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화 (215/402)
  • 잠깐 시간 좀 내지.

    이철금 회장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잠깐 시간 좀 내지.”

    이재우가 강우와 이재원에게 말했다. 강우가 이재원을 힐끗 바라보았다.

    “네, 형님.”

    “그래.”

    이재우가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맨 뒤에 있던 이재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재우 형, 좀 심각한 표정인데 괜찮겠어? 내가 같이 가줄까?”

    “너는 집에 가라!”

    계단을 내려가던 이재우가 크게 소리쳤다. 이재중이 움찔하더니 멋쩍게 웃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라.”

    강우가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참았다. 이재중은 알면 알수록 참 허당미가 넘쳤다. 계단을 내려와 커다란 대문을 나오자 이재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타지.”

    이재원이 고급세단 뒷자리에 탔다. 이재원이 그 옆자리에 타고 강우는 조수석에 앉았다. 이재중이 대문을 허겁지겁 나오더니 소리쳤다.

    “좋은 시간 보내요.”

    “출발하지.”

    이재우가 말하자 고급세단이 미끄러지듯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재중이 어색한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세단을 바라보았다.

    “......”

    이재중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높은 담에 가려진 이철금 회장의 집은 보이지 않았다. 이재중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삑- 덜컥.

    그 순간 잠긴 대문이 열렸다. 이재중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열린 문 사이로 비서가 나타났다.

    “회장님이 잠깐 올라오시라고 합니다.”

    “알겠어.”

    이재중이 다시 이철금 회장의 집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대문이 닫히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스르륵.

    고급세단이 도착한 곳은 서울 중심부에 있는 호텔이었다. 강우와 이재원이 내리자 이재우는 호텔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원래 저렇게 쌀쌀맞아요?”

    “조금? 속을 잘 모르는 스타일이야. 아까 회장님 집에서도 깜짝 놀랐다.”

    이재원이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걱정이라는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술 마시다 체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말이다.”

    두 사람이 이재우의 뒤를 따라갔다. 호텔 로비에 이재우가 서 있었다. 지배인이 이재우를 알아보고는 단번에 달려온 것이다.

    “아이고 사장님.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자리 좀 준비해 주지.”

    지배인이 능숙하게 이재우를 안내했다. 강우와 이재원이 그 뒤를 따라갔다. 지배인이 준비한 곳은 호텔 라운지 바에 있는 특별실이었다.

    “난 소주가 좋은데 말이야.”

    “저도요.”

    강우와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특별실로 따라 들어갔다. 안쪽에는 이재우가 앉아있었다. U자형의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있었다.

    “앉지.”

    강우와 이재원이 양쪽으로 나뉘어 앉았다.

    똑똑.

    “들어와.”

    문이 열리고 직원 몇 명이 들어왔다. U자형 테이블 위가 안주로 가득 찼다. 마지막으로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양주가 들어왔다.

    “한잔들 받지.”

    이재우가 강우와 이재원에게 술을 권했다. 술잔이 차고 이재우가 단숨에 털어 넣었다. 손을 뻗어 과일 안주를 집어 먹은 이재우가 입을 열었다.

    “굳이 군대에 같이 가는 건 위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위험할 게 있을까요? 그룹은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이재원이 담담히 답했다. 이재우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분위기에 강우는 침묵했다. 자신이 끼어들 일은 아니었다. 아직은 말이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2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야. SJ 그룹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말이지. 이럴 때 그룹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네가 자리를 비우는 것이 좋은 일인인지는 모르겠다.”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재원의 자신감 넘치는 말투였다. 이재우가 강우를 힐끗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박 이사가 능력이 뛰어난 건 나도 알고 있지. 참 대단해 어린 나이에 말이야.”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죠. 나이가 많아진다고 유능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이재원의 말에 이재우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하지만 이내 안색을 회복했다.

    “그래, 그럼 두 사람이 군대에 가 있는 동안은 내가 신경을 많이 쓸 테니 걱정하지들 말아.”

    “네, 재중이 형이 저 대신 잘 맡아 줄 겁니다.”

    결국, 이재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재중이라니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란 말인가. 친동생이지만 정말 사고뭉치 그 자체였다. 그런 이재중을 대진 그룹의 선장으로 세운다니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그 결정을 바꾸기 위해 오늘 이 자리도 만든 것이었다.

    “재중이는 안 돼. 그놈 사고 치는 거 한두 번이 아니야.”

