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1화 (231/402)
  • 너 요즘 힘들다며?

    쏴아아-

    소나기가 세차게 물줄기를 뿌렸다. 강우와 김춘배는 근처 편의점 앞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 앞에는 뜨끈한 김을 뿜어내는 컵라면이 있었다.

    후루룩. 후루룩.

    김춘배가 정신없이 라면을 먹었다. 젖은 몸에 온기가 돌고 김춘배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강우가 물을 쓱 내밀었다.

    “굶었냐?”

    김춘배가 컵라면에 코를 박은 채 말했다.

    “어? 어어…. 요새 통 입맛이 없어서.”

    “그런 거치고는 너무 허겁지겁 먹는 거 아니냐?”

    김춘배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상하게 네 얼굴 보고 나니까 막 입맛이 돈다.”

    “그래, 많이 먹어라. 일단.”

    김춘배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입맛이 사라졌어.”

    “그래? 그럼 바로 시작할까?”

    “아니, 먹고.”

    김춘배가 다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강우가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편의점으로 다시 들어가 이것저것 먹을 것을 또 사 왔다.

    “더 먹어라.”

    “땡큐.”

    김춘배의 폭풍 식사가 이어졌다. 강우를 만난 김춘배는 정말 잘 먹었다.

    쏴아아-

    그사이 빗발은 더 거세졌다. 강우가 비 내리는 거리를 보며 여유를 즐겼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잘 먹는 모습에 절로 기분도 좋았다.

    “아…. 잘 먹었다. 얼마 만에 이렇게 먹은 건지 모르겠네.”

    이윽고 김춘배가 음식을 다 먹었다. 음료까지 먹은 김춘배가 작게 트림까지 했다.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이렇게 잘 먹을 거 굶기는 왜 굶어?”

    “미안.”

    김춘배가 씩 웃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답답하고 우울한 기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우를 보니 마음이 편했다.

    “너 요즘 힘들다며?”

    “....”

    김춘배가 찔끔 눈물을 흘릴뻔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는 여전히 따듯한 사람이었다. 강우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말해봐. 뭐가 힘든지.”

    “그냥…. 배우라는 게 참 힘든 직업인 거 같아.”

    “너 연기 좋아하잖아.”

    “좋아하는 거랑 또 직업이 되는 거랑은 다르더라고.”

    강우가 내심 김춘배 말에 공감했다. 막연히 좋아하던 일을 직업으로 가지게 되었을 때 마냥 즐겁다고 느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생각 중이야. 아버지 공장이나 물려받을까 싶기도 하고.”

    김춘배 어깨가 축 처졌다. 잔뜩 기가 죽은 친구 모습에 강우가 탄식을 뱉어냈다. 나이가 들고 세상을 알아갈수록 비범은 평범함이 되어간다. 그리고 한때 비범했던 친구는 이제 평범함에 물들어 가고 있는 거 같았다.

    “춘배야, 나은이한테 들었다. 혜지랑 많이 안 좋아?”

    “뭐…. 조금….”

    김춘배가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강우가 그런 김춘배를 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김춘배가 김혜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군대 안 갔다고 반대하신다던데 그게 맞아?”

    “그것도 이유 중 하나고….”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또 뭐가 있어?”

    “혜지 아버지가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하신다. 직업도 그렇고….”

    “왜? 배우가 뭐가 어때서?”

    강우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사실 지금 시대의 어른들이 연예인을 안 좋게 보는 것은 맞았다. 일명 딴따라라고도 하며 싫어하기도 했다.

    “혜지 아버지는 혜지가 안정적인 사람을 만나기 원하셔.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다.”

    “뭔데 그게?”

    김춘배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리 동성동본이더라.”

    “어?”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미 동성동본 혼인 금지법은 헌법 불일치 판정이 내려지고 효력이 정지된 상태였다.

    “물론 법적으로는 문제없는 거 알아. 그런데 어르신들까지 반대하니까. 이런저런 이유까지 다 겹쳐서 그러지 뭐.”

    “그렇다고 사귀지도 못하게 해?”

