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203/402)

거짓 없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호텔의 최상층에 있는 라운지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강우와 진남규는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강우와 진남규의 앞에는 얼음이 띄워진 잔이 놓여있었다.

“사실 우리 집이 살 만은 했습니다. 한국으로 가신 조부와는 별도로 조모님의 집안의 재력이 어느 정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돌아가신 제 아버지께서는 참 많이 방황했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혼란스러워하시면서 말이죠. 결국, 결혼도 조선족인 제 어머니와 했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습니다.”

“그랬군요.”

강우가 묵묵히 진남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진남규의 아버지는 한국에 돌아간 아버지에게 찾아가려 했다. 아내와 어린 진남규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할아버지인 진병호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데 있었다. 가족관계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백방으로 증거를 모으고 한국에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입국을 거절당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유공자로 등록이 되어있어도 가족관계를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진남규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강우는 그런 진남규를 보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미래의 강우 역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많이 힘드셨겠군요.”

강우의 진심이 담긴 위로에 진남규의 표정이 흔들렸다. 진남규가 잔을 들어 단숨에 술을 마셨다. 살짝 인상을 찌푸린 진남규가 말을 이어갔다.

“힘들다기보다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족이 중국에서 산 세월이 얼마입니까? 솔직히 저는 한국에 대한 어떤 정이나 미련이 없었습니다. 그냥 여기서 행복하게 살면 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많이 했죠.”

“음….”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남규의 말은 당연한 생각이었다. 이미 세월이 지나도 한참이나 지났으니 말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아버지는 계속해서 한국행을 시도했습니다. 급기야 나중에는 우리 가족의 한국행을 도와주겠다며 접근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들을 믿고 소송비용은 물론 그들의 중국 체류비용까지 내셨습니다. 그렇게 점점 가세가 기울고 결국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

강우가 안타까움에 탄식을 뱉어냈다. 이제야 자신을 냉소적으로 대하던 모습이 이해됐다. 진남규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이후 어머니는 작은 식당을 하며 저를 키우셨습니다.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성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중국이 개방되면서 다른 서방 국가들처럼 크게 발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죽어라 했습니다. 졸업한 이후로 저는 어머니를 모시고 선전으로 왔습니다. 이곳이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남규가 긴 숨을 뱉어냈다. 큰 꿈을 품고 선전에 왔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진남규는 취업을 준비하며 호텔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강우를 만난 것이다.

“어머니가 부탁드린 국적회복…. 사실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어머니의 마음이 더는 다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이면 족합니다.”

진남규가 어머니를 걱정하며 말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잊지 못하고 국적회복이라는 끈을 부여잡고 있는 어머니였다. 차라리 이번 일로 그 미련이 끊어졌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강우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 없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남규가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우의 두 눈에 담긴 진실함에 얼어붙었던 마음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강우 씨는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강우가 말없이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양주의 쓴맛에 미간이 좁혀졌다. 그 모습을 본 진남규가 물었다.

“술은 별로 안 좋아하십니까?”

“아니요.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런 양주보다는 소주나 맥주를 좋아합니다.”

“그렇군요. 선전은 언제 떠나십니까?”

“사실 오늘 투자를 끝으로 일정은 끝났습니다.”

진남규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그런데 며칠 더 머물 생각입니다. 일을 마무리 짓고 가야죠.”

“.....”

진남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얼핏 듣기로도 수십억 단위를 투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업가가 자신과 어머니를 위해 시간을 낸다는 것이었다. 진남규의 마음에 점점 확신으로 가득해졌다.

‘이 사람은 다르다.’

그때, 강우가 물었다.

“혹시 전공은 어떻게 되십니까?”

“경영학과를 나왔습니다.”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남규의 전공이 자신과 같았다. 강우가 놀란 표정을 짓자 진남규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는지?”

“아…. 저도 한국에서 경영학을 전공 중입니다.”

이번에는 진남규가 놀랐다. 경영학을 전공한다는 것보다 아직 대학생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실례지만 나이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한국 나이로 20살입니다.”

진남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고작 스무 살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았다. 오늘 하루 강우의 운전기사를 하며 사업적인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강우가 투자한 액수와 대상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는 중이었다.

“대단하십니다. 그 나이에 저는….”

“아닙니다. 저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서….”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진남규가 미소를 지었다.

“중국에서는 꽌시도 능력이라고 하죠.”

“그건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진남규가 헛기침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귀인을 만나다니 저와 어머니에게 좋은 일만 생기려나 봅니다.”

“꼭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진남규가 멋쩍게 웃으며 술을 마셨다.

“제가 제안 하나 하고 싶습니다.”

강우가 심사숙고 끝에 입을 열었다.

“제안이요? 어떤….”

“이번에 선전에 지사를 하나 만들 생각입니다.”

진남규의 표정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선전에 있는 턴센트에 투자를 했기도 했고. 앞으로 선전에 투자도 계속할 생각입니다.”

