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0화 (210/402)
  • 워라밸?

    회의실에 반가운 얼굴들이 가득했다. 마사토를 비롯해 황규범, 김지숙 그리고 강종민까지였다. 동양 무역의 핵심구성원들이 모두 모이자 회의실 안의 공기가 꽉 차는 듯했다.

    “업무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김지숙 과장의 말과 함께 전면에 프로젝트 화면이 떠올랐다.

    “먼저 동양 무역의 1998년도 사업 분야와 실적 데이터입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회사는 창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록적인 성장을 했습니다.”

    김지숙 과장이 기다란 막대를 들어 스크린을 가리켰다. 동양 무역의 98년도 분기별 매출과 영업이익이 적혀있었다. 먼저 김치 사업 분야였다. 제2 김치공장의 가동까지 시작한 동양 무역은 일본의 김치 시장을 휩쓸고 있었다.

    “1998년 한 해 동양 무역은 총 6만 톤의 판매량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일본 김치 시장 수요의 절반에 이른 수치입니다. 더군다나 계속해서 늘어나는 일본 김치 시장의 상황에 맞춰 제2 김치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올해에는 작년 대비 약 50%의 판매량 증가가 예상됩니다.”

    김지숙 과장과 마사토가 흐뭇하게 웃었다. 강우도 씩 웃었다. 동양 무역이 일본에 김치 사업을 벌이면서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강우가 가진 미래의 기억보다 훨씬 빨리 소비량이 늘어난 것이다.

    “동양 무역의 매출이 김치 사업으로만 육천만 불이군요.”

    “네. 맞습니다.”

    강우가 미소가 진해졌다. 일본 김치 시장은 동양 무역의 캐쉬카우이자 효자 종목이 되고 있었다.

    “일본에서 벌어들인 자금은 바로 한국에 투자하겠습니다. 대진 그룹의 지분을 더 인수하고 제가 지정한 회사들의 지분도 사겠습니다. 그리고 동양 무역의 신사옥을 지을 부지도 미리 확보해 놓겠습니다.”

    신사옥 이야기에 직원들이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동양 무역의 성장세라면 곧 외형을 확장해야 할 시기가 올 것이었다.

    ‘부동산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좋은 위치를 선점해 놓아야지.’

    직원들의 표정이 점점 상기되기 시작했다. 중소기업으로 시작한 동양 무역의 성장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기대감이 들었다.

    “내년에는 중국에서 개량된 금탑 고추 종자를 수확해 샘플을 만든 후 김치 생산에 투입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일본 시장에 판매를 시작해 보죠.”

    강우의 말에 임원진들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떠올랐다. 중국산 식품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못했다. 많은 일본 기업들이 중국산의 낮은 품질에 질려 식품 수입을 멈춘 상태였다.

    “가격 경쟁력은 확보할 수 있겠군요.”

    김지숙 과장이 말했다. 강우가 씩 웃었다.

    “가격 경쟁도 경쟁이지만 아마 품질도 크게 떨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중국 법인에서 개량한 종자로 수확한 고추만 사용할 생각입니다. 품질은 물론 가격 경쟁력까지 다 챙겨야죠. 중국 법인의 생산 시스템과 품질 관리를 통해 기존 중국산들과는 차별화에 노력할 겁니다.”

    회의실 안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강우의 말은 늘 현실이 되고는 했으니 이번에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대신 동양 무역에서 생산하는 김치를 두 가지 등급으로 나눌 생각입니다. 한국산만 이용한 프리미엄급 김치 그리고 중국산을 이용한 보급형 김치로요.”

    “가격 차별화를 통해 한국산 김치의 가치를 더 높이겠다는 생각이시군요.”

    “네, 맞습니다.”

    다시 한번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강우가 말한 대로라면 한국산 김치의 가격을 더 높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만큼 동양 무역의 김치는 확고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다음으로 한국에 새로 지을 김치공장과 브랜드 런칭에 대해 보고하겠습니다.”