    김춘배가 어깨를 으쓱했다.

    “벌써 사귄 지 3년이 넘었잖냐. 혜지 부모님도 슬슬 그냥 사귀는 건가 진지한 단계인가 걱정이시겠지.”

    “그렇구나.”

    3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혜지는 뭐래?”

    “혜지야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지. 그런데 알잖냐. 혜지 아버지가 워낙 엄하시기도 하고. 혜지도 부모님 말씀 거역해본 적이 없어서.”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보아온 김혜지는 참 바르고 착한 아이였다. 부모님이 반대하니 심적으로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손 놓고 가만히 있을 거야?”

    “아…. 모르겠다. 요즘 같아서는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아.”

    김춘배가 머리를 쥐어 쌌다. 일도 연애도 그리고 가정사도 엉망인 요즘이었다. 강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이 어린양을 어찌할꼬….”

    강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춘배가 움찔하며 강우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가자.”

    “어디를 가?”

    강우가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먹던 자리를 깔끔히 정리한 강우가 슬쩍 비가 오는 상태를 살폈다. 이 정도면 뛰어가도 되겠다 싶었다.

    “일단 집에 가자고.”

    강우가 김춘배의 어깨를 툭 치고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어?”

    김춘배가 자리에서 일어나 강우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두 남자가 미친 듯이 웃었다. 김춘배가 속이 뻥 뚫리는지 크게 고함까지 질렀다.

    “우아아아!”

    길을 가던 행인들이 강우와 김춘배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일부 사람들은 혀를 차기도 했다.

    “쯧쯧…. 젊은 나이에.”

    하지만 강우와 김춘배는 아랑곳없이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왜 갑자기 뛰는 건데?”

    김춘배가 또 젖어버린 옷에서 물기를 짜냈다. 강우도 물기를 털며 씩 웃었다.

    “그냥 기분 좋아지잖아.”

    “그건 맞지.”

    김춘배가 씩 웃었다. 두 사람은 집으로 들어갔다.

    덜컥.

    문이 열리고 텅 빈 집 안이 드러났다. 강우가 김춘배를 향해 물었다.

    “어머니는?”

    “아빠 공장에.”

    “그래? 요새 공장은 어때?”

    김춘배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강우 덕분에 어음을 받지 않고 부도 위기에서 벗어났었다. 하지만 공장은 여전히 힘든 상황이었다. 경기 자체가 침체한 상황이라 납품하던 백화점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기도 했다. 부모님이 정말 열심히 일하고 계셨지만,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납품처들이 많이 줄어서 힘드신가 봐. 엄마도 나가서 돕고 있는데….”

    “그래?”

    강우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대한민국을 휩쓸고 간 IMF의 흉터는 아직 깊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흉터가 지워지지 않음을 강우는 알고 있었다. 김춘배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거까지는 신경 쓰지 마라. 우리 부모님이 알아서 하겠지.”

    “음….”

    강우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춘배 부모님을 도울 방법은 많았다. 강우는 그럴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춘배 부모님이 도움을 받으며 미안해할 게 뻔했다. 몇 번이고 만나본 춘배 아버지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니 이 시대의 가장들 그리고 부모님들은 대부분 그랬다.

    ‘가장 좋은 방법이 있기는 한데….’

    강우가 곧장 해답을 찾아내며 밝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자 강우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김춘배가 말했다.

    “도와주려는 거면 그러지 않아도 돼. 네가 나를 도운 게 얼마인데.”

    “이왕 돕는 거면 끝까지 도와야지. 내 성격 알잖냐.”

    김춘배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사실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에게 부담을 더 주기는 싫었다. 조금 전 자기 입으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강우는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강우를 정말 아끼기에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

    김춘배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있는 친구는 정말 대단한 위치에 있었다. 김춘배가 예전에 강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떤 상황이 돼도 친구는 친구라고 했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자존심을 부릴 필요도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강우가 김춘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친구끼리 힘들면 돕고 하는 거지. 너는 나 어려우면 안 도와줄 거냐?”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지 뭐. 더 말하기 없기다.”

