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9화 (229/402)
  • 미안하다…. 내가 술 먹고 저질렀어.

    커다란 대회의실에 대진 그룹의 중역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회의실 최상단에는 잔뜩 기분이 좋아 보이는 이철금 회장이 앉아 있었다.

    “오늘부터 대진 그룹 역사가 다시 한번 바뀌게 될 거야. 나이 어리다고 무시하지 말고 이 사장이랑 박 부사장 말을 내 말처럼 따르라고.”

    이철금 회장의 말에 중역들이 앞다투어 걱정하지 마시라며 대답했다. 이철금 회장의 그룹 장악력은 아직 막강한 상태였다. 이재원에게 그룹을 이양하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조만간 내가 가진 주식 모두를 이 사장에게 넘길 생각이야. 그 과정을 모두 투명하게 진행할 거니까. 혹시 딴마음들 먹고 있는 사람 있으면 진즉에 접는 게 좋을 거야.”

    몇몇 사람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보통 주식을 후계자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철금 회장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사실 이전이라면 생각을 해볼 법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재원은 물론이고 특히 강우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랬다가는 강우 그 녀석이 바로 대진 그룹과 연을 끊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진 그룹의 주식은 출렁이게 될 것이었다. 이철금 회장은 지분을 소유한 몇몇 중역들에게 주식시장에 개입해 장난을 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었다.

    덜컥.

    그리고 그 순간, 대회의실 문이 열리고 강우와 이재원이 나타났다. 중역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을 맞이해 주었다.

    “이리들 와서 앉아.”

    이철금 회장이 손짓으로 강우와 이재원을 불렀다. 강우와 이재원이 이철금 회장 양옆에 나란히 앉았다. 강우가 쓱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로 앞쪽에는 이재우도 있었다. 강우와 눈이 마주친 이재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얼굴이 아주 편해 보이네.’

    강우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이재원도 이재우와 눈을 마주치고는 씩 웃어주었다. 이철금 회장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자 다 모였으니까 진행하지.”

    이철금 회장의 말과 함께 이사회가 진행되었다. 안건은 당연히 강우의 부사장 승진 건이었다. 이사회는 길게 갈 것도 없었다. 그 누구도 이철금 회장 말에 반기를 들지 못했다. 아니 들 생각도 없었다. 강우가 온 이후로 대진 그룹의 주식이 하늘을 뚫을 기세였다. 강우를 대진 그룹에 더 붙잡아 둘 수 있는 수단이니 앞다투어 찬성을 해왔다. 심지어 소액 주주들의 대표도 가결에 찬성표를 적극적으로 던졌다고 했다.

    탕탕.

    “그럼 오늘 이사회는 이상으로 마칩니다. 앞으로 부사장이 되어 대진 그룹을 이끌어 주실 박강우 부사장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사방에서 카메라가 강우를 향해 눈을 돌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된 상황에 강우가 속으로 픽하고 웃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흠…. 오늘은 아주 좋은 날이군.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

    이철금 회장이 너무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강우가 준비된 마이크 앞에 섰다.

    “먼저 승진 감사합니다.”

    대회의장이 떠내려갈 듯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곧 대회의실이 조용해지자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여러모로 경제가 어려운 시기입니다. 이럴 때 대진 그룹이 약진할 수 있었던 것은 임직원분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 말씀드립니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먼저 저를 대진 그룹 부사장으로 임명해주신 것은 좀 더 주도적으로 사업을 이끌어가라는 배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앞으로 저는 상생하는 기업 그리고 문화 강국을 선도하는 기업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임원 여러분의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깔끔하고 핵심만 말하는 강우의 말에 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디 가나 회의가 길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나 보다. 그렇게 이사회가 막을 내렸다. 대회의실에 모였던 이사회 중역들이 앞다투어 강우에게 다가왔다.

    “부사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부사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강우뿐만이 아니었다. 이재원에게도 중역들이 모여들었다. 대진 그룹의 실세인 강우와 차기 주인인 이재원에게 잘 보이려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강우와 이재원은 미소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후….”

    이윽고 대회의실이 텅 비었다. 강우와 이재원 그리고 이철금 회장과 이재우가 남았다. 이재우가 강우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형님.”

    강우가 이재우에게 인사했다. 지난 2년 동안 뒤에서 이재중을 도운 이재우였다. 이재중이 실수를 할 것 같으면 적당히 제동을 걸어주고는 했다. 그리고 출판사 일에만 몰두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후계자 싸움에 더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한 처신이었다.