“아….”

진남규가 탄성을 뱉어냈다.

“그 지사에서 같이 일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저…. 정말입니까?!”

진남규가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시선이 순간 강우와 진남규에게 쏠렸다. 진남규가 헛숨을 들이키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네, 정말입니다. 지사 설립이 끝나는 대로 바로 출근하시죠.”

“가…. 감사합니다.”

조건을 들어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진남규의 직감이 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꼭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진남규는 강우의 생각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다. 중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 정확히 맥을 짚고 미래를 내다보기도 했다. 강우는 대화를 나누며 점점 진남규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살짝 취한듯한 진남규가 꾸벅 인사를 했다. 강우도 마주 인사를 했다. 이윽고 방으로 돌아온 강우를 위혁오가 반겨 주었다.

“강우야, 우리 근처에 가서 술 한잔 어떠냐?”

“아….”

강우가 괜찮다고 하려다 멈칫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위혁오의 눈빛 때문이었다.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강우는 위혁오와 함께 호텔을 벗어났다. 그리고 밤새 즐겁게 지냈다.

* * *

다음 날 아침.

“으으….”

위혁오가 침대에서 뒹굴며 괴로워했다. 힐끗 옆 침대를 보니 강우는 보이지 않았다. 위혁오가 혀를 내둘렀다.

“강우 이 괴물 같은 놈.”

술을 잘 마신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강우는 정말 초인적인 주량을 가지고 있었다. 어젯밤 자신을 엎다시피 돌아온 것만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술이라면 자신 있는 자신이 완패를 당한 것이다.

드르륵.

그때, 화장실 문이 열리고 강우가 나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우는 멀쩡해 보였다. 얼굴에는 윤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어? 일어나셨어요?”

강우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해졌다. 위혁오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흠흠…. 내가 어제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일찍 취한 거 같은데 다음에는 어림도 없다.”

“아…. 그래요?”

강우가 씩 웃었다. 위혁오가 목이 타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아침 드실 거죠?”

“어? 아침?”

샤워를 끝내고 나온 위혁오가 움찔했다.

“가죠. 속 안 좋을 때 새우죽이 그렇게 좋다던데.”

“아~ 좋지.”

두 사람이 기분 좋게 웃으며 호텔을 벗어났다. 강우와 위혁오는 오늘도 호텔에서 차량을 받았다. 물론 안내를 맡아줄 기사는 바뀌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희 왔습니다.”

강우가 가게 안에 들어서며 반갑게 인사했다. 진남규 어머니가 반색하며 강우를 반겼다.

“사장님, 오셨어요?”

“편하게 강우라고 불러주세요.”

강우가 넉살 좋게 웃었다. 진남규 어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은인에게 어떻게 말을 편하게 하겠어요.”

“저 그럼 안 먹고 나갑니다.”

강우가 몸을 돌리는 척했다.

“아유~ 알았어요. 알았어.”

“편하게 대해 주실 거죠?”

강우가 씩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위혁오도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뭐로 줄까요?”

아직은 강우가 어려운듯한 진남규 어머니였다. 하지만 강우도 더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사람마다 관계의 거리를 좁히는 속도는 다른 법이었으니까 말이다.

“새우죽 두 개 주세요.”

진남규 어머니가 알겠다고 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인 가게에는 아직 손님은 없었다.

“맛있게 먹어요.”

뜨끈한 새우죽이 나왔다. 숙취가 남은 위혁오는 정신없이 새우죽을 먹었다. 강우가 진남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가게 일은 안 힘드세요?”

“먹고사는 일인데 힘들지는 않아요. 다만 우리 아들 뒷바라지를 못하는 게 미안할 뿐이죠.”

진남규 어머니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귀하고 잘난 아들이 남편과 자신 때문에 고생한다 생각하니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하지만 죽은 남편의 소망을 자신이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그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단 먼저 어머님을 위해 변호인단이 찾아올 겁니다. 제가 중국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돌아가신 진병호 어르신과의 가족관계를 증명해 내겠습니다. 그 뒤로 국적회복을 해 한국으로 가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가게 일은 당분간 쉬엄쉬엄하십시오. 우리 회사에서 후손들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혜택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쏟아지는 강우의 말에 진남규 어머니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몸을 떨었다. 살면서 이렇게 대접을 받고 누군가의 온정을 받아본 것이 처음이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제가 부탁이 있습니다. 제 아들 남규. 남규의 앞길을 열어 주실 수 있나요?”

강우가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진남규 어머니가 말을 이어갔다.

“앞에 말해주신 것들은 전부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어쩌면 못난 저와 남편의 욕심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 아들. 우리 아들은 다른 삶을 살게 해주고 싶어요. 그러니 부탁드려요. 사장님.”

위혁오가 수저를 내려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에 가슴 찡함을 느꼈다. 강우가 진남규 어머니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건 이번 일과 별개로 이미 아드님과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진남규 어머니가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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