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다. 별일.
부우웅.
고급 세단이 사단법인 광복 빌딩 앞에 도착했다. 부드럽게 주차장으로 들어간 차에서 잘 차려입은 강우가 내렸다.
“감사합니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장 기사가 차에서 내려 강우를 배웅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법인카드를 꺼냈다.
“점심 맛있는 거 사드세요. 아끼지 마시고요.”
“네, 부사장님.”
강우가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부터 강우를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전역을 축하받는 게 일상이었다. 물론 기분 좋은 일들이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강우가 사단법인 건물 최상층에 도착했다.
“와아아! 축하합니다!”
사방에서 폭죽이 터지고 오색테이프가 무지개다리를 만들며 날아들었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강우 삼촌, 축하드려요!”
어린아이 몇 명이 강우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모두 강우가 잘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몇 번의 광복절 모임에서 자주 보던 강용이와 또래 친구들이었다.
“고맙다. 많이들 컸네.”
강우가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이들뿐이 아니었다. 강우를 반기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강우야, 전역 축하해!”
“돌아온 거 환영한다.”
나이가 지긋한 독립유공자분들과 여러 후손분도 오늘 총출동했나 보다. 강우가 환하게 웃었다. 강우에게 제2의 가족이라면 바로 이들이 아니겠는가.
“다들 멀리서 번거롭게 오셨어요. 제가 한 분 한 분 다 인사드리러 다니려고 했는데요.”
강우 말에 사람들이 무슨 소리냐며 웅성거렸다. 바쁜 강우가 아니라 자기들이 오는 게 맞는 일이라며 일제히 목소리를 냈다. 강우가 그런 사람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무엇보다 다들 얼굴이 너무 편안해 보인다.’
문득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다들 삶에 치이고 치여 고단하고 걱정이 많은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표정부터가 달랐다. 모두 사단법인 광복에서 진행하는 복지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부사장님, 오늘 회의 이후에 다 같이 모이는 자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강우와 이재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사단법인 광복을 이끌던 이사회 임원이 말했다.
“그래요?”
강우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독립유공자분들과 후손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회의 금세 마치고 바로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강우 말에 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강우가 이사회 임원들과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안에는 사단법인의 고문들 자문위원들까지 전부 모여있었다. 그리고 전국 곳곳에 세워진 지부장들까지 모여있었다. 강우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사단법인 광복은 규모도 체계도 완벽히 잡혀있었다.
“다들 편히 앉아주세요.”
강우가 회의실 맨 상단에 자리했다. 일어서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 강우가 자리에 앉자 묵직한 서류 더미가 올려졌다.
“잠시 제가 검토를 좀 하겠습니다.”
강우가 서류를 한 장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일반 사업체와는 다르게 성과를 평가하고 사업 전략을 짜고 매출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사단법인에 주어진 자금을 얼마나 잘 공정하게 집행했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는 그동안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강우가 군 생활을 하는 2년 동안 가장 신경을 쏟았던 곳이 바로 사단법인 광복이었다.
‘동양 무역이나 대진 그룹이나 모두 유능한 사원들에게 맡겨도 충분하지만…. 이분들은 꼭 내 손으로 챙기고 싶었으니까.’
일단 강우는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의 주거를 안정시켰다. 서울시개발공사와의 성공적인 합작 사업을 한 이후 주거 안정 프로그램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각 지역의 자치단체와 협약을 맺고 미분양 주택들을 이용해 독립운동가분들과 후손들에게 내 집을 만들어주었다.
사라락.
다음은 경제 활동 지원 분야였다. 현재 대한민국은 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 후손들에 대한 취업 지원을 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먼저 알고 지원해야 할 뿐 아니라 기회도 딱 한 번뿐이었다. 강우는 그런 보훈처와는 달리 더 적극적으로 취업 지원을 하고 있었다.
“취업 지원 분야에 조금 더 신경을 써주셔 할 거 같습니다. 중소기업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기업들과도 연계해서 취업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세요.”
강우가 입을 열자 담당 사무관들이 열심히 메모를 시작했다. 강우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장학 프로그램도 더 확대해 주시고요.”
강우가 취업 지원만큼 신경 쓰는 것이 바로 장학금 지원 사업이었다. 강우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점점 어렵게 살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강우는 후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그저 일회성 지원이 아닌 삶의 전반에 필요한 교육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탁.
강우가 두꺼운 서류철을 덮었다. 그동안 신경 쓴 만큼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정말 고생들 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더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주세요. 더 세심하고 진정성 있게 유공자분들과 후손분들을 대해주시고요. 그리고 앞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계획이 또 있습니다. 그건 정리가 끝나는 대로 하나씩 풀어내겠습니다.”
말을 마친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기다리고 계신 분들을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 * *
왁자지껄한 고깃집에 강우가 앉아있었다. 수많은 사람에 둘러싸인 강우는 참 행복해 보였다.
“강우야, 글쎄 우리 딸이 이번에 반에서 1등을 했어.”
“정말이요?”
“그래, 이게 강우가 도와줘서 그런가야.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학원도 가고 참고서도 마음껏 산다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중년 여성이 강우를 보며 연신 고마워했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연지가 열심히 공부해서 그런 거죠.”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는 강우 없었으면 진짜 이런 삶을 살지 못했어. 그렇죠. 여러분?”
중년 여성의 물음에 사방에서 ‘옳소!’ 하고 대답이 들려왔다. 특히 중년 여성은 강우가 자신의 딸 이름까지 기억하는 것에 감동했다.