    “언제 식사나 같이하자. 강우 너 소개해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시간 내보겠습니다.”

    강우는 재계에서도 핫한 인물이었다. 마치 투자의 귀재 워런 부핏과 식사를 하고 싶어 하듯 모두가 한 번의 식사 자리라도 만들어 달라 난리였다. 강우가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군 생활이 더 편했을 수도….’

    하지만 모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강우가 앞으로 펼쳐낼 계획과 그림들을 위해서 말이다.

    “자자. 그럼 경영진들끼리 남았으니까 사업 보고를 시작해 보자.”

    이철금 회장의 말이 끝나자 최 비서가 바람처럼 움직였다. 이윽고 대회의실 문이 열리고 말끔히 차려입은 남성이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전략본부실 박철환 부장입니다.”

    말끔히 차려입은 남성 박철환 부장이 대회의실에 준비된 스크린 앞에 섰다.

    “지금부터 대진 그룹의 지난 2년간 사업 보고를 먼저 진행하겠습니다.”

    이철금 회장이 헛기침했다.

    “둘이 자리를 비운 2년 사이에 가장 신경 썼던 분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봐야겠지.”

    이철금 회장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움이 가득했다. 박철환 부장이 보고를 시작했다.

    “현재 멀티플렉스 현황에 대해 보고드리겠습니다. 대진 그룹의 차세대 사업인 문화 사업 분야의 핵심 중 하나인 멀티플렉스 상영관은 현재 서울에 일곱 곳을 중심으로 서울 전역에 지점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강우가 박철환 부장이 가지고 온 자료를 내려다보았다. 강우가 지정해준 장소에 멀티플렉스가 하나둘씩 들어서고 있었다. 이는 강우가 미래 기억으로 점유한 알짜배기 장소였다.

    “우리 박 부사장이 점찍는 장소가 용하다고 난리들이 아니지. 심지어 우리 멀티플렉스가 세워지는 곳에 다른 기업들이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고 있다고 하니까 말이야.”

    이철금 회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철금 회장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박 부장이 보고를 이어갔다.

    “서울에 예정된 멀티플렉스 지점들이 완공되고 나면 전국에 지점을 확장할 예정입니다.”

    이철금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워했다. 공격적인 투자와 사업 진행으로 유명한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런 공격적인 투자와 지점 확장은 겪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애초에 몇 개가 넘는 거대 건설 사업을 진행한다는 게 보통 체급이 아니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강우의 큰 그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진 그룹에 멀티플렉스 전문 설계팀을 만들고 멀티플렉스에 특화된 설계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변경사항이 있지만, 설계에 큰 틀은 다르지 않기에 빠른 완공 시간과 기타 비용이 절약되고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강우에게 향했다. 이 놀라운 사업 계획이 입대하기 전. 즉 21살 때부터 완성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룹 계열사는 물론이고 사원들 모두가 노력해준 결과입니다. 저는 청사진만 그렸을 뿐입니다. 계속해 주세요.”

    강우의 겸손함에 박 부장이 탄성을 뱉어냈다.

    ‘그릇이 다르다. 그릇이.’

    잠시 숨을 고른 박 부장이 강우를 바라보았다. 자신 역시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자부했다. 대진 그룹에 입사해 빠르게 승진을 해오기도 했다. 회사 중역들이 모인 자리에 부장의 신분으로 보고자로 나선 것을 봐도 알만했다.

    ‘하지만 부사장님한테는….’

    대진 그룹의 모든 엘리트가 같은 생각이었다. 강우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은 늘 시대를 앞서나갔고, 불패의 신화를 써나가고 있었다. 그룹 내에서 강우가 외계인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 소문의 근원지가 이재원인 것은 비밀이었다.

    “현재 메가 플렉스라 이름 지어진 본사 멀티플렉스는 점유율 업계 1위. 스크린 수가 업계 1위 그리고 동양 최대 크기의 상영관 보유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에 상영된 전용관 상영작들의 대흥행으로 각 영화사에서 제작 투자 요청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 역시 강우가 점찍어준 영화들이었다. 대진 그룹은 영화 제작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었다. 다른 투자자들과 달리 제작 기간을 재촉하지도 시나리오에 간섭하지도 않았다. 특정 배우를 꽂아 넣으려는 관행도 없었다. 그야말로 영화 제작을 위한 최고의 환경을 보장하고 있었다. 영화계에서는 대진 그룹에 투자를 받는 것이 곧 대흥행 공식이라는 말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자료를 보시겠습니다.”

