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5화 (205/402)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위진오가 회장실에 있었다. 진남규는 잠시 사무실을 둘러본다며 내려간 상태였다.

“그래, 선전 시장이랑 충칭 시장은 잘 만나고 왔고?”

“네, 잘 만나서 이야기도 잘 나누고 왔습니다.”

위진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위진오가 각 시의 시장들에게 연락해놓은 덕분에 강우는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해결했다. 선전시와 충칭시의 시장들은 강우에게 엄청나게 호의적이었다.

“그래, 두 시장이 네 칭찬을 엄청나게 하더구나. 젊은 나이에 능력이 아주 출중하다고 말이야.”

“다 양부님 덕분이죠.”

강우의 겸손함에 위진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강우의 겸손함은 겪을 때마다 늘 새롭게 느껴졌다.

“그래, 일단 내가 각 지방 정부에 도움을 요청은 해 놓았다. 이제 정식이가 정리해놓은 명단을 토대로 지원사업을 시작하면 될 거 같구나.”

“네, 그런데 저희가 찾아낸 명단에서 빠진 사람들이 있어요.”

강우의 말에 위진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가진 꽌시를 통해 그야말로 중국 전역을 뒤졌다. 취지도 좋은 일이라 각 성장급과 시장급들도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왔다.

“빠진 사람? 하긴 우리나라 인구가 너무 많기는 하지.”

위진오의 말대로였다. 중국은 넓고 인구수도 어마어마했다. 중국의 지방 그중에서도 오지에 있는 사람들은 인구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도 사람들이지만 이번에 만난 진남규 씨 가족 같은 예도 있습니다.”

강우가 위진오에게 진남규의 사연을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위진오가 탄식을 뱉어냈다.

“그랬구나. 그랬어….”

위진오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 남규 씨와 같은 가족들이 분명히 많을 거예요. 그분들도 수소문해서 꼭 도움을 드렸으면 좋겠어요.”

“알겠다. 아빠가 더 신경 써 보마.”

아버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했다.

“일단 명단을 찾은 분들의 복지 사업은 먼저 진행해 주시고요. 다들 어렵게 살고 계시던데 하루가 급할 거예요.”

“그래.”

아버지도 강우와 같은 마음이었다. 위진오가 그런 강우와 박정식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자신의 권력이 높아질수록 점점 두 사람에게 힘이 돼주겠다고 다짐했다.

“강우야, 일단 투자 건이랑 독립투사분들 지원사업은 마무리된 거 같고. 이제 네가 말한 검색엔진을 개발에 들어가면 되겠구나.”

강우가 눈을 빛냈다. 미래의 기억에 의하면 중국 시장을 장악할 검색엔진 업체는 아직 설립 이전이었다. 강우는 외국계 기업이 선점하고 있는 검색엔진 시장에 직접 뛰어들 생각이었다.

“외국계 기업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아직 시장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어요.”

몇몇 중국의 기업들이 개발에 뛰어들고 있었지만. 그 규모도 작았고, 영향력도 없는 상태였다. 약 1년 정도 후 중국의 IT 3대 강자 중 하나인 버이두가 창립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 강우 네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밀어주마.”

“감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강우는 이미 개발자들도 고용한 상태였다. 이 빌딩의 한 곳에서 이미 새로운 포털사이트 런칭을 위한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잘 지내시고?”

“네, 두 분 다 건강하십니다.”

위진오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중국을 떠난 최준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최준 역시 위진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두 분 다 뵙고 싶구나.”

하지만 할아버지와 최준은 건강을 위해 중국행에 함께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최준은 중국에 다시 돌아오는 것을 꺼렸다. 국적회복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위진오가 한국으로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의 고위 간부가 여행으로라도 한국을 방문하는 건 그림이 안 그려지니까.’

양국이 수교를 맺었다고는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아직 딱딱한 분위기인 게 사실이었다.

“두 분 모두도 양부님을 보고 싶어 하셨어요. 잘 지내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셨고요.”

“그래, 두 분이 행복하시면 그걸로 됐지.”

위진오가 이제야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는 꼭 한 번 만나기를 바라면서였다. 짧은 소회를 정리한 위진오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 이제 장춘에서 길림을 들렀다가 하얼빈으로 간다고?”

“네, 하얼빈에서 일정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위진오가 강우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스무 살인 강우였다. 위이강과 위단향을 떠올려보아도 아직은 청춘을 즐겨야 할 시기였다.

“중국에 있는 동안 바쁘게 돌아다니기만 하는구나.”

“지금 아니면 당분간은 시간이 안 나니까요.”

강우의 말에 위진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강우의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형님, 한국에서는 18세 이상이 되면 병역의무자가 됩니다.”

“아…. 그런 거군.”

강우는 이제 입영대상자였다. 이번 중국행도 서울대 총장과 두 명의 귀국 보증인을 세워야 했었다. 이미 신체검사도 끝나 1급을 판정받은 상태였다. 위진오가 이제야 강우가 서두르는 이유를 알았다.

“군대라….”

중국 역시 표면적으로는 의무병역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병제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원자가 모자랄 경우만 징병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실제로 중국의 많은 젊은이가 군대에 앞다투어 지원하기도 했다.

“군대에 가지 않을 방법은 없는 건가?”

위진오가 강우를 향해 물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편법은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히 군대를 다녀와야죠.”

“그렇군…. 참 여러모로 강우 너는 대단하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그래서 이번 중국행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끝내놓고 싶습니다.”

“그래, 그러려면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게 맞겠구나. 내가 장춘 시장이랑 길림 시장 그리고 하얼빈 시장한테도 연락해놓으마. 꼭 만나서 인사도 나누거라.”

“네, 양부님.”

