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3화 (223/402)
  • 막내가 없었다!

    벌떡.

    강우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하….”

    그리고 헛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에 푹 잘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2년 동안 길든 몸이 반응했다. 슬쩍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 아파트 단지는 고요했다.

    덜컥.

    조심히 문을 열고 나가니 거실은 고요했다. 강우가 슬쩍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진한 사회 냄새가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강우가 픽 웃고는 텔레비전을 틀었다. 마침 아침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진 그룹 사장 이재원 씨와 동양 무역 이사 박강우 씨가 어제 전역했습니다.-

    텔레비전에는 강우와 이재원이 전역하면서 찍은 인터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두 사람이 전역하며 일어날 재계의 지각변동에 대해 질문했다.

    -현재 대진 그룹은 SJ 그룹과 치열한 사업 경쟁에서 완승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두 분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음에도 이루어낸 성과입니다. 이에 대해 평가를 해주신다면요?-

    기자의 질문에 이재원이 답했다.

    -저와 박강우 이사가 입대를 하기 전 이미 대진 그룹의 향후 사업청사진은 완성이 된 상태였습니다. 그 청사진을 그룹 임원진들과 직원들이 잘 이루어내 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장인 제가 2년 동안 자리를 비운 것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재원은 담담하게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윽고 강우에게 질문이 이어졌다.

    -박강우 이사님, 할아버지이신 박재봉 유공자께서는 광복군을 복무하셨습니다. 그리고 박재봉 유공자님의 자제분들도 모두 군 복무를 마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박강우 이사님이 전역했으니 3대째 군 복무를 마치고 병역 명문가가 되셨습니다. 소감을 좀 말해 주시죠.-

    기자의 질문에 화면 속 강우가 씩 웃었다. 그 화면을 바라보는 텔레비전 앞 강우도 씩 웃었다. 다시 들어도 웃음이 나는 질문이었다.

    -항상 말하지만, 기본을 지켰을 뿐입니다.-

    “항상 말하지만, 기본을 지켰을 뿐입니다.”

    강우가 화면 속 자신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강우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짝 닭살이 돋았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던 강우가 흠칫했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할아버지가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강우 일찍 깼구나.”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적응이 안 되나 봐요.”

    “그럴 만도 하지.”

    할아버지가 냉장고에서 커다란 유리병을 꺼냈다. 그리고 컵에 시원한 보리차를 따랐다. 단숨에 물일 마신 할아버지가 강우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우리 손자들 훤칠하구먼.”

    텔레비전 속 강우와 이재원을 보며 할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강우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고작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군 생활을 했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 독립을 위해 사선을 넘나들은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할아버지, 정말 존경해요.”

    “녀석….”

    할아버지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가셨다.

    “이 할아비가 오랜만에 옛날이야기 좀 해주랴?”

    “나도 나도.”

    그 순간.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용이가 졸린 눈을 비비고 나왔다. 아직 등교 시간 전이었지만, 일찍 깼나 보다. 강용이가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왼쪽에 강우 오른쪽에 강용이를 둔 할아버지가 든든한 기분을 느꼈다.

    “먼저 할아비 형제가 몇이라고 했지?”

    강용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저 알아요! 할아버지 쌍둥이 형이 한 분 그 위에 형님이 한 분 그리고 막내 남동생이 한 분 마지막으로 여동생이 두 분이에요!”

    “옳지 우리 강용이 잘 알고 있구나.”

    할아버지가 강용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용이가 씩 웃으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래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할아비 형제분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셨단다. 큰형님은 가산을 팔아 독립자금을 만들어 주셨고, 내 쌍둥이 형님은 밀정인 나를 보호하기 위해 몇 번이고 나인 척 일본 순사들을 속이기도 하셨지. 그 와중에 옥고도 몇 번 치르셨고.”

    “막내 할아버지는요?”

    강용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 강우도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지금 이야기는 미래 기억을 가진 강우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미래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는 지금보다 훨씬 일찍 돌아가셨고, 강우는 지금처럼 많은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었다.

    “막내는 그때 너무 어렸지. 지금 강용이보다 더 어렸을걸?”

    “와…. 진짜요?”

    강용이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하지만 할아버지 얼굴에는 옅은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강우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전쟁 통에 돌아가신 막냇동생을 그리워하시는 거지….’

    그사이 감정을 추스른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할아비 형제분들도 참 고생이 많았지 하지만 할아비처럼 남아있는 기록이 전무했기에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어.”

    할아버지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강우가 그런 할아버지 손을 잡아드렸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광복을 맞고 우리 형제는 다시 한곳에 모였다. 할아비와 큰형님은 사업을 위해 상경을 했고, 가족들은 새로 터로 잡은 광주에 남았지.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 순간.

    ‘윽….’

    강우 머리가 지끈 아파졌다. 할아버지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큰형님은 수도에서 곧장 징집되셨고, 내 쌍둥이 형님은 난리 통에 실종됐다. 이 할아비는 광주에 있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떠났지….”

    강우 머릿속에서 포성이 점점 커지고 또렷해졌다. 그리고 일순간 시야가 팍 하고 사라졌다.

    “헉헉….”

    젊은 모습을 한 할아버지가 산속을 달리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뱉는 할아버지는 끊임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할아버지는 정말 조심히 이동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거리는 정말 멀었다. 인적이 없는 곳으로 향하니 더욱 그랬다. 천신만고 끝에 할아버지는 결국 광주에 도착했다. 전쟁통에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산으로만 달린 할아버지였다. 비쩍 마르고 초췌한 모습이었다. 산에서 내려온 할아버지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이윽고 멀리 커다란 한옥이 보였다.