    김춘배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조금은 뻔뻔해지기로 했다. 강우는 그럴만한 친구였다.

    “고맙다…. 정말.”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있으니까.”

    김춘배가 고개를 푹 떨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강우가 군대에 있는 2년 동안 사회에 남은 친구들은 강우를 너무 그리워했다. 친구들에게 강우는 정신적 지주였으니까 말이다.

    ‘춘배 아버지 공장이 의류공장이니까. 메가 플렉스에 납품할 유니폼 생산을 하면 딱 맞겠네.’

    멀티플렉스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마침 하도급 업체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대진 그룹과 미팅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막 도와드릴 수는 없으니까.’

    생각을 마친 강우가 김춘배를 향해 말했다.

    “빨리 씻고 나와.”

    “씻으라고?”

    “그래, 네 꼴이 아주 난리이거든.”

    “우리 어디 가?”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 전역 축하 파티?”

    “응?”

    갑작스러운 파티 이야기에 김춘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빨리 씻고 나와. 그리고 제일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어어….”

    김춘배가 영문을 모르고 씻으러 들어갔다. 강우가 핸드폰을 꺼내 먼저 이나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이나은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은아, 나야.”

    핸드폰 너머 이나은이 활짝 웃었다.

    -강우야! 나 그렇지 않아도 방금 촬영 끝나서 전화하려고 했는데.-

    “오? 우리 통했네.”

    -맞아 우리 통했어.-

    강우가 헤벌쭉 웃었다. 하지만 이내 입꼬리를 부여잡았다.

    “오늘 우리 만나기로 했었잖아. 그거 애들이랑 다 같이 볼까? 내 전역 기념 파티로.”

    -진짜? 좋지! 그런데 지금 어디야? 회사? 내가 거기로 갈까?-

    이나은이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답했다.

    “아…. 나 지금 춘배네 집이야. 우리 비 맞아서 씻고 옷 갈아입고 그럴 테니까. 있다가 약속장소에서 보자.”

    -춘배 만났구나?-

    “응, 그럼 남자들한테는 내가 연락 돌릴 테니까. 나은이 너는 여자애들한테 연락해줘. 웬만하면 전부 참석하라고 전해주고.”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영리한 이나은이 대번에 강우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강우가 역시 내 여자친구라며 감탄했다.

    “잘 좀 부탁해.”

    -걱정하지 마. 나한테 맡겨.-

    참 든든한 이나은이었다. 통화가 끝나고 마침 김춘배가 씻고 나왔다. 면도까지 깔끔하게 한 김춘배는 제법 연예인 티가 났다.

    “말끔하네. 약속 시각 남았으니까 나가서 이발도 좀 하자.”

    “어, 알겠어.”

    김춘배가 강우 말을 고분고분 잘 따랐다. 이제는 강우가 씻을 차례였다. 강우가 흠뻑 젖은 옷을 벗었다. 근육질의 몸이 나타나자 김춘배가 탄성을 뱉어냈다.

    “뭘 그렇게 쳐다봐. 빨리 가서 이발하고 와.”

    “어어….”

    김춘배가 지갑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강우는 들어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옷을 다시 입으려 했지만, 꿉꿉한 날씨 덕에 마르지 않았다.

    ‘선풍기라도 틀어 놀 걸 그랬나….’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쩔 수 없이 김춘배 옷을 빌려 입어야 하나 싶었다. 강우가 김춘배 방을 열고 들어갔다. 혼자 쓰기에는 약간 좁은 방이었다. 한쪽 벽면을 메우고 있는 옷장들 때문이었다. 강우가 옷장 앞에 섰다. 손을 뻗어 옷장을 열려던 강우가 잠시 망설였다.

    ‘아…. 춘배 옷이라….’

    평소 김춘배의 패션스타일은 강우와는 상극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에 가기에는 시간이 모자랐고, 밖에서 옷을 산다고 쳐도 일단 갈아입을 옷이 필요했다. 강우가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하아….”

    강우가 깊은숨을 내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혜지 아버지가 김춘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 더 있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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