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실까요?
한적하던 집 안이 왁자지껄해졌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곧장 주방에 합류했다. 주인을 찾은 주방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자자~ 이제 제가 왔으니까 잠깐 쉬고들 계세요~”
어머니의 말에 김세아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김말숙은 아쉬운 듯 주방을 둘러보았다. 어머니가 중국에 가 있는 동안 출근하다시피 집에 찾아온 김말숙이었다.
“나도 도울게요.”
“아니에요.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매일 와주셨다면서요.”
어머니가 김말숙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이재원이 가사도우미를 소개해줬다고 하지만, 그런 상황에 익숙지 않은 할아버지와 최준이었다. 더군다나 두 분 성격상 가사도우미를 어려워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여기 세아 씨랑 우리 이쁜 나은이도 자주 와서 도와줬어요. 요리 빼고 나머지 일은 재원이가 보내준 가사도우미분이 다 해줬고요.”
“세아랑 나은이가요?”
어머니가 김세아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극 공연으로 바쁜 김세아였다. 이나은은 떠오르는 CF 스타였다. 두 사람이 바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에요. 언니. 저는 진짜 가끔 왔어요. 저보다 나은이가 정말 자주 들렸어요.”
“그래도 동생도 고생했어. 정말 고마워.”
어머니가 김세아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의 칭찬에 김세아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김세아는 어머니를 정말 친언니처럼 따랐다.
“네, 언니.”
“그럼 우리 힘을 합쳐서 빨리 끝내버려요.”
어머니와 김말숙 그리고 김세아가 요리를 시작했다. 강우와 이재원은 거실에 앉아있었다. 두 사람의 앞에는 할아버지와 최준이 있었다. 강우는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최준은 특히 선전에서 만난 진남규 가족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그랬구나! 그랬어.”
“네, 제 생각이 짧았어요. 그런 사연이 있는 가족들이 많더라고요.”
강우는 진남규 가족을 만난 이후로 또 다른 사례를 찾았다. 그 결과 진남규 가족과 비슷한 사례를 여럿 찾을 수 있었다. 강우는 그런 가족들을 모두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래, 잘했다.”
“그리고 예정했던 대로 독립투사분들과 후손들을 찾는 것도 마무리했습니다. 혹시 못 찾은 사람은 다시 한번 사람을 풀어 각 성과 시 단위로 찾을 계획입니다.”
최준이 탄성을 뱉어냈다. 강우의 일 처리는 꼼꼼하고 완벽했다.
“허…. 강우야.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까지 일을 마무리하고 온 거야?”
“네, 이번 일정에 가능하면 모든 일을 처리하고 싶었어요.”
강우의 말이 끝나자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있던 강용이가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우리 형아가 잠도 안 자고 중국 엄청나게 돌아다녔어요.”
“그래? 강우가 그랬어?”
할아버지와 최준이 짐짓 놀라는 척했다. 강용이가 형아 자랑에 신이 나서는 계속 말했다.
“네! 막 중국 저~~ 아래까지 갔다가 또 저~~ 위에까지 갔다가 막막….”
강용이가 손을 크게 쭉쭉 휘두르며 강우가 다닌 루트를 그렸다. 그 모습에 거실에 웃음 폭탄이 터졌다.
“그리고 투자도 잘 끝냈습니다.”
강우가 사업적인 부분에 관해 설명하려 했다. 중국 법인 광복의 자금은 모두 최준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강우는 최준에게 그룹의 일을 모두 설명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러자 최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강우야, 회사 일은 모두 너에게 맡겼으니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냥 지금처럼 평범하고 따듯하게 지내고 싶구나.”
“네, 할아버지….”
강우가 최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최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우리 말숙이가 해준 빈대떡이나 먹으러 가볼까?”
강우가 멍한 표정으로 최준을 바라보았다. 주방으로 다가간 최준이 김말숙의 어깨너머를 슬쩍 바라보았다.
“말숙아, 오라버니 배고프다.”
“아휴…. 참 그새를 못 참고.”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어머니가 또 멍하게 바라보았다. 김세아는 익숙한 듯 입을 가리고 슬쩍 고개를 돌려 웃었다. 이재원이 강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만 봐라.”
“네? 아…. 네.”
강우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화장실 좀 가마.”
할아버지가 화장실로 가셨다. 강용이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아, 왜 다들 흩어지셔? 형아 이야기가 재미가 없나?”
“어, 맞아.”
강우가 픽 웃으며 답했다. 그러자 강용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난 재밌는데….”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재원이 강우를 향해 물었다.
“난 사업 이야기 엄청 궁금한데. 투자 건은 다 잘 마무리됐어?”
“그럼요. 지난번에 내가 말해준 기업들에 투자 전부 끝났어요. 아 그리고 대진 그룹 상하이 지사 설립도 마무리 짓고 왔고요.”
이재원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역시 만사형통 박강우라고 생각했다.
“좋네. 좋아. 회장님이 또 엄청 좋아하시겠어.”
“한국은 어때요?”
이번에는 강우가 이재원에게 한국 사업 진행 상황을 물었다.
“수만 명의 직원이 마치 메모리카드가 뽑힌 컴퓨터처럼 버벅대고 있지.”
“네?”
이재원의 말에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이재원이 농담이라며 씩 웃었다.
“장난이다 장난.”
이재원이 강우가 중국에 있는 사이 진행된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으로는 강우가 가장 신신당부한 독립유공자 주택지원 사업이었다.
“재단으로 신청해 온 분들을 정리해서 서울시와 함께 주택 보급을 시작했다. 원하는 지역별로 분류해서 가장 연세가 많고 주거환경이 열악한 분들부터 공급을 시작할 거야.”
