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12/402)
  • 거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영화관 로비가 웅성웅성했다. 상영관을 나오는 사람들은 연신 대박을 외쳤다.

    “진짜 이게 우리나라에서 만든 영화라고?”

    “정말 재밌었어.”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강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기억대로 영화는 대흥행할 조짐이 보였다. 더군다나 대진 미디어의 전폭적인 지지로 최고의 촬영환경을 받았다. 특수효과는 물론이고 전반적인 영화의 퀄리티가 미래의 기억 속에 있는 것보다 더욱 뛰어났다.

    “......”

    김춘배는 사람들 사이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이 출연한 첫 영화를 보고 말도 못 할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김혜지는 김춘배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춘배, 정말 멋있었어. 고생했어.”

    “고마워….”

    김춘배가 강우를 향해 다가왔다.

    “강우야, 정말 고맙다.”

    “내가 뭘…. 네가 오디션 보고 네가 노력한 거지.”

    그때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강우와 김춘배를 향해 다가왔다. 김춘배가 화들짝 놀라며 가방에 넣었던 선글라스와 모자를 꺼냈다.

    “거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김춘배가 선글라스와 모자를 푹 눌러썼다.

    “저….”

    두 사람에게 다가온 사람들이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용기를 내어 강우에게 말했다.

    “패…. 팬입니다. 사인 좀 해주세요.”

    “네? 저요?”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네, 평소에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영화에 카메오로 나오셨죠?”

    “아…. 그걸 알아보셨습니까? 정말 잠깐 나왔는데요?”

    “분량이 적어도 한눈에 보이던데요? 진짜 무슨 무술 배우셨습니까? 막 날아다니시던데.”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방에서 사인해달라며 난리였다. 강우가 난감한 표정을 했다.

    “아…. 그게 제가 펜이랑 종이가….”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김춘배가 짧게 한숨을 쉬더니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펜과 종이를 꺼냈다.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너 준비성 하나는 우주 대스타급이네.”

    “후…. 말 걸지 마라. 지금 심란해. 내가 카메오보다 존재감이 없다니.”

    김춘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팬들에게 종이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팬들이 질서정연하게 강우의 사인을 받았다.

    “고마워요. 매니저님.”

    “네? 매니저요?”

    팬들이 김춘배에게 확인사살을 했다. 김춘배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살짝 비틀거렸다. 그때, 팬들이 이나은도 알아보았다.

    “이나은이다!”

    “엘프 여신!”

    강우에게 사인을 받은 팬들이 이나은에게 몰렸다. 이번에는 채보라가 나서서 이나은을 막아섰다.

    “잠시만요! 위험해요. 차례대로.”

    채보라가 능숙하게 팬들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춘배야! 종이랑 펜.”

    채보라가 김춘배를 불렀다. 김춘배가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터벅터벅 걸어갔다.

    “감사합니다.”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사인을 해주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법 여유롭게 팬들을 대하며 소통을 하는 이나은이었다. 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미래의 기억 속 대스타 이나은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점점 더 위로 올라가자 나은아.’

    강우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미니 사인회가 끝났다. 김춘배가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후…….”

    강우가 김춘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오늘 개봉했으니까 잘 못 알아보지.”

    “너는 잠깐 나왔는데 잘만 알아보더라.”

    김춘배가 투덜거렸다. 강우가 픽 웃었다.

    “나야 원래 좀 알아보는 편이었고.”

    “일반인한테 인지도로 밀리는 영화배우라니.”

    김춘배가 유명해지겠다며 전의를 불살랐다.

    “이사님!!”

    그때 한쪽에서 영화관의 점장이 달려왔다. 강우가 영화관에 온 것을 누군가에게 들었나 보다. 점장이 강우 앞에 와서는 꾸벅 인사를 했다.

    “이사님,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좋은 자리를….”

    “아닙니다. 오늘은 진짜 개인적으로 방문한 겁니다.”

