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8화 (238/402)
  • 늦지 않았어.

    덜컹. 덜컹.

    정적이 흐르는 기차 안에 강우가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눌러쓴 이나은도 있었다. 강우 앞에는 신문이 잔뜩 쌓여있었다.

    사라락.

    강우가 신문을 하나씩 살폈다. 세상은 온통 재단에서 발표한 친일 명단으로 시끄러웠다.

    -사학 법인 기우 이사장 나창식. 과거 친일 행적 밝혀져. 현재 광복회 이사인 나창식 이사는….-

    -사학 재단 기우에 속해있는 학교들의 평소 교육 내용이 문제가 되어….-

    -광복회 나창식 이사를 제명하기로 하고….-

    공개된 친일 명단에 대한 비판 기사가 쏟아졌다. 평소라면 돈을 쏟아부어서라도 기사를 막았을 저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세간의 이목이 너무 집중된 상태였다. 특히 국민의 반응이 너무 뜨거웠다. 잘못된 기사를 내보내는 신문사나 언론에 전화 항의가 폭주했고, 일부 시민들은 시위하기도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쉽게 가겠어.’

    강우가 씩 웃으며 신문을 내려놓았다. 옆에 있는 이나은도 신문을 보며 잔뜩 집중한 모습이었다. 기사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했다.

    “안 피곤해? 그만 보고 좀 쉬어.”

    이나은이 신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강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하나도 안 피곤해. 오랜만에 둘이 놀러 가서 진짜 좋아.”

    “다행이다. 우리 가서 맛있는 거도 먹고 오자.”

    강우가 이나은의 손을 잡았다. 이나은이 강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는 곧 잠이 들었다. 강우가 슬쩍 어깨를 움직여 이나은이 편한 자세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연인을 바라보았다.

    ‘말로는 같이 놀러 가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 강우의 큰아버지에게 인사도 드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중재하려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강우가 배려심 넘치는 여자친구를 보며 흐뭇해했다. 사실 이나은도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강우와 연인관계인 것이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이나은은 가는 곳마다 이번 일에 관한 생각이 어떤지 질문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이나은은 현명하게 대처했다.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나선 내가 자랑스럽다고. 잘못된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했다지.’

    딱히 누구를 비난하지도 않고 현명한 답이었다. 그렇게 질문이 이어지자 대진 엔터는 이나은의 활동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이참에 그동안 고생한 이나은에게 휴가를 준 것이었다. 이나은은 휴가가 주어지자마자 바로 강우에게 달려왔다. 마침 강우가 부산행을 준비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이렇게 기차 안에 함께였다.

    덜컹. 덜컹.

    강우가 달리는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설렘과 낯선 감정이 묘하게 뒤섞였다.

    * * *

    스르륵.

    고급 세단이 광복회 앞에 멈춰 섰다. 광복회 앞쪽에는 기자들이 여럿 있었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특종이라도 잡을 요량인가 보다. 주변에는 광복회에 항의 방문한 사람들도 보였다.

    -친일파 나창식은 국민에게 사죄하라.-

    -친일로 쌓은 부를 국가에 환원하라.-

    팻말까지 들고 광복회 건물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빛은 엄중했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그 모습을 보며 짧게 탄성을 뱉어냈다.

    “형님, 예나 지금이나 국민은 변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 동생 말이 맞는 듯해. 사실 독립운동의 가장 큰 공로자들도 이름 없이 몸을 바친 백성들이었지.”

    두 분 할아버지가 감회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그 옛날 백성이 나라를 위해 나섰듯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강우가 던진 화두에 답한 것은 국민이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북적이는 건물 앞에 최 비서가 말했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닐세. 이렇게 사람들의 열기를 느껴보는 것도 오랜만인데 여기서 내려주게.”

    “맞아. 우리가 뒤로 돌아가는 성격들은 아니라서 말이야.”

    정 기사와 최 비서가 서로를 바라보며 감탄성을 뱉어냈다. 이제는 나이가 들었지만, 역시 대단한 분들이라고 생각했다. 정 기사가 두 분 할아버지의 말대로 광복회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문이 열리고 잘 차려입은 할아버지와 최준이 내렸다.

    “어르신, 제가 안까지 모시겠습니다.”

    차에서 내린 최 비서가 깍듯하게 말했다. 할아버지와 최준을 바라보는 최 비서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아닐세. 오늘 데려다준 것만 해도 정말 고마워.”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대기하고 있다가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허허…. 괜찮대도….”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강우가 부산을 간 상태였다. 정 기사도 최 비서도 강우가 자리를 비워 회사에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할아버지와 최준의 스케줄을 알아내고 이렇게 달려온 것이었다. 강우가 시킨 것이 아닌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아닙니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결국, 할아버지가 두 손을 들었다.

    “알겠네. 그럼 오늘 하루만 잘 부탁함세.”

    할아버지와 최준이 최 비서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 광복회 건물로 향했다. 이윽고 건물 앞에 있던 기자들이 먼저 할아버지들을 알아보았다.

    “박재봉 유공자님! 잠시 인터뷰를!”

    “여기 좀 봐주십시오!”

    순식간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다가오는 기자들을 쓱 둘러보았다. 두 분 할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오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에 기자들이 움찔했다.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먼저 내 용무를 보고 나서 인터뷰를 하는 게 이야깃거리가 더 많을 듯합니다. 그럼 잠시.”

    할아버지 말에 기자들이 홍해 갈라지듯 갈라졌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당당한 걸음으로 입구로 향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를 지키던 경비들이 나섰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평소보다는 예민한 표정과 반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강우가 다녀간 이후로 광복회에 몰려든 사람들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경비를 쓱 바라보았다.