“우리 강우는 참 예의 바르고 잘생겼고 능력도 있고. 정말 조상님들이 남은 독립투사들 후손을 위해 보내준 사람 같아.”
“아이고~ 어머니 이러다 저 부끄러워서 사라지겠어요.”
강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강우 힐끗 옆을 바라보니 지긋이 나이 든 유공자분들이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저 그럼 잠시 어르신들한테 다녀올게요.”
“그래그래.”
중년 여성이 강우를 보며 흐뭇해했다. 강우가 독립투사분들께 다가갔다.
“어르신들 저 왔습니다.”
“오~ 강우구나?”
어르신들이 화색을 띠며 강우를 반겼다.
“제가 한잔 드리겠습니다.”
강우가 유공자 어르신들에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유공자분들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강우의 잔을 받았다.
“그래, 군 생활은 잘했고?”
“네, 어르신.”
어르신들이 옛 기억을 떠올렸다.
“요즘은 전쟁이 없으니 군대에 가도 참 안심이야.”
“그러게 말이야 우리 때는 군인이라는 신분은 늘 목숨이 위태로운 존재였지.”
강우가 유공자분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분들 모두 독립투사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 전쟁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할아버지처럼 나라를 위해 싸운 분들도 많았다.
“정말 존경하고 있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강우의 말에 유공자분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자를 보듯 강우를 따듯하게 바라봐 주었다. 그렇게 강우는 유공자분들과 후손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 * *
스르륵.
강우 집 앞으로 고급 세단이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강우가 내렸다. 고생했다는 인사를 주고받고 고급 세단이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후….”
강우가 긴 숨을 뱉어냈다.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강우가 군대에 있는 동안 어찌나 쌓아놓은 이야기들이 많으셨는지 한참이나 강우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강우는 조만간 다가올 여름에 있을 정기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으아~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참 좋네.”
강우가 기지개를 크게 켰다. 다른 것보다도 사단법인이 잘 돌아가는 것이 너무 좋았다. 미래 기억과는 달리 독립유공자들과 그 후손들의 삶을 바꿔놓고 있다는 것에 뿌듯했다. 강우가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기본이라면 지금 하는 일들은 사명감이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과제들이 수두룩하다.’
그 순간, 시원한 밤바람이 강우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우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아직 불이 밝혀져 있는 편의점이 보였다. 강우가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어어?”
마침 편의점에서 아버지가 나오고 있었다. 편한 복장에 한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이제 와? 오늘도 늦었네.”
“네, 재단에 좀 다녀오느라요.”
아버지가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잠이 안 와서 캔맥주 한잔하려던 참인데 같이할까?”
“저도 그럴 참이었어요.”
“그럼 밖에서 마시고 들어가자.”
“네.”
강우와 아버지가 편의점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가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비닐봉지에서 캔맥주와 안주가 쏟아져 나왔다.
“무슨 일 있으세요?”
평소 아버지가 즐기던 숫자보다 많은 캔맥주와 조금은 근심 어린 표정에서 강우가 무슨 일이 있는 것을 직감했다. 아버지가 강우를 보더니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별일.”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아버지가 걱정이나 근심이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 있었다. 바로 살짝 주름진 콧잔등과 짧아진 말투였다.
딸칵.
강우가 맥주캔을 뜯어 아버지에게 드렸다.
“드세요.”
“고맙다.”
아버지가 맥주캔을 받아서는 단숨에 들이켰다. 강우가 자신의 맥주도 뜯어서는 벌컥 마셨다. 그리고 말없이 안주를 뜯어 먹기 좋게 세팅했다. 이럴 때는 아버지가 말을 꺼내기까지 기다리는 게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후루룩. 후루룩.
한동안 아버지는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강우는 말없이 아버지를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몇 개의 맥주캔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하아….”
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강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저한테는 비밀 없기로 약속하신 거 기억하시죠?”
“.....”
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며 몇 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삶의 벼랑에서 자포자기한 심정일 때 눈앞의 아들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까지 자신과 다른 가족을 이끌고 왔다. 아버지는 그런 강우가 참 든든하고 고마웠다.
아버지는 강우를 한 번 더 믿고 의지하기로 했다.
“형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아버지가 말하는 형님은 바로 강우의 큰아버지였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인연을 끊는다며 다툰 지가 벌써 십여 년이 지난 분이었다.
‘큰아버지라….’
강우가 얼핏 어렸을 적을 떠올렸다. 기억에 남아있는 큰아버지는 무뚝뚝했지만, 강우를 예뻐해 주신 분이었다. 슬하에 딸이 둘이라 강우를 아들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막냇삼촌의 죽음을 계기로 왕래가 끊겨버렸다. 미래 기억 속 강우는 그런 큰아버지가 싫었다.
‘하지만…. 더 나중에야 오해들이 풀렸었지….’
큰아버지에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미래 기억을 가진 강우는 지금, 이 순간도 큰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먼저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해결할게요.”
“......”
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강우 표정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혹시 지금 부산에 계신 거죠?”
“맞아….”
아버지가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강우가 아버지 손을 잡아드렸다.
“미우나 고우나. 아버지 형제분이시고 제 큰아버지예요. 어려움에 빠져계신 데 모른 척하기는 싫어요. 제가 조용히 다녀올게요.”
“강우야….”
아버지가 감동한 눈빛을 지었다. 아버지 역시 형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사셨었다. 그리고 틀어진 관계가 늘 미안하고 힘들어하셨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관계를 돌려놓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