    김지숙 과장의 사업 보고가 이어졌다. 동양 무역은 일본 시장 공략 성공을 통한 탄탄한 자금력과 브랜드 이미지를 쌓았다. 그래서 역으로 이제는 한국 시장의 공략까지 노리고 있었다. 그 이후에는 중국 시장 진출도 계획하고 있었다.

    “식품 사업부가 앞으로 맡아줘야 할 일이 참 많네요. 인원이 부족하지는 않습니까?”

    “아직 충분합니다. 직원들의 사기도 높고 업무 효율도 높습니다.”

    김지숙 과장 얼굴에 자부심이 떠올랐다. 동양 무역의 사원 복지와 업무환경은 다른 곳과 차원이 달랐다. 심지어 대기업을 다니는 지인들도 김지숙을 부러워할 정도였다.

    “다행이네요. 다시 말하지만, 업무 효율은 짜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인원이 부족하다면 언제든지 말을 해주세요.”

    “네, 이사님.”

    김지숙 과장이 업무 보고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강종민 과장이 일어섰다.

    “다음은 김 사업 분야입니다.”

    강종민 과장이 버튼을 누르자 스크린 위로 새로운 그래프가 나타났다.

    “조미김과 김 스낵의 생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조미김은 한·중·일을 대상으로 스낵김은 동남아를 위주로 마케팅에 들어갔습니다.”

    강종민 과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현재 동남아권에 수출되기 시작한 김 스낵은 서서히 반응이 오고 있었다. 특히 동남아는 물론이고 중국 시장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중국 기업들에서 수입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총판권을 원하는 기업들도 있습니다.”

    “전부 거절해 주세요. 곧 중국 법인으로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할 겁니다.”

    강종민 과장이 대번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중국에 법인이 있는 동양 무역이었다. 두 회사는 다른 법인이었지만, 한 몸이었다.

    “수출량이 늘어나면서 생산 설비를 늘려야 할 상황입니다.”

    “저희와 계약을 맺은 회사들의 설비 증설은 더 불가능합니까?”

    “이미 우리 회사 제품만으로도 라인 생산량이 포화 상태입니다.”

    강우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했다. 회의실 안의 시선이 온통 강우를 향해 집중됐다. 강우가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음…. 그러면 이참에 우리도 생산 공장을 하나 만들죠.”

    “아예 새로 짓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황규범 부장이 물었다. 생산 설비 공장을 짓는 것보다 기존의 회사들과 계약을 맺어 생산하는 것이 훨씬 수월한 방법이었다.

    “네, 앞으로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 그 이상으로 많은 물량을 만들어야 할 겁니다. 이참에 새로 짓죠.”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 일은 제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황규범 부장이 말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의는 이어졌다. 강종민 과장은 조미김 시장에 대해 보고도 했다. 후발 주자인 동양 무역의 시장진입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외국 시장을 선점하는 것은 앞서가고 있었다.

    “이상입니다.”

    강종민 과장이 보고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이스포츠 부서를 담당하는 대리의 보고가 이어졌다. 아직 사업부 규모가 작은 이스포츠 부서는 대리 한 명이 담당하고 있었다.

    “동양 레지스탕스는 초대 리그를 1위로 끝마쳤습니다. 그리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대진 로열스를 3:0으로 완파하고 초대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이스포츠 부서 담당 대리의 말이 끝나자 임원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대흥행을 거듭하고 있는 프로리그는 젊은 층을 넘어서 중장년층에도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동양 무역의 직원들은 자회사 팀인 동양 레지스탕스를 정말 애정하고 응원했다.

    “수고했습니다. 올해부터는 프로리그를 확대하고 계절별로 시즌제를 도입할 예정입니다. 일정이 빡빡해지는 만큼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에 신경 써 주세요. 그리고 우승 기념으로 보너스도 두둑이 지급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정말이십니까?”