    ‘크다….’

    독립운동으로 가세가 기울었다고 하지만,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살 수 있을 만큼은 재산이 남아있었다. 할아버지가 광산업을 하고 크게 사업을 했던 것도 그런 배경 덕분이었다.

    “아아….”

    할아버지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을에는 이미 북한군이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집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할아버지가 얼굴을 가리고 인파 속으로 스며들었다.

    “지금부터 이 마을의 대지주이자. 반동분자 가족의 처형을 시작하겠다.”

    집 앞 상황을 확인한 할아버지가 입술을 깨물며 신음성을 흘렸다. 손이 뒤로 묶이고 눈이 가려진 익숙한 얼굴.

    ‘아버지! 어머니! 지영아…. 선영아….’

    광주에 남아있던 가족들이 처형을 앞두고 있었다. 전쟁 당시 북한군은 수많은 지주와 부자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처형했었다. 할아버지 눈에 핏발이 서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사방에 북한군들이 있었다. 일개 개인인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탕. 탕. 탕. 탕.

    총소리가 여러 번 울리고 가족들이 피를 토하며 짚단 쓰러지듯 넘어갔다. 할아버지가 몸을 날리려 하는 순간, 누군가가 할아버지를 붙잡았다. 할아버지가 휙 고개를 돌리자 마을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보게 재봉, 빨리 도망쳐. 마을 사람들이 전부 미쳤어.”

    “.....”

    낮게 속삭이는 마을 사람 말에 할아버지가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빼내 산으로 숨어들었다. 산에 숨어 들은 할아버지는 나무를 내려치며 대성통곡했다.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비통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할아버지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막내! 막내가 없었다!”

    그 순간, 강우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지더니 다시 암전되었다.

    “강우야, 괜찮은 거야?”

    정신을 차리니 할아버지가 강우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강우가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강용이도 걱정스럽게 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잠깐 두통이 왔어요.”

    “그래? 너무 일찍 일어났나 보다.”

    강우가 무언가를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부스스한 얼굴로 나왔다. 어젯밤 전역 기념 파티를 하며 과음을 한 탓이었다.

    “아버지, 일어나셨어요.”

    “오냐.”

    아버지가 강우를 보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잘 잤어?”

    “네, 잘 잤어요.”

    “역시 일찍 일어났네. 전역하면 당분간은 아침 일찍 자동으로 깨게 돼 있지. 한동안 재입대하는 꿈도 꿀걸?”

    강우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 군대 꿈을 꾸기는 했었다. 물론 강우에게는 좋은 꿈이었지만 말이다.

    “할아버지 이야기 더 해주세요!”

    강용이가 할아버지를 졸랐다. 어머니가 강용이를 말렸다.

    “강용아, 할아버지 힘드셔. 빨리 씻고 학교 갈 준비해.”

    “네~ 알겠어요.”

    강용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강우도 더 묻는 걸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험상 이야기를 더 듣는다고 영상이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빨리 씻고 나올게요.”

    “어디 가게?”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회사 가야죠.”

    “그래?”

    아버지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역시 대단한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아들, 그래도 며칠은 좀 쉬어.”

    “아니에요. 그동안 군대에서 푹 쉬었는데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들의 부지런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윽고 강용이가 씻고 나와 등교 준비를 했다. 다음은 강우가 들어가 씻고 나왔다. 전광석화처럼 씻고 나오자 어머니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아들, 여기 군대 아니야. 천천히 씻어.”

    “아…. 네….”

    잠시 후,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강용이가 나갈 준비를 끝마쳤다.

    “여보, 다녀올게.”

    세 부자가 집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 층으로 내려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운전석에 타려다가 멈춰 섰다.

    “운전할래?”

    “네.”

    강우가 승용차에 운전석에 탔다. 군대에 있는 동안 아버지 차도 고급 세단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럼 출발할게요.”

    강우가 오랜만에 운전했다. 2년 동안 군인 신분이라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손에 느껴지는 핸들과 부드럽게 밟히는 가속페달도 느낌이 좋았다. 전역을 하고 나니 소소한 것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부우웅.

    이윽고 강용이 학교 앞에 먼저 도착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강용이가 꾸벅 인사를 하고 학교를 향해 달려갔다. 마침 등교하던 친구들이 강용이를 보며 모여들었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강용이가 씩 웃으며 교문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와…. 강용이 인기 좋네요.”

    “그럼, 누구 아들인데. 학교에서 반장도 하고 선생님들도 아주 리더십이 있다고 칭찬이 자자해.”

    강우가 뿌듯한 마음을 느꼈다. 미래 기억 속 강용이와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 자신감이 넘치고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럼 회사로 갑니다.”

    “출발!”

    아버지도 유독 상기된 표정이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강우와 아버지의 대화가 이어졌다. 이윽고 승용차가 명동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주차를 마치고 승용차에서 내린 강우가 회사 건물을 바라보았다.

    “돌아온 걸 환영한다. 박 이사님.”

    아버지가 장난스럽게 축하를 건넸다. 강우가 씩 웃으며 회사 건물로 들어섰다.

    펑! 퍼펑!

    사무실로 들어서자 폭죽이 요란하게 터졌다. 그리고 직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축! 박강우 이사님 전역!-

    벽면에는 커다란 플래카드도 걸려있었다. 사무실은 그야말로 파티 분위기였다. 강우가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씩 웃었다.

    “강우 네가 첫날부터 출근할 줄 알고 다 준비해뒀지.”

    강우가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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