    “권태복 회장을 만나러 왔네.”

    경비가 할아버지와 최준을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이내 두 분을 알아보았다. 경비가 화들짝 놀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할아버지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권 회장에게 기별을 좀 넣어 줄 수 있겠나?”

    “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와 최준을 몰라볼 수야 없었다. 경비가 내선전화를 이용해 회장실에 연락했다.

    “지금 회의 중이라고 합니다. 올라가시면 백도종 이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네.”

    할아버지와 최준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경비들이 할아버지와 최준을 보며 탄성을 뱉어냈다. 독립투사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을 한두 번 느껴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정말이지 범상치 않았다. 그만큼 할아버지가 오늘 단단히 각오하고 오신 것이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백도종 이사가 있었다.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던 백도종 이사가 두 분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이보게 재봉! 최준 형님!”

    이미 안면이 있는 백도종 이사가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할아버지도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종이, 잘 지냈는가?”

    “미안하네.”

    백도종 이사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할아버지가 백도종 이사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형님….”

    “도종이, 오랜만이군.”

    백도종이 최준을 대하는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독립운동 당시 최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백도종도 최준을 알고 있었다.

    “일단 제 방으로 가시죠. 회장님은 회의가 끝나고 제 방에 오시기로 했습니다.”

    할아버지와 최준 그리고 백도종 이사가 마주 앉았다.

    “그래, 오늘 우리가 찾아온 이유는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형님, 참 대단한 손자를 두셨습니다.”

    백도종 이사가 강우를 떠올리며 감탄했다. 강우가 다녀간 이후로 광복회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니 대한민국이 흔들리고 있다는 게 맞았다.

    “우리 강우가 참 대단한 아이지. 나도 알고 있네. 그래, 태복 회장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라던가?”

    “.....”

    백도종 이사가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도 권태복 회장은 그 안건으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물론 나창식 이사는 광복회를 박차고 나간 상태였다. 하지만 평소 나창식 이사를 따르던 이사들이 문제였다. 아직 광복회에 남아 나창식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친일 명단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자본에 굴복한 몇몇 사람들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가? 그동안은 배신자들을 특정할 방법이 없다고 치세.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않은가?”

    “재봉 자네 말이 맞네. 자네 손자 강우가 숨어있던 배신자들을 전부 밝혀냈지. 하지만 광복회 내부에 너무 깊게 뿌리가 박혀있어.”

    백도종 이사가 한숨을 쉬었다. 광복회는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을 위해 만들어진 사단법인이었다. 시작은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점 변해 갔다. 공공의 이익보다 단체의 영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은 미미해져 갔다. 오직 단체를 홍보하고 자신들이 가진 목소리에 힘을 싣는 것에 집중했다. 수많은 독립투사의 후손들이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래, 돈을 좇는 그리고 명예만을 얻기 위한 자리가 되었지. 원로들이라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업과 이익을 위해 정말 어려운 사람들과 후손들을 외면했어.”

    “미안하네….”

    물론,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관한 것도 사실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무뎌진 초심은 썩어 문드러졌다. 그래서 백도종 이사는 이번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야 광복회 내부에 피어버린 독버섯을 알아차리고 그 악취에 놀랐다.

    “늦지 않았어.”

    “늦었네. 자네 손자가 우리를 거들떠나 보겠는가?”

    백도종 이사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사람은 강우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할아버지가 백도종 이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네는 내 손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그게 무슨 말인가?”

    그 순간이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권태복 회장이 들어섰다.

    “미안하네. 회의가 길어졌어.”

    권태복 회장이 할아버지를 향해 미안하다 했다. 그리고 최준을 보고는 깍듯이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나야 잘 지냈지. 그나저나 자네 안색이 말이 아니군.”

    권태복 회장이 움찔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 며칠간 엄청난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지금 광복회가 존폐의 갈림길에 처했네….”

    권태복 회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 한숨에는 강우에 대한 원망도 조금 섞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권태복 회장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우리 손자가 광복회를 버릴 거로 생각하는 건가?”

    “으음….”

    권태복 회장이 침음성을 흘렸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최준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중국에 있는 독립투사들과 후손들까지 모두 찾아내 품에 안은 아이일세. 잘 생각해보게 지금 강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권태복 회장과 백도종 이사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가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강우는 광복회의 썩은 흉부를 도려낼 생각이네. 그리고 그 위에 새살을 돋게 할 생각이지. 그러기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워 놓았어.”

    할아버지가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강우가 군대에서 정리한 수많은 수첩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서 받아온 자금이 문제인가?”

    권태복 회장이 수첩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가 말을 이어갔다.

    “자금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광복회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내 손자는 아낌없는 지원을 할 것이니까. 왜 저들이 가진 힘이 걱정인가?”

    “......”

    권태복 회장이 침묵 속에서 계속 수첩을 읽어내려갔다.

    “그것 또한 걱정하지 말게. 내 손자가 저들이 가진 힘을 하나씩 하나씩 무너트릴 거니까. 자네들은 그냥 강우만 믿고 따라오면 되네. 그리고 작은 힘이나마 보태주면 되는 게야.”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권태복 회장이 수첩을 내려놓았다. 옆에 있던 백도종 이사가 재빨리 수첩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첩에는 강우가 정리한 광복회의 모든 사업에 들어갈 자금의 규모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광복회가 해나갈 새로운 지원 사업들도 적혀있었다.

    “허…. 정말 이게 그 젊은 아이에게서 나온 생각이란 말인가?”

    “그렇네.”

    할아버지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이제, 광복회를 제 모습으로 돌려놓을 시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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