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1화 (221/402)
  • 진짜 끝난 건가?

    강우와 이나은이 부대 밖으로 나왔다.

    “안 피곤해?”

    강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나은에게 물었다. 이나은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너무 힘이 나.”

    “다행이다.”

    이나은은 오늘 엄청난 양의 사인을 했다. 수색대대에 이나은이 떴다는 말에 다른 부대도 사인을 받고 싶다는 요청이 밀려들었다. 결국, 당직 사령관들이 모여 팬 사인회를 대대적으로 열기로 했다. 쉬고 있는 사단장에게 연락해 인가를 받았을 정도였다.

    “진짜 군인분들이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지 몰랐어.”

    “당연히 좋아하지. 이렇게 예쁜데.”

    이나은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이제 3년이 넘어가는 연애 기간이었지만, 늘 강우 앞에서는 수줍고 설렜다.

    “아~ 박 병장님. 저희 생각도 좀 해주십시오!”

    이나은과 꽁냥거리던 강우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분대원들이 뒤쪽으로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아니 왜 쫓아와서 그러는 건데?”

    “오늘 분대 외출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분대원들이 우렁차게 답했다. 슬쩍 시간을 확인하니 다행히 외출했다가 복귀할만한 시간은 충분했다. 강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사인 못 받은 사람?”

    분대원들이 일제히 손을 들었다. 이나은이 입을 가리며 킥하고 웃었다. 강우와 이나은 그리고 분대원들이 부대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고된 훈련을 하는 후임들을 위해 메뉴는 소고기였다. 강우와 분대원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은 강우 전역 전날이니까 제가 살게요. 마음껏 드세요.”

    이나은의 말이 끝나자 분대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강우 맞은편에는 분대장을 이어받은 후임이 있었다. 분대장이 강우를 보며 말했다.

    “오늘 사단 전체가 떠들썩한 거 보셨습니까? 진짜 대단했습니다. ”

    “그랬나….”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분대원들의 시선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강우가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진짜 점점 더 예뻐지네.’

    거기다가 방송계에서 말하는 카메라 마사지까지 받는 이나은이었다. 어느덧 유명 스타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아우라 같은 것이 느껴졌다.

    ‘마치 미래 기억 속에 보았던 그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 거 같아.’

    그 기억 속 이나은은 지금보다 훨씬 대단한 스타였다. 그리고 이나은은 곧 그 위치까지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강우가 이나은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인하느라 힘 빠졌지? 빨리 먹자.”

    “응, 강우 너도 빨리 먹어.”

    강우가 분대원들에게도 먹으라고 했다. 짤막한 명령에 분대원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먼저 준비된 숯불 위에 소고기를 엄숙히 올리기 시작했다. 고기를 먹으면서 음료가 빠질 수는 없었다. 최고의 궁합은 소주였지만, 외출 나온 군인들이 음주할 수는 없었다.

    치이익. 치이익.

    소고기가 익어가며 구수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분대원들의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며 꿀꺽 침을 삼켰다. 군침을 꿀꺽 삼키는 후임들의 모습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자식들…. 고기 처음 보냐?”

    “아…. 아닙니다!”

    그동안 강우는 틈이 나는 대로 부대원들 회식을 시켜주었다. 사단장은 물론이고 대대장 그리고 중대장과 소대장까지 모두 강우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기에 잦은 외출이 가능했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분대원들이 폭풍 식사를 시작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야야! 아무리 소고기라지만 핏물은 빼고 먹자. 고기 어디 안 간다.”

    분대원들이 입안 가득 고기를 우물거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먹는 속도를 줄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저놈들 소를 한 마리 통째로 분해할 기세입니다.”

    “한 마리면 다행이지.”

    강우와 분대장이 동시에 피식하고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나은이 크게 쌈을 싸서 강우에게 먹여주었다.

    “강우야, 아~”

    강우가 헤벌쭉 웃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이나은이 쌈을 쏙 넣어주고는 싱긋 웃었다.

    “잘 먹는다. 우리 강우.”

    “나은이가 싸주니까 더 맛있다.”

    “정말?”