    “재중이 형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자의적으로 사업을 결정할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잘 다져 놓은 기초 작업을 망치지 않고 유지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죠.”

    이재원과 이재우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술잔을 잡고 서로를 응시하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강우가 입을 열었다.

    “향후 2년 동안의 사업 계획은 전부 그려놓았습니다. 변수가 생기는 부분은 휴가나 외박을 나왔을 때 처리하려고 합니다.”

    “2년 후까지의 일을 어찌 장담하고 알 수 있단 말이지? 사업은 생명체나 다름없어. 어떤 변수가 갑자기 생길지 모른다.”

    강우가 씩 웃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렇겠지만 강우는 달랐다. 미래의 기억으로 굵직한 변수들은 전부 잡아 놓은 상태였다. 혹시 달라진 미래로 변수가 생긴다 해도 연락을 받고 바로 처리할 수도 있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음….”

    이재우가 침음성을 흘렸다. 자신만만한 강우의 모습에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지금의 대진을 만든 장본인이었으니 말이다. 이재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랜 시간 후계자라 믿었던 세월이 있었다. 이재원이 나타나고 한순간에 무너진 자신의 입지를 아직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자신의 이복동생과 그 의형제는 너무 유능했다.

    “알겠다.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꺼낸 거 같군, 오늘은 입대 전에 형이 사주는 술이라고 생각해다오.”

    “네, 형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술자리가 이어졌다. 술이 들어가자 조금씩 속마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무뚝뚝하다고 생각한다.”

    뜬금없는 고해성사에 이재원이 멈칫했다. 이재우가 긴 숨을 뱉어냈다.

    “재원이 너의 존재를 알았을 때….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아니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애써 부정하던 세월 때문인지 모르지.”

    이재원과 이재우의 나이 차이는 스무 살에 가까운 차이였다. 이재원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 이재우는 이십 대였다. 그 혼란스러움과 차오르는 원망을 이재원은 조금 알 것 같았다.

    “......”

    이재원이 잔을 내려놓고 이재우를 바라보았다. 이재원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그래서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세상에 없는 것처럼 살면 정말 그렇게 될 거로 생각했지. 그러던 어느 날 네가 나타났다. 당당한 표정과 행동으로 집에 말이야. 그리고 너는 점점 존재감을 드러냈지. 나는 어쩌면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오늘 같은 날이 올 수도 있다고 말이야.”

    “.......”

    이재원은 묵묵히 이재우의 말을 들어주었다. 강우가 이재우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이재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고맙다.”

    “빈 잔을 채우는 건 쉽지만, 그 안에 담긴 술을 마시기는 점점 쉽지 않죠. 형님의 마음도 같을 겁니다.”

    이재우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이제 이십 대에 불과한 강우가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취하지 않게 천천히 덜어내십시오. 가족은 어디 가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줄 겁니다.”

    “......”

    이재우가 말없이 잔을 비웠다. 이번에는 이재원이 잔을 채워주었다.

    “형님이랑은 대화가 부족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 그런 거 같구나. 하지만 나도 시간이 필요하다. 조금은 더 기다려다오.”

    “네.”

    이재원이 씩 웃었다. 이재우가 그런 이재원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나랑 재중이랑은 영 딴판으로 잘생겼어.”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가벼운 일상이 풀어져 나왔다. 이재우와 이재원은 많은 대화를 나무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강우는 옆에서 열심히 두 사람의 대화를 도왔다. 강우라는 특급 윤활유 덕분에 대화는 막힘없이 흘러갔다.

    “그럼 조심히들 들어가라. 입대 전에 한 번 더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 말을 끝으로 이재우가 고급세단에 올라탔다. 창문이 내려가고 이재우가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곳에 올 때보다 한결 가벼워진 얼굴이었다. 고급세단이 곧 출발했고, 강우와 이재원에게서 멀어져 갔다.

    “하아….”

    이재원이 긴 숨을 뱉어냈다.

    “괜찮아요?”

    “이상하게 덜어내면 덜어낼수록 마음이 편해.”

    이재원이 강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앞으로 더 좋아질 거예요.”

    “하여간 활불이야 활불.”

    이재원이 강우의 넓은 마음에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형이 세월 더 살아봐요. 미움과 증오의 끝은 파멸뿐이라니까요?”

    “무슨 영화 대사냐 그건?”

