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6화 (226/402)
  • 다 나은이 덕분이지.

    덜컹. 덜컹.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강우는 지하철 문 옆쪽으로 기대 있었다. 강우가 명함 지갑을 꺼내 황규직과 김판일이 준 명함을 꺼냈다.

    -(주)에스엠텍 회장 황규직.-

    -(주)에스엠텍 이사 김판일.-

    강우가 명함을 보며 미래 기억을 떠올렸다. 황규직은 미래에도 제법 이름을 알리는 방산업체를 이끌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경영 1선에서 물러나 있다고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기업은 황규직의 아들이 경영 중이라 했다.

    ‘할아버지가 힘든 시절에 같이 일하자고 했지만, 거절하셨다고 했어.’

    할아버지가 가진 인맥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됐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강우는 할아버지가 그런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의 감정 수용량은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방산업체라….’

    지금 강우와 엮일 사업 분야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업이라는 게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었다. 강우는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띠리리리.

    -이번 내리실 곳은 삼성. 삼성역입니다….-

    치이익.

    이윽고 지하철이 목적지에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 생각에 잠겨있던 강우가 화들짝 놀라 문밖으로 나갔다. 늦은 밤이었지만, 지하철 2호선은 사람들로 붐볐다. 강우가 모자를 고쳐 쓰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뚜르르. 뚜르르.

    지하철 출구를 나가자 바로 핸드폰이 울렸다. 강우가 새로 산 핸드폰을 쓱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한국 기업들이 휴대전화 사업에서 약진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어디쯤이냐?-

    수화기에서 남재식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강우가 들를 곳은 바로 JG 소프트였다.

    “삼성역 내렸다. 금세 갈게.”

    -오케이. 기다릴게.-

    강우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걸음을 재촉하던 강우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무역센터 건물 광고판에는 튀니지 CF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두둥!

    웅장한 음악 소리와 함께 수많은 기사와 마법사들의 싸움이 시작됐다. 치열한 전쟁 한복판으로 양 진영 군주가 나타났다. 화려한 무장한 남성 군주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엘프 군주였다.

    -제8차 업데이트! 여군주 엘프 등장 임박.-

    시선을 자극하는 자막과 함께 여군주 엘프에게서 강력한 마법이 쏟아져 나왔다. 강우가 잠시 멈춰서 CF를 감상했다. 이 세상 미모가 아닌 것 같은 엘프는 역시나 이나은이였다.

    “누구 여자 친구인지 예쁘긴 정말 예쁘다.”

    강우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이나은은 열심히 촬영 중일 것이다. 이윽고 강우가 JG 소프트 본사 건물에 도착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아직 불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아마 업데이트를 앞두고 마지막 점검에 박차를 가하는 듯했다.

    “음…. 워라벨. 워라벨.”

    강우가 JG 본사 건물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JG 소프트가 개발 인력을 아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개발 특성상 담당자가 시작부터 끝까지를 맡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지이잉.

    본사 입구에 설치된 자동문이 열렸다. 보안을 위해 경비를 서던 경비업체 직원들이 강우를 막아섰다.

    “어떤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강우가 슬쩍 모자를 벗었다. 경비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박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밤에 갑자기 찾아왔죠?”

    “아…. 아닙니다.”

    강우가 오는 길에 사 온 건강 음료와 간식을 내밀었다. 경비 직원들이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앞에 치킨집에서 배달도 시켜놨어요. 교대로 드세요.”

    말을 마친 강우가 보안검색대를 통과했다. 경비 직원들이 잘 먹겠다며 우렁차게 인사했다. 강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개발실로 올라갔다.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우가 곧장 개발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에어컨을 최대한 틀었음에도 온갖 장비들이 내뿜는 열기가 대단했다. 안쪽에서는 개발 회의가 한창이었다. 중앙에는 남재식이 서 있었다. 개발자들은 각자 자리에서 의자만 돌려 중앙을 바라보고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강우가 남재식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남재식이 강우를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강우야!”

    “잘 지냈냐?”

    휴가 때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은 오랜만이었다. 남재식이 강우 손을 부여잡았다.

    “그럼 잘 지냈지. 전역 축하해.”

    “고맙다.”

    남재식과 인사를 마친 강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새로운 얼굴도 많았다.

    “안녕하세요. 박강우 이사입니다.”

    기존 개발자들은 반색했다. 새로 입사한 개발자들은 조금 긴장한 표정이었다. 강우가 누구이던가.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대진 그룹의 실세였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후손인 것도 유명했다. 마지막으로 개발자들에게 강우는 전설의 게임 프로듀서였다. 강우가 군대에 가기 전 알려주었던 온갖 아이디어와 개발 아이템이 지금의 JG 소프트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심각한 분위기야?”

    “아…. 아니야. 며칠 있다가 업데이트라서. 마지막 점검 중이었어.”

    남재식이 개발자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잘들 부탁합니다. 저는 강우가 와서 잠시.”

    개발자들 표정이 일순간 밝아졌다. 남재식이 픽하고 웃었다. 그리고 강우와 함께 사장실로 향했다.

    “요즘 어때? 튀니지 엄청나게 잘나가던데?”

    강우 말대로였다. 튀니지는 대한민국 게임 시장을 강타했다. 미래 기억과 달리 과도한 현질도 없었다. 대신 다양한 콘텐츠와 안정적인 서버 운영 그리고 적극적인 마케팅과 고객 응대를 했다. 그 결과 튀니지는 많은 유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강우가 대진 미디어와 함께 방송하는 공성전 경기 중계는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다 나은이 덕분이지.”

    이나은은 현재 튀니지에서 가장 강한 혈맹을 이끄는 군주 유저였다. 혈맹명은 ‘엘프수호대’ 였다. 그 시작은 몇 년 전 피시방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그날 이나은은 게임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리고 그날 피시방에서 구해주러 왔던 사람들과 혈맹을 만들었다.