“자금 문제는요?”
이번 사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미분양 주택들을 사들인 서울시 개발공사가 어떤 가격에 주택을 공급하는지 말이다. 물론, 사단법인 광복에서 자금을 지원해 주지만 한계는 있었다.
“서울시에서 원가에 가깝게 공급하겠다고는 했어. 그리고 신용보증보험이랑 연계해서 대출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놨다. 돈이 부족해서 주택에 못 들어가는 분들 없게 해놨어.”
“형, 고마워요.”
강우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이재원이 멋쩍게 웃었다.
“아니야.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게 있는데 그리고 얼마 남지도 않으셨잖아….”
“그렇죠…. 그러니까 앞으로 더 서둘러서 해드릴 수 있는 거 다 해드려야죠.”
“그래, 맞아.”
강우와 이재원이 의지를 다졌다. 이재원이 말을 이어갔다.
“아 그리고 용산역 개발을 위해 대진산업개발도 설립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개발에 들어갈 거야.”
“다시 말하지만, 이스포츠 중심으로 개발을 해야 해요.”
“그래, 걱정하지 마라.”
이재원이 씩 웃었다. 대진 그룹의 주도로 만들어진 이스포츠 리그는 그야말로 대박 행진이었다. 매일 몰려드는 만원 관중 그리고 대회를 주관하는 대진 그룹 소속의 케이블 채널 역시 시청률 고공행진이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다른 대기업들도 이제는 앞다투어 참여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다른 사업들은 전부 안정적이죠?”
“그럼 당연하지. 렌탈 사업도 온라인 교육사업도 그리고 엔터 사업도 모두 승승장구야.”
대진 그룹의 체질 개선은 이제 완벽히 이루어졌다. 이제는 문화산업 정복을 시작할 때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강우가 있었다.
“그래야죠. 일단 내일 우리 회사 들어갔다가 바로 그룹 본사로 넘어갈게요.”
“어허~ 출장을 방학 내내 다녀왔는데 좀 쉬어야지. 오자마자 또 일이야?”
이재원이 강우를 향해 손을 저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다. 나은이랑 데이트도 좀 하고 애들도 좀 만나고 시간 나면 나랑 좀 놀아도 주고.”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이재원이 턱을 슬쩍 추켜들었다.
“어때? 너 챙기는 거 나밖에 없지?”
“음…. 그건 아닌 듯?”
이재원이 미간을 좁히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장난기는 재벌 회장이 되도 사라지지 않을 듯했다.
* * *
딸랑.
카페 문이 열리고 강우가 들어섰다. 어깨에 묻은 눈을 툭툭 털은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리 혼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이나은이 보였다.
‘와…. 어째 더 이뻐진 거 같네.’
이나은의 주변으로는 팬들도 있었다. 이나은은 특유의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강우는 입구에 서서 잠시 팬들과의 시간을 기다려 주었다.
“어? 강우야~”
잠깐의 소란이 지나가고 이나은이 강우를 발견했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에 카페 안이 밝아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이나은에게 다가갔다.
“잘 지냈어?”
“나 너무 힘들었어.”
이나은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강우의 입이 헤벌쭉해졌다. 강우가 굳이 이나은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나은이 슬쩍 얼굴을 붉히며 강우의 팔짱을 끼었다. 주변에서 ‘오오~’ 하며 작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미안해. 너무 오래 있다가 왔지?”
“아니야. 그냥 오랜만에 봐서 응석 부린 거야. 나 잘 있었어. 그리고 놀러 간 거도 아니잖아. 또 가서 계속 일만 하다 왔지?”
이나은의 말에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이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러다가 몸 상한다고 했잖아.”
“나야 뭐…. 워낙 강철 체력이라. 그보다 나은이 살 좀 빠진 거 같은데? 다이어트했어?”
강우의 질문에 이나은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연예인이 되고 나서 꿈을 이룬 이나은이였다. 하지만 바쁜 스케줄과 식단조절에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응. 나 살 많이 빠졌어.”
“아이고~ 우리 나은이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 거 아니야? 안 되겠다. 오늘은 실컷 먹자.”
“정말?!”
이나은이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하루쯤은 괜찮아. 그리고 우리 나은이는 살이 쪄도 예쁘다고. 가자.”
“좋아!”
강우와 이나은이 밖으로 나왔다. 새해가 훌쩍 지난 거리에는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가실까요?”
강우가 이나은에게 손을 쓱 내밀었다. 이나은이 입을 가리고 웃더니 강우의 손을 꽉 잡았다. 두 사람은 눈 내리는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길거리 음식을 사 먹고 돌아다녔다. 오랜만에 만난 두 연인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 * *
딸랑.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강우가 들어섰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무실을 바라보며 강우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나오는 사무실의 공기마저 아늑하게 느껴져 기분이 좋아졌다.
“어? 이사님!”
복사하러 가던 직원 한 명이 강우를 발견했다. 강우가 씩 웃으며 손을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강우의 그 말과 동시에 직원들의 시선이 강우에게로 빗발치듯 쏟아졌다.
“이사님 오셨다!”
환호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직원들이 강우를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이사님, 사장님은요?”
직원들이 아버지의 안부까지 물었다. 동양 무역의 가족 같은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잘 지내십니다. 다들 잘 지내라고 안부도 전해 주셨어요.”
아버지가 잘 있다는 말에 직원들이 다행이라며 미소 지었다. 강우가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똑똑.
“네?”
문이 열리고 마사토가 들어왔다.
“강우야, 잘 다녀왔니?”
“마사토 아저씨.”
마사토가 씩 웃으며 손짓했다.
“다들 기다리고 있어. 회의실로 가자.”
“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동양 무역을 탄탄히 해놓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