나은이 적당한 곳에서 차를 세웠다.

“자! 나는 여기까지.”

“어?”

이나은이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싱긋 웃었다.

“나 주차는 못 해.”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이나은이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다시 이나은을 운전석에 타라고 했다.

“내가 주차하는 거 알려줄게.”

“정말?”

이나은이 환하게 웃으며 운전석에 탔다. 그렇게 한참을 강우는 주차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최대한 친절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와~ 나도 이제 주차할 수 있겠다.”

“그래, 잘했어.”

강우가 이나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나은이 혀를 삐죽 내밀며 좋아했다. 차에서 내린 이나은이 강우 팔짱을 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강우가 호텔 입구를 바라보며 물었다. 물론 강우와 이나은이 연인 사이인 것은 세상 모두가 알았다. 그래도 호텔을 함께 들어가는 것은 구설수가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나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 어때. 우리가 죄지으러 가? 잠자러 가지.”

“아…. 그런가.”

강우가 얼굴을 붉혔다. 이나은이 그런 강우를 보며 킥하고 웃었다. 강우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드문 것이었다. 두 사람이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

“예약했습니다. 박강우 이름으로 하나 이나은 이름으로 하나입니다.”

로비에 있던 직원이 예약 명부를 확인하더니 키를 두 개 내주었다. 그리고 강우와 이나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가자 짐부터 풀고 밥 먹으러 가게.”

“응.”

강우와 이나은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숙소로 올라갔다. 강우와 이나은의 숙소는 바로 한 칸 떨어져 붙어있었다.

“조금 이따가 봐.”

“어.”

강우가 숙소로 들어갔다. 이번 여행을 위해 특별히 예약한 방은 크고 훌륭했다. 강우가 짐을 풀고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자칫 분위기가 축 처질 수 있는 이번 부산행이었다. 이나은이 함께 여행을 와주어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강우의 기분도 좋았다.

‘고맙네. 참….’

이나은은 이번 부산행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강우가 걱정돼 따라왔고, 지금껏 계속 밝게 행동하고 강우를 웃게 해준 것이었다. 참 배려심 있고 사려가 깊은 이나은이었다. 강우가 한참을 침대에 누워 생각을 정리했다. 친일 명부를 터트렸을 때보다 더 긴장감이 들었다.

‘일단 오늘 저녁에 찾아뵙자.’

큰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미리 연락해놓았기에 큰아버지는 강우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똑똑.

잠시 후. 강우가 이나은 방문을 두들겼다.

“누구세요?”

“나야, 강우.”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바다와 같은 코발트블루 원피스를 입은 이나은이 싱긋 웃고 있었다.

“마침 준비 끝.”

“어어…. 옷 진짜 예쁘다….”

“옷만?”

강우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이나은은 참 예뻤다.

“아…. 아니! 나은이가 더 예쁘지.”

“그렇지?”

이나은이 강우 팔짱을 끼며 환하게 웃었다. 강우와 이나은이 주차장을 향해 차에 탔다.

“일단 밥부터 먹자.”

“좋아! 나 돼지국밥 먹고 싶어.”

“오케이.”

강우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출발하려는 순간이었다.

뚜르르. 뚜르르.

핸드폰 소리가 울렸다. 강우와 이나은이 동시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가 온 것은 강우였다. 강우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그거 박강우 핸드폰 맞나요?-

젊은 여성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익숙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낯설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야! 나다. 지영이.-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화를 건 사람은 강우의 사촌인 박지영이었다. 큰아버지의 둘째 딸이었고, 강우와는 같은 해에 태어난 사촌이었다.

“지영이라고? 반갑다.”

-오늘 부산 온다며? 지금 부산이야?-

사투리가 살짝 섞인 말투였다.

“어…. 지금 부산.”

-잘됐네. 너, 나 좀 보자.-

“그래? 잠깐만….”

강우가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이나은이 궁금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사촌이야. 지금 잠깐 보자고 하는데….”

“정말? 그럼 빨리 만나러 가자.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라며.”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어렸을 때는 둘이 자주 붙어 다녔다고 했다. 같은 나이에 생긴 것도 비슷해서 둘이 세워놓으면 쌍둥이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고 했었다. 하지만 벌써 못 본 지 십여 년이 훌쩍 넘어간 세월이 있었다.

“알겠어. 어디로 가면 돼?”

-부산 외대 앞에 와서 전화해. 내가 연락처 남겨 놓을게.-

“알겠어. 지금 갈게.”

통화가 끝났다. 강우가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차를 몰아 부산외대로 향했다.

“얼마 만에 만나는 거야?”

이나은이 물었다. 강우가 잠시 셈을 하더니 답했다.

“한 십삼 년 만에?”

“진짜? 와…. 완전 오랜만이네….”

이나은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도 사촌들이 있었다. 그리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명절 때 정도는 꼬박 만나고는 했다. 더 어렸을 때는 자주 만나 놀러 다니기도 했었다. 물론 강우의 사촌이 여자라 서로 접점이 더 없었겠지만, 십삼 년은 정말 긴 세월이었다.

“뭐…. 큰아버지가 부산으로 내려가신 이후로는 아예 연락도 끊겼었으니까.”

“그렇구나. 둘이 사이는 좋았어?”

“사이 좋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어렸을 때는 같이 놀기는 했는데 크고 나서는 만난 적도 없으니까.”

“긴장되겠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나은 말처럼 이상하게도 긴장이 됐다. 미래 기억 속에서도 왕래가 거의 없던 사촌이었다. 남보다 못할 정도로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게 살았었다.

‘살기 바빴고, 관심도 없었고.’

하지만 강우는 이제 그 관계에 작은 변화를 일으켜 보려 했다. 무심히 지난 세월만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강우가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차를 몰았다. 이나은은 그런 강우를 바라보며 조용히 있어 주었다. 강우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부우웅.

잠시 후, 강우와 이나은이 탄 차가 부산외대 앞에 도착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 사촌에게 전화를 걸려던 강우가 돌연 픽하고 웃었다. 멀리, 한 여학생이 서 있었다.

“어? 저 사람 아니야?”

이나은도 대번에 알아볼 만큼 강우와 닮은 여학생이었다. 170이 넘는 훤칠한 키에 긴 생머리를 가진 여학생이었다.

“맞는 거 같네.”

강우가 짧게 심호흡을 하고 여학생 앞으로 차를 몰아갔다. 여학생 앞에 도착한 강우가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창문을 내리고 여학생을 향해 물었다.

“박지영?”

여학생이 강우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역시 대번에 강우를 알아봤나 보다.

“안녕? 오랜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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