    ‘그 사람들이 나은이의 1호 팬클럽 회원들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나은은 그렇게 팬들과 끈끈한 인연을 쌓으며 게임을 즐겼다. 이나은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밖을 다닐 수 있는 운신 폭은 줄어들었고, 점점 게임을 즐기게 되었다. 더군다나 강우도 군대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나은이 게임을 즐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튀니지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나은의 혈맹에 앞다투어 지원했다. 그렇게 혈맹 ‘엘프수호대’는 점점 강력해졌다.

    ‘그리고 지금 방송되는 공성전 콘텐츠에도 참여하고 있고.’

    상황이 이러하니 튀니지에 관한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나은을 떠올리며 강우가 헤벌쭉 웃었다. 남재식이 픽하고 웃었다.

    “하여간 네 그 표정은 나은이 생각할 때 아니면 볼 수가 없어.”

    강우가 재빨리 표정을 고쳤다. 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모바일 게임 사업부는 어때?”

    남재식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강우가 입대 전에 알려준 모바일 게임 시장 가능성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며 핸드폰 보급률이 점점 높아지면서였다.

    “이 정도로 인기가 있을 줄 몰랐어. 그리고 PC게임과 비교해서 개발비도 훨씬 덜 들고.”

    강우는 미래 기억으로 흥행했던 게임 콘셉트들을 모조리 알려주었다. JG 소프트는 모바일 시장을 장악한 상태였다.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모바일 게임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회사 근본은 PC게임이야. 개발 소홀히 하면 안 돼.”

    “걱정하지 마라. 나도 그럴 생각은 없어.”

    남재식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남재식은 게임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게임개발에 뛰어든 것도 돈을 벌기보다는 직접 좋은 게임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래, 유저들이 즐거워할 게임을 만들면 성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야.”

    “난 너만 믿고 간다.”

    강우가 씩 웃었다.

    “그래, 나만 믿고 따라와. 내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넘치다 못해 흐르니까.”

    “흐흐….”

    남재식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강우가 픽 웃었다.

    “아 그리고 우리 플랫폼 하나 만들자.”

    “플랫폼?”

    남재식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설명을 시작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지 한마디로. 우리가 개발하는 게임에 관한 기사도 내고 개발자들 인터뷰나 유저 인터뷰도 하고 무엇보다 게임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는 게 목적이야. 유저들이 게임을 즐기며 알아낸 자신만의 공략이나 정보도 공유하고.”

    “와? 그거 대박인데?”

    남재식이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인터넷 미디어 플랫폼이 활성화되기 전까지는 유저들은 게임 잡지 혹은 게임 내 유저들끼리 알음알음으로 공략을 공유하고는 했다.

    “만드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이건 바로 시행하자.”

    “오케이. 플랫폼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지.”

    남재식 말이 맞았다. JG 소프트에 있는 개발자가 몇이던가. 유지비가 들어갈 뿐 개발은 순식간에 가능했다. 그때, 남재식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 할 말 있다며?”

    “아. 그게 말이야. 우리 온라인 쇼핑몰 사업 좀 하자.”

    “온라인 쇼핑몰?”

    남재식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2001년인 지금 온라인 쇼핑은 생소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미래 기억으로 알고 있었다. 온라인 쇼핑몰은 어마어마한 시장으로 발전할 것이었다.

    “이것 좀 읽어봐. 여기 다 나와 있으니까.”

    강우가 사무실에서 가지고 온 노트를 내밀었다. 남재식이 노트를 받아서는 한 장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노트에는 JG 소프트가 나아갈 길과 여러 사업 아이템이 적혀 있었다.

    “와…. 대박. 너 군 생활하면서 이건 어떻게 생각하고 정리한 거야?”

    남재식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임 되니까 남는 게 시간이더라.”

    “해병대 수색대 훈련 엄청 힘들다고 하던데?”

    “누가?”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재원이 형이.”

    “아….”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고된 훈련은 많았다. 다만 강우에게는 별로 힘들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강우가 남재식을 슬쩍 바라보았다. 보충역 판정을 받은 남재식은 아직 입대하지 않고 있었다. 본인 말로는 회사를 더 안정시키고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강우는 정말 가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 몸 좀 좋아진 거 같다?”

    “그치? 좋아졌지?”

    남재식이 팔뚝을 ‘ㄴ’ 자로 만들며 보여주었다. 반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에 작은 민둥산이 있었다.

    “지혜도 나 엄청 건강해졌다고 좋아한다.”

    강우가 픽 웃으며 팔뚝을 걷었다. 불끈불끈한 근육을 확인한 남재식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놈. 내가 이 근육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쏘리.”

    강우가 픽 웃으며 팔을 내렸다.

    “그래? 지혜는 잘 지내지?”

    “그럼, 요즘 학교 생활하느라 정신없다.”

    “나 복학하면 만나겠네.”

    박지혜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서울대에 입학했다. 전공은 의대였다.

    “그런데 의대 공부가 힘들긴 힘들더라. 2학년인데 벌써 정신없어.”

    “당연하지. 의사는 아무나 되냐.”

    그 순간이었다.

    “그 아무나 대령입니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박지혜가 나타났다. 양손에는 김밥과 떡볶이가 담긴 봉지를 들고서였다. 교복을 벗고 화장도 하고 한껏 꾸민 박지혜는 몰라보게 예뻐져 있었다. 강우가 박지혜를 보고는 새삼 시간이 지났음을 느꼈다.

    “지혜야!”

    강우가 남재식을 보며 픽 웃었다. 이나은을 떠올릴 때 지었던 그 미소와 똑같이 남재식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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