    강우와 이나은의 알콩달콩한 모습에 분대장이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기를 먹던 분대원들에게도 잠시 정적이 흘렀다. 몇몇은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내기도 했다.

    “아…. 저는 언제 제대합니까. 저도 빨리 제대해서 여자친구 만들고 싶습니다.”

    분대장이 너무 부러운 듯 강우와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후임들 앞에서 너무 과했나 싶었다.

    “너도 얼마 안 남았잖아.”

    “앞이 아직 안 보입니다.”

    분대장은 아직 전역까지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강우가 고기를 미친 듯이 먹고 있는 후임들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런 말 하면 쟤들은 어쩌란 말이냐?”

    순간, 식당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강우가 픽 웃었다.

    “미안하다.”

    후임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폭풍 식사를 멈추지는 않았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강우가 분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내 성격 알지? 전역한다고 너희들 잊을 생각은 없다. 우리는 피와 땀을 같이 흘린 전우니까. 부담 갖지 말고 휴가 나오면 꼭 연락들 해라. 그리고 전역하고 나서도 꼭 만나자.”

    강우의 말에 분대원들이 감동한 표정이 되었다. 사회로 돌아갈 강우는 정말이지 엄청난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들을 잊지 않겠다고 하니 감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네! 박 병장님!”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군대에서 만난 인연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나은아, 정말 괜찮겠어?”

    이윽고 식사가 끝나고 식당 앞. 강우가 이나은을 향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응, 근처 호텔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올게.”

    “난 괜찮은데….”

    이나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 입대할 때도 재원이 오빠랑 둘이 간다고 고집부려서 아무도 못 쫓아갔잖아. 이번에는 내가 꼭 마중 나올 거야.”

    강우가 입대할 때를 떠올렸다. 주변이 소란스러운 것을 피하고자 이재원과 극비리에 입대했었다. 해병대 지원에 합격하고 영장이 2주도 안 남기고 나왔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포항행 기차에 몸을 싣고 훌쩍 떠나버리듯 입대를 한 것이다.

    “그래, 알겠어. 입대했을 때는 정말 미안해.”

    “아니야. 어쩔 수 없었잖아.”

    강우와 이나은이 서로를 보며 스르륵 웃었다.

    * * *

    면회가 끝나고 깊은 밤. 반대편 침상에 있던 이재원이 훌쩍 뛰어넘어 강우에게 왔다. 강우 옆자리를 비집고 누운 이재원이 슬쩍 물었다.

    “자냐?”

    “아니요.”

    강우가 눈을 뜨며 답했다. 전역 하루 전날인 오늘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2년 2개월 동안의 일들이 머릿속을 마구 스치고 지나갔다. 특히 이재원이 강우를 따라 수색대에 지원했을 때가 가장 떠올랐다. 도저히 통과하지 못할 것 같은 지옥 훈련을 이재원은 독기로 이겨냈다. 그리고 당당히 강우와 함께 수색대원이 되었다. 심지어 천운이 따라 같은 자대에도 배치가 됐다.

    “2년이 이렇게 금세 지나갈 줄 몰랐다.”

    “그러게요. 이등병 때는 진짜 하루가 열흘 같았는데….”

    “진짜 최악이었지. 왜들 그리 사람을 못 잡아먹어 안달들이었는지.”

    군대에 남아있는 악습과 부조리에서 강우와 이재원이라고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군대에 오면 사회에서의 계급은 아무 의미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오직 군인으로서 계급이 깡패인 세계였다.

    “그래도 우리가 분위기 많이 바꿔놨으니까 다행이죠.”

    “너랑 나 그리고 우리 아래 기수들 나가면 또 몰라.”

    “설마요.”

    강우가 씩 웃었다. 그동안은 기폭제가 없었을 뿐 어떤 사람이라고 부조리와 악습을 달가워하겠는가. 다만 강우와 이재원처럼 고쳐나가겠다는 용기와 의지가 부족했을 뿐이었다.

    “회사는요?”

    강우가 물었다.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휴가 동안 싹 둘러봤다. 재중이 형이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네.”