    점장이 안절부절못했다. 대진 그룹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강우나 다름없다는 소문이 있었다. 차기 회장인 이재원과는 친형제 이상의 사이인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영화관 상태가 너무 깨끗하고 좋네요. 점장님이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럼 저희는 약속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네? 아…. 네네! 이사님.”

    점장이 강우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평소 털털하기로도 유명한 강우라더니 정말이었다.

    “우린 이만 가자.”

    강우 일행이 영화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냥 나가려던 강우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점장을 비롯한 아르바이트생들이 강우를 배웅하듯 서 있었다. 고단한 그들의 얼굴을 보고 강우가 발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점장님, 오늘 마감하시고 회식 한번 하시죠.”

    “네?”

    점장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품에서 법인카드를 꺼냈다. 그리고는 점장의 손에 쥐여주었다.

    “대진 그룹 법인카드입니다. 오늘 영화관 마감하고 제일 맛있는 거로 사드세요.”

    “아…. 아닙니다. 그냥 저희 신촌점 예산으로.”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제 카드는 소고기부터 시작입니다. 그 아래로는 사 먹으면 결제도 안 돼요. 아시겠죠? 오늘 참석 못 하는 인원도 있을 테니 오늘이랑 내일로 나눠서 두 번 하세요. 카드는 쓰시고 대진 그룹 전략본부실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이…. 이사님.”

    점장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일개 영화관 지점을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대기업 핵심 인물은 처음이었다. 강우가 민망한 듯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제가 말했습니다. 소고기 이하로는 결제 불가능이라고요.”

    강우가 사라진 곳을 점장이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르바이트생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오늘 회식이란다.”

    점장의 말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영화관 밖으로 나온 강우가 안쪽에서 들리는 환호성에 씩 웃었다. 사실 강우 마음에 항상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대진 그룹의 업무환경이었다. 강우가 모든 업무의 실권을 장악하며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강도 높은 업무량을 감당해야 했다.

    ‘워라밸이라….’

    강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대진 그룹의 업무환경을 한 번에 바꿀 수는 없었다. IMF로 9%대의 실업률을 기록하는 현 상황에서 대진 그룹 사원들은 안정적인 직장에 만족하고 있었다.

    ‘일단 하나씩 바꿔가고는 있으니까.’

    강우와 이재원은 딱딱한 업무환경을 바꿔 놓고는 있었다. 두 사람은 동양 무역을 모델링으로 점차 업무환경을 바꿔가기로 약속했다. 일부 임원들은 불안해하지만, 강우는 자신이 있었다.

    “강우야! 뭐 해?”

    생각에 빠진 강우를 신원주가 불렀다. 상념에서 벗어나니 저 앞쪽으로 일행이 보였다. 강우가 반쯤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간다. 가.”

    * * *

    딸랑.

    강우와 일행이 신촌 근처의 스테이크 전문점에 들어섰다. 대진 그룹과 경쟁 구도에 있는 SJ 그룹에서 야심 차게 오픈한 외식업체였다.

    “와~ 안에 예쁘다.”

    여자들은 벌써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난리였다. 97년도에 등촌점을 시작으로 지점을 늘려가고 있는 이곳은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스테이크를 먹으며 여러 음식과 디저트를 무한으로 즐길 수 있었다.

    “예약했다고 했지?”

    신원주가 강우에게 물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답했다.

    “어, 재원이 형 이름으로.”

    “아…. 그래?”

    신원주가 역시 이재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재원은 경쟁사의 외식 사업을 직접 경험하겠다며 이곳에 오자고 했다. 더군다나 당당히 자신의 이름으로 예약까지 했다. 물론 이재원이 그 이재원인지는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몇 분이십니까?”

    강우 일행을 발견한 여자 직원이 다가와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강우가 직원에게 말했다.

    “10명입니다. 이재원 이름으로 예약했습니다.”

    “잠시만요 고객님.”

    직원이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강우가 직원의 안내를 받아 매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스테이크를 굽는 강렬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매장은 가득 차 있었다.