    박 부장 뒤쪽 스크린으로 매출 현황을 비롯한 각종 그래프가 나타났다.

    “현재 한국 영화시장은 2000년을 기준으로 폭발적 성장을 보입니다. 2000년도에는 전년 대비 천만 명. 약 18%의 관객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2001년 현재 작년 대비 천오백만 명의 관객 증가율을 보입니다. 전략 본부팀 분석에 의하면 2000년 총 상영관 총 매출은 약 1,023억 원이고 매출 이익률은 52% 영업이익률은 약 22%입니다.”

    박 부장 얼굴에 뿌듯함이 떠올랐다. 물론 다른 대진 그룹 계열사들을 합친 전체 매출액에 비하면 큰 매출액은 아니었다. 다만, 멀티플렉스 사업은 총 세 군데의 대기업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진 그룹과 SJ 그룹 그리고 일본계 기업인 로테였다. 다만 로테는 가장 나중에 멀티플렉스 사업에 뛰어들었고 현재 단 한 개의 본점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상 SJ 그룹과의 전쟁이지.’

    그런 SJ 그룹과의 전쟁에 압승을 거두고 있다는 곳에 큰 의미가 있었다. 현재 멀티플렉스 3사 점유율은 대진 그룹이 65% SJ 그룹이 35%였다. 로테 그룹은 대진 그룹의 위세에 눌려 사실상 시장 철수까지 고려하고 있는 듯했다.

    ‘그만큼 대진 그룹의 확장세가 엄청나다는 거지.’

    대진 그룹은 멀티플렉스를 중심으로 문화산업 전반에 세를 넓혀나가고 있었다. 대진 그룹 밑으로 관련 계열사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었다. 대진 그룹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자 기존 렌탈 사업도 크게 흥하고 있었다. 또한, 대진 출판사도 탄력을 받아 매출이 뛰고 있었다. 이재우 얼굴이 편안해 보이는 이유 중 하나였다.

    ‘대진 그룹이 덩치를 키워나가며 많은 젊은이가 직장을 얻기도 했다. 멀티플렉스에서 나오는 매출이 적어 보이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이익은 엄청날 거야.’

    대회의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문화산업은 뿌리를 내리면 그 위로 많은 가지가 뻗어나갈 수 있는 구조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강우는 한국 문화산업이 점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음은 현재 짓고 있는 복합 멀티플렉스에 대한 보고입니다. 현재 용산, 강남, 영등포, 잠실 등에 들어설 시설에 대한 완공 조감도를 보시겠습니다.”

    화면으로 유려한 디자인을 가진 거대 복합시설이 나타났다. 모두가 똑같은 외형과 내부 콘셉트로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이곳은 대진 그룹 문화산업의 핵심 요충지가 될 곳들입니다.”

    이철금 회장이 탄성을 뱉어냈다. 서울시 곳곳에 지어질 대진 그룹 문화산업의 상징을 볼 생각에 설렜다.

    “하…. 정말 대단해. 하루빨리 완공되는 걸 보고 싶어.”

    의자를 감싸 쥐는 두 손에는 불끈 힘이 들어갔다. 대진 그룹을 정상에 올려줄 인물이 바로 강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대진 그룹을 굳건히 이끌어갈 이재원도 있었다.

    “문화산업에 투자를 가장 많이 한다고 하지만 기존 사업들에 소홀할 생각은 없습니다.”

    강우의 대답에 이철금 회장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사실 대진 그룹이 대기업이라 불리고 있었지만, 다른 유명 대기업들과 비교할 때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허허…. 이제 난 뒷방 늙은이나 해야겠어.”

    이재우가 그런 이철금 회장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손자들 재롱 보시면서 편하게 쉬세요. 아버지.”

    “그래. 그러자.”

    말을 마친 이철금 회장이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너는 언제?’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이재원이 못 알아차린 척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에잉~ 이 녀석이 아비를 뭐로 보고. 언제 날 잡아서 그 처자 데리고 와.”

    이재원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았다. 이철금 회장을 본 이재원이 강우를 바라보며 눈빛을 보냈다. 강우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술 먹고 저질렀어.”

    어느새 대회의실에 들어온 이재중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 이실직고했다. 이재원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아…. 진짜 형이 아니라…. 어휴….”

    대회의실 안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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