강우가 감사함을 표했다. 위진오를 통해 얻어지는 중국에서의 꽌시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자 그럼 오랜만에 만났는데 우리 식사라도 같이할까?”

위진오가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와 아버지가 위진오와 함께 빌딩을 벗어났다. 빌딩의 입구에는 위진오의 세단이 대기 중이었다.

“강우야.”

세단에는 위혁오 역시 있었다. 네 남자는 근처에 있는 북경 오리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녁 늦게까지 식사를 하며 회포를 풀었다.

* * *

길림성의 주도인 장춘시. 이곳에는 중국 법인인 광복 유한주식 그룹의 종자 연구실이 있었다. 강우와 아버지는 유리창 너머로 종자 개발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명의 연구원들이 분주히 연구하고 있었다.

“이번에 한국산 금탑 종자랑 가장 비슷한 품종이 개발됐어. 이제 내년에 첫 재배를 시도하면 돼.”

“생각보다 종자 개량에 빨리 성공했네요.”

강우가 가진 미래 기억에서도 이 정도 품질을 가진 중국산 금탑 종자는 없었다.

“그래, 이제 내년에 처음 수확하는 고추들 맛이랑 상태 보고 상품화 결정을 하면 될 거 같아.”

“네, 아버지가 정말 고생하셨어요.”

아버지가 뿌듯하게 웃었다. 강우와 중국에 처음 왔을 때 품었던 계획 중 하나를 이제야 이루게 된 것이다. 강우와 아버지는 연구실을 더 둘러보았다. 아버지가 한쪽에 수북이 쌓여있는 고춧가루를 가리켰다.

“개량된 종자로 만든 고춧가루야 한번 맛을 봐봐.”

“네.”

강우가 고춧가루를 조금 찍어 혓바닥에 가져다 댔다. 중국산 고추 특유의 쓴맛은 덜하고 맵고 달콤한 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바로 한국산 금탑 종자의 특징이었다.

“오? 맛이 좋은데요?”

“그렇지?”

아들의 놀랍다는 반응에 아버지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연구 개발에 자금을 충분히 투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리고 큰아버지 덕분에 우리 종자를 심겠다는 농부들이 엄청 많아.”

최준은 길림성에서 알려진 부자였다. 그리고 사정이 힘든 농부들을 돕기로도 유명했다. 물론 농부뿐만이 아니었다. 길림성에서 최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업가가 없을 정도였다.

‘큰할아버지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거지.’

장춘시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장춘 시장 역시 최준의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농부들이 우리 종자를 이용해 본격적인 재배에 들어가면 연구에 들어갔던 투자금은 어느 정도 회수가 가능하겠네요.”

“그러겠지?”

농부들이 종자를 사 간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없었다. 한번 심기 시작한 종자를 바꾸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길림성 전체의 고추 생산량을 모두 개량된 금탑 종자로 채운다면 회사에도 큰 이윤이 남을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종자를 심어서 재배하시는 분들이 품질에 신경 쓸 수 있게 관리도 부탁드려요. 우리 회사 김치 원재료로 쓰일 예정이니까요.”

“그래그래. 걱정하지 마.”

아버지가 자신만만해했다. 강우가 아버지를 보며 든든함을 느꼈다. 이윽고 아버지와 강우가 연구실 건물 밖으로 나왔다.

부우웅.

멀리 서 있던 세단 한 대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창문이 내려가고 진남규의 활짝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고생하셨습니다! 어서 타시죠.”

진남규는 이번 여정 동안 운전을 도맡는다며 나섰다. 이번 일정에 늘어난 인원에 뭐라도 하려는 생각이었다.

탁. 탁.

강우와 아버지가 차에 타자 진남규가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겠습니다.”

세 남자의 다음 목적지는 길림시였다. 장춘시에서 길림시까지는 차량으로 약 2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차량이 한참을 달려 길림시에 도착했다.

“조양 광장은 저쪽입니다.”

진남규가 미리 익혀둔 지리를 바탕으로 운전을 했다. 이윽고 강우 일행이 길림시 대검거 사건이 있었던 옛 조양문 대동공창터에 도착했다. 이제는 커다란 광장이 되어버린 곳이었다.

“여기입니까?”

진남규가 광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 독립투사의 후예라고 하지만, 독립운동 역사에 관심이 없던 진남규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진남규에게 친할아버지는 애증의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네, 여기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강연회를 여시다가 투옥된 사건이 있었죠.”

강우가 광장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중국 곳곳에 있는 독립 유적지가 이렇게 보전되지 못한 채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는 했다.

“그렇게 의미 있는 곳이라면 기념관 같은 거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진남규의 말에 강우가 눈을 빛냈다. 강우가 중국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맞아요. 그래서 마지막 일정으로 길림성과 흑룡강성에 분포된 유적지들을 둘러보는 일정을 마지막으로 잡은 겁니다. 저는 가능한 한 모든 유적지를 사들여서 박물관이든 기념관이든 만들 생각입니다.”

“허…. 대단하십니다.”

진남규가 탄성을 뱉어냈다. 사업가 대부분이 돈을 버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점점 더 부를 쌓고 대대손손 이어가며 명예까지 획득하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강우는 달랐다.

“중국에 존재하는 독립 유적지를 모두 복원하고 원하는 모든 사람이 유적지 순례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만들 겁니다. 지나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으니까요.”

강우의 말에 진남규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자신의 뿌리를 혼란스러워하며 부정하던 자신을 향한 말인 것도 같았다. 강우를 바라보는 진남규의 가슴속 깊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어쩌면…. 내 일평생을 바칠 사람을 찾은 것일지도 모르겠어.’

진남규가 바라보는 강우에게서는 후광이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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