    “이쪽입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변 사람들이 강우와 이나은을 알아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안내를 하는 직원도 강우와 이나은을 알아본 듯했다. 하지만 일을 하는 중이니 티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좌석은 가장 안쪽으로 드렸습니다.”

    직원이 강우와 이나은을 배려해 가장 안쪽 자리로 주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최대한 적은 곳이었다.

    “배려 감사합니다.”

    강우가 고맙다고 하자 직원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강우와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직원이 메뉴판을 놓아주며 물었다.

    “고객님, 저희 매장을 이용해 보셨습니까?”

    “네.”

    강우가 대답하고는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스테이크 세 개와 샐러드바 성인 열 명이었다.

    “감사합니다.”

    직원이 떠나자 김춘배가 호기심을 보였다.

    “강우야, 너 여기 와봤냐? 주문하는 게 능숙한데?”

    “어?”

    강우가 아차 싶었다. 미래의 기억으로 너무나도 익숙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 같이 온 일행은 전부 첫 방문이었다.

    “어어…. 몇 번.”

    “누구랑?”

    이나은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강우가 살짝 당황하더니 빠르게 입을 열었다.

    “어어…. 사업 조사차 몇 번 왔었어.”

    “와~ 강우 진짜 바쁘게 사네.”

    채보라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신원주는 고개를 끄덕했다.

    “강우가 원래 부지런하지.”

    “하하….”

    “그나저나 재원이 형이 늦네.”

    그때, 입구 쪽이 또 소란스러워졌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역시 양반은 못 되는 형인가 보다.

    “얘들아~ 늦어서 미안 미나랑 같이 오느라.”

    이재원의 옆에는 미나도 함께였다. 미나는 올해 신촌에 있는 Y 대에 합격한 상태였다.

    “둘이 데이트하다 왔어요? 바쁘다면서.”

    “아니 데이트는 아니고 미나가 신촌 주변 둘러보고 있다고 하길래 퇴근하는 길에 만나서 왔지.”

    이재원의 말이 끝나자 미나가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미나입니다.”

    “미나야.”

    안면이 있는 이나은은 반갑게 미나를 맞이했다. 미나를 처음 보는 김혜지와 채보라가 벌떡 일어나 마주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김혜지와 채보라는 미나에 대해서 조금 들어 알고 있었다. 미나는 이재원과 얼마 전부터 정식으로 교재 중이었다. 이재원이 미나에게 박력 넘치는 고백을 한 것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형, 앉아요.”

    “어어.”

    이재원과 미나가 강우와 이나은의 옆쪽으로 앉았다. 맞은편에는 김춘배 커플과 신원주 커플이 있었다.

    “재식이는?”

    “지혜 학원 끝나고 온다던데요. 아마 늦을 거예요.”

    만국 공통 통성명의 시간이 잠시 이어지고 이재원과 미나가 자리에 앉았다. 이재원이 테이블 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주문했어?”

    “네.”

    이재원이 직원이 놓고 간 빌지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아니, 사람이 몇 명인데 스테이크를 세 개밖에 안 시켰어. 저기요!”

    이재원이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형….”

    “여기 스테이크 다섯 개 더 주세요.”

    이재원의 말에 주변의 시선이 대번에 집중됐다. 가뜩이나 이쪽 테이블에 신경을 쓰던 주변 사람들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강우와 이나은 그리고 이재원까지 한자리에 있었으니 말이다.

    “어? 왜? 나 뭐 잘못 했어?”

    이재원이 움찔하더니 강우에게 낮게 물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형, 여기 처음 와보죠?”

    “어? 어어….”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직접 경험해봐요. 지금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응?”

    이재원이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주문한 여덟 개의 스테이크가 각자의 앞에 놓였다.

    “자자 먹자. 여기 스테이크 맛이 어떠려나.”

    이재원의 말에 주변에서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재원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왜? 사람들 왜 그러는데?”

    강우가 짧게 한숨을 쉬며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재원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뭐야…. 여기 뷔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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