    담당 대리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기뻐할 선수들을 생각하니 자신도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 회의가 끝나고 나면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분간은 제가 계속 동양 무역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동양 무역은 지금 도약을 위한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잘해주고들 계시지만, 앞으로 더 잘 부탁드립니다.”

    강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른 임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드르륵.

    잠시 후, 회의가 끝나고 임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오늘 점심은 특별히 맛있는 거로 드세요.”

    강우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나둘씩 임원들이 밖으로 나갔다. 황규범 부장은 강우에게 궁금한 게 있는 듯했다.

    “강우 이사.”

    “네, 부장님.”

    나머지 임원들이 나가고 둘만 남았다. 강우의 부탁대로 황규범 부장이 편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개강 아닌가?”

    “아…. 휴학을 할 생각입니다.”

    황규범 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우가 휴학하는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지금 시기에 휴학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릴 만했다.

    “설마 영장이 나온 거야?”

    역시 입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이요. 영장은 아직 안 나왔어요.”

    “그래? 그래도 올해 안으로 갈 생각이지?”

    “네.”

    강우가 고개를 끄덕했다. 황규범 부장이 긴 숨을 뱉어냈다. 지금 동양 무역은 물론이고 대진 그룹과 중국 법인까지 강우는 그야말로 세 곳의 기둥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동양 무역은 강우가 선장이었다.

    “걱정이네. 강우 네가 2년 2개월이나 자리를 비워야 한다니….”

    “그전에 제가 기틀은 다 잡아놓고 갈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계시잖아요.”

    아버지를 언급하자 황규범 부장이 대번에 되물었다.

    “사장님이 귀국할 예정이신 거야?”

    “저 입대하고 나면 아마 한국에 오실 거예요.”

    “중국 쪽은?”

    “이번에 가서 큰일들은 잘 마무리해놓고 왔어요.”

    황규범 부장이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불과 한 달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강우는 중국 법인에 산적한 일들을 깔끔히 처리하고 온 것이었다.

    “휴학하고 나면 곧 영장이 나오겠군.”

    “아마 4월쯤 나오지 않을까 생각 중인데요.”

    강우가 미래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미래의 기억에도 그쯤에 영장이 나왔었다. 미래의 기억 속 강우는 99년 9월에 입대했었다. 하지만 강우는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아쉽네…. 회사도 그렇고 여러모로.”

    “이제 고속도로에 올라는 탔으니까 달릴 일만 남았죠. 부장님도 저 없는 동안 아버지 잘 도와주세요.”

    “걱정하지 마. 요즘 회사 커가는 맛에 산다 내가.”

    황규범 부장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기업에서 쫓겨나듯 나온 황규범 부장이었다. 인생의 내리막길이라 생각하고 면접을 본 동양 무역은 자신을 다시 정상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좋아 보이시네요.”

    “그럼 당연하지. 대기업 다닐 때는 매일 야근에 출장에 또 회사에서는 서로 견제하느라 사내 정치에….”

    황규범 부장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고맙다. 나 뽑아줘서. 동양 무역 다니고 나서부터는 우리 가족한테 저녁이 생겼어. 아들도 시간 많이 보내주니까 좋아하고 마누라도 너무 행복해하고.”

    “그게 바로 우리 회사가 추구하는 삶이죠. 일과 일상의 균형. 워라밸.”

    “워라밸?”

    강우가 씩 웃었다. 먼 미래에나 나오는 용어이니 모를 만도 했다. 더군다나 한국식으로 만든 콩글리쉬에 가까운 용어였으니 말이다.

    “네, 워라밸이요. 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 일과 삶의 균형,”

    “오…….”

    황규범 부장이 감탄하며 그 의미를 곱씹었다. 동양 무역이 추구하는 기업 분위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강우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시간 다 돼가네요. 점심 같이 드시러 가실래요?”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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