    강우가 이재원의 어깨에 손을 턱하고 올렸다.

    “가요. 가서 소주나 한잔 더하죠.”

    “그래 역시 마무리는 소주지.”

    강우와 이재원이 투덕거리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처의 포차에 들러 밤새 술을 마셨다.

    * * *

    “형아!”

    잠든 강우를 강용이가 덮치듯 뛰어들었다. 강우가 ‘윽’ 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그리고는 강용이를 꽉 안았다.

    “으악! 아파.”

    “거짓말인 거 다 알거든?”

    강용이가 바둥바둥하며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강우의 힘을 이길 수야 있겠는가.

    “항복! 항복!”

    금세 항복을 외치며 애원했다. 강우가 씩 웃으며 강용이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학원 갔다 왔어?”

    “응, 형아.”

    강우는 입대를 앞두고 조금은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일에만 집중하려 했지만, 동양 무역에서도 대진 그룹에서도 받아주지를 않았다. 남은 시간 푹 쉬고 가라는 배려였다.

    뚜르르. 뚜르르.

    “여보세요?”

    -일어났냐? 빨리 준비해.-

    그건 이재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재원도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우와 이재원은 그 자유를 강용이를 위해 쓰기로 했다.

    “네, 알겠어요. 그럼 한 시간 정도 있다가 집으로 와요.”

    -오케이. 있다 보자.-

    이재원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힐끗 옆으로 보니 강용이는 여행 가방에 짐을 욱여넣고 있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천천히 싸. 깔끔하게 정리해서.”

    “응응!”

    강용이가 짐을 다시 꺼내더니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잔뜩 들뜬 동생의 모습에 강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덜컥.

    방문을 열고 나온 강우가 구수한 음식 냄새에 끌리듯 주방으로 갔다. 주방에는 어머니가 요리하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반찬통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엄마, 뭘 이렇게 많이 했어요.”

    “아들 일어났어? 밑반찬 좀 싸고 있었어. 남자 셋이 먹으려면 많이 싸야지.”

    역시나 어머니는 참 손이 컸다. 음식을 한 번 하면 이렇게 푸짐했다.

    “그냥 2박 3일 갔다 오는 건데요….”

    “그래도 숙소도 안 잡고 캠핑만 한다며 강용이도 있으니까 반찬 싸서 가야지.”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은 강우와 강용이 그리고 이재원이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입대 소식을 들은 강용이는 한동안 참 우울해했다. 강우와 이재원이 동시에 군대에 가니 그럴 만했다. 강용이에게 두 사람은 참 소중한 존재였다. 아직 어린 강용이가 2년이란 시간 동안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런 강용이를 위해 강우는 2박 3일간의 여행을 계획했다. 물론 이재원도 단번에 오케이를 했다.

    “네, 그럼 잘 먹을게요.”

    “강용이가 너무 좋아하더라. 우리 아들 참 착해 동생 생각해서 이런 생각까지 하고.”

    강우가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강용이는 강우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였다. 나이 차이도 크게 나거니와 미래의 기억 속에도 늘 서로를 의지했던 형제였다. 그리고 미래의 기억 속 강우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강용이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가서 신나게 놀다 올게요.”

    “그래, 알겠어.”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그사이 문이 벌컥 열리고 강용이가 뛰어나왔다. 주방을 확인하고는 또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와! 이거 다 우리 거에요?”

    “응, 강용이 거.”

    “앗싸! 가서 다 먹어야지!”

    강용이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우가 방으로 들어가 여행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베란다로 가서 아버지가 가진 장비들도 챙겼다. 텐트부터 시작해서 침낭까지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였던 등산과 캠핑 장비들이었다.

    “짐이 그렇게 많아서 안 불편하겠어?”

    거실 가득 쌓인 짐을 보며 어머니가 물었다.

    “괜찮아요. 차에다 다 싣고 다닐 건데요.”

    “그래.”

    딩동.

    그때, 벨이 울렸다. 역시나 강용이가 후다닥 달려갔다.

    “재원이 형이다!!!”

    벌컥 현관문이 열리고 강용이의 좋아죽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재원도 크게 웃으며 강용이를 번쩍 들었다. 그 모습을 강우와 어머니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강우가 짐을 번쩍 들었다.

    “자…. 그럼 세 형제의 입대 여행을 출발해 보죠.”

    이재원과 강용이의 얼굴이 설렘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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