    “내가 간간이 나갈 때마다 업무 방향은 다 잡아주고 왔으니까요.”

    “그래, 내가 말년에 한 번에 나가길 잘했지.”

    강우와 이재원은 휴가도 전략적으로 사용했다. 한 명은 때를 맞춰나가고 나머지 한 명이 전역 전에 회사를 다잡아 놓기로 했다. 순서를 정하는 건 간단했다. 예부터 내려오는 가위바위보였다. 그리고 승자는 강우였다.

    “아무튼, 그동안 고생했어요. 나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수색대에 오고.”

    “아니야. 나도 건강해졌고, 뭐랄까 남자로서 자신감도 더 커졌다.”

    강우와 이재원이 허공에서 주먹을 툭 하고 부딪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얘들아! 덮쳐!”

    누군가의 고함과 함께 사방에서 후임들이 달려들었다. 강우와 이재원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뭐…. 뭐야?”

    “야야!”

    후임들이 침낭과 베개를 이용해 강우와 이재원을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 장난 반 아쉬움 반이 섞인 마지막 이별식이었다.

    “이이익!”

    강우가 침낭을 움켜쥐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일당백의 힘을 발휘해 후임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같은 수색대원이었지만, 강우의 무용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악! 잘못했습니다!”

    “하…. 항복!”

    이재원이 침낭을 들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귀신 잡는 해병대 그것도 수색대원이 항복을 외쳐? 너희 오늘 다 죽었어!”

    어두컴컴한 내무실에서 두 명과 다수의 전쟁이 계속됐다. 모두가 그렇게 강우와 이재원을 보내는 아쉬움을 푸는 밤이 이어졌다.

    * * *

    해병대기와 수색대기가 걸려있는 커다란 방에 강우가 있었다. 강우 앞으로는 대대장이 있었고, 뒤로는 오늘 같이 전역하는 동기들이 서 있었다. 물론 이재원도 함께였다.

    “필승! 병장 박강우 외 5명은 2001년 7월 2일부로 전역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필승! 그동안 고생했다.”

    대대장이 강우에게 예비역을 상징하는 마크를 달아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다음은 동기들에게 하나씩 예비역 마크가 주어졌다. 그렇게 전역 간담회와 신고식까지 모두 끝났다. 강우와 동기들이 대대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진짜 끝난 건가?”

    동기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누군가가 또 말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아직 부대 정문 못 벗어났다. 심지어 24시간도 지나야 한다고.”

    “으음…. 빨리 나가자.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

    강우와 동기들이 이번에는 각각 흩어져 소속된 중대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중대장에게도 전역신고를 했다.

    “왔다. 강우야!”

    강우와 이재원이 마지막으로 신고를 마치고 나왔다. 동기들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강우가 동기들을 향해 말했다. 중대는 달랐지만, 전부 같은 대대 소속이었다. 힘든 훈련 속에서 강우는 늘 리더 역할을 도맡아 했었다. 동기였지만, 모두가 강우를 존경하고 진심으로 따랐다.

    “강우야, 너 전역하면 우리 잊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나가면 꼭 연락들 해.”

    강우와 동기들이 대화를 나누며 2사단 정문으로 향했다. 그 걸음이 마치 구름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멀리 위병소가 보이자 더욱 설레기 시작했다.

    “고생들 해라.”

    강우가 전역증을 보여주며 위병들에게 말했다.

    “조심히 가십시오. 선배님들.”

    그 말을 끝으로 강우와 이재원이 정문을 벗어났다. 그 순간, 강우의 눈앞에 이나은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강우가 팔을 크게 펼쳤다. 이나은이 강우에게 달려와 안겼다.

    “강우야, 고생했어.”

    “나은이 너도 나 기다리느라 고생했어.”

    옆쪽에서는 이재원과 미나도 전역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강우와 이재원은 동기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미안하다. 오늘 같은 날 삼겹살에 소주라도 한잔해야 하는데.”

    “이제 나가면 자유인데 한번 보면 되지.”

    동기들이 알았다고 하며 먼저 정문을 벗어났다. 강우와 이재원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정문을 벗어난 두 사람을 엄청난 인파가 맞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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