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2화 (202/402)

마지막으로 한 번만 믿어보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국어를 모르는 위혁오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잠시 침묵하던 강우의 입이 열렸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면 돕겠습니다.”

강우가 오지랖이 넓다고는 하지만, 생판 남을 도와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진남규 어머니가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 가족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적회복 신청 중이에요.”

“국적회복이요?”

강우가 설마 싶었다.

“네, 제 시아버지이자 남규의 친할아버지가 조선인이셨어요. 한국 보훈처를 상대로 소송 중인데….”

강우의 머리가 망치로 얻어맞은 듯했다.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혹시 돌아가신 분이 독립투사셨습니까?”

“네, 맞아요.”

강우의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열심히 찾는다고 했지만, 강우가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중국 전역에 퍼져 있었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중국에 온 이유가 바로 어머님 같은 분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네에?”

진남규 어머니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세단을 몰고 온 진남규가 빠르게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

“엄마! 또 한국인이라고 아무나 믿지 말랬죠?!”

진남규의 어머니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미 여러 번 이런 경우가 있는 듯했다. 강우가 진남규의 불신에 찬 얼굴을 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세월이 지나 쌓여버린 오해와 불신을 풀어야 하는 것. 그것은 강우가 온전히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잠시 이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강우가 진남규 어머니를 향해 정중히 물었다. 진남규 어머니가 아들을 바라보았다. 진남규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엄마, 이 사람이 한국인이라고 쳐요. 그리고 돈이 많다고 치자고요. 그렇다고 우리를 어떻게 도와줘요?”

“남규야…. 미안해. 엄마가 급해서….”

진남규 어머니가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진남규가 강우를 보며 꾸벅 인사를 했다.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저희 가족사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을 끝낸 진남규가 차에 다시 타려 했다.

“사실 저도 독립유공자 후손입니다.”

그 말에 진남규의 몸이 얼어붙었다. 차에 타려던 것을 멈추고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어머머….”

진남규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강우가 진남규를 향해 말했다.

“점심시간이 지나면 좀 한가해지죠? 그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

강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게의 옆쪽으로 차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형님, 저쪽으로 가시죠.”

“그래.”

위혁오는 별말 없이 강우의 뜻에 따라주었다. 강우에 대한 신뢰가 깊은 위혁오였다. 두 사람은 찻집에 들어가 전통차를 시켰다.

“형님, 혹시 핸드폰 좀 쓸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위혁오가 품에서 커다란 핸드폰을 꺼내 주었다. 강우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통화가 연결됐다.

“아버지, 저예요 강우.”

-오~ 강우야, 잘 도착했니?-

“네, 지금 선전 항만에서 차 마시는 중이에요.”

-그랬구나. 아빠가 같이 못 가서 미안하다.-

아버지가 미안함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에요. 아버지는 거기서도 하실 일이 많은데요…. 아 참 아버지 그보다 혹시 이번에 찾은 명단 중에 이름 한 명만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잠깐만.-

강우가 잠시 아버지를 기다렸다.

-명단 가지고 왔다. 이름 한번 불러줘 봐.-

“여기 선전시에 사는 사람이고요. 이름은 진남규예요. 한자로는….”

강우가 진남규의 한자도 불러주었다. 아버지가 명단을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이름은 명단에 없구나.-

“그래요? 알겠어요.”

강우와 아버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날 무렵 진남규가 찻집으로 찾아왔다. 강우가 아버지와의 통화를 끝냈다.

“따라오세요.”

진남규는 여전한 말투였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죠. 형님.”

“거참….”

위혁오는 그런 진남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강우를 냉대하니 말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강우가 대단하다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니 말이다.

“엄마, 모시고 왔어요.”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가게는 텅 비어 있었다. 텅 빈 가게의 한쪽에는 진남규의 어머니가 앉아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항만을 바라보는 모습은 많이 지쳐 보였다.

“바쁘실 텐데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진남규 어머니가 강우를 보며 고마워했다. 강우가 맞은편으로 앉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차 한잔하면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아까 하던 말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국적회복 신청 중이라고 하셨죠?”

“네, 맞아요. 제 시아버지는 항일 투사셨어요.”

강우의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강우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아…. 그러셨군요.”

강우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는 엄청난 자금과 인맥을 동원해 중국 내에 있는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는 좋았다. 중국 곳곳에 흩어져있던 후손들을 많이 찾아냈다.

‘다만 항일투사분들은 많이 생존해 계시지 않았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독립투사가 해방된 조국으로 넘어갔으니 말이다. 다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강우는 눈앞의 진남규 모자가 그런 분의 후손이라 생각했다.

“사실 제가 중국에 온 이유는 사업을 위한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바로 중국에 계신 독립투사분들과 후손분들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강우의 말이 끝나자 진남규의 표정이 급변했다. 무신경하던 표정이 사라지고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런 일을 하신다고요?”

진남규 어머니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한국 정부에서 나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 보훈처에서 일하시는 분입니까?”

진남규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저는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계신 유공자분들과 후손들을 위한 사단법인을 맡고 있습니다.”

강우가 자신이 한국에서 벌이고 있는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진남규와 어머니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설명을 마무리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찾는다고 찾았는데 이렇게 빠지는 분들이 계실 줄 몰랐습니다. 진작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진남규 어머니가 눈시울을 붉혔다.

“아니에요. 그건 사장님 잘못이 아니에요.”

어머니가 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자 진남규가 말을 이어갔다.

“저의 조부님은 진병호라는 성함을 쓰십니다. 조선에서 만주로 넘어와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해방이 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강우의 두통이 더 심해졌다. 강우가 살짝 심호흡해 통증을 몰아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그때 왜 같이 가시지 않았습니까?”

진남규가 살짝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같이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 친할머니께서는 중국분이십니다.”

“아….”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지금의 상황이 모두 이해가 됐다. 그 당시 중국으로 넘어온 독립투사들은 가족과 생이별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중국 여인을 만나 다시 가정을 차리기도 했었다. 해방되고 독립투사들은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갔다.

‘헤어지며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있었겠지.’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공산화된 중국에 남은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리고 올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독립투사 당사자가 죽었다. 중국에 남은 가족들은 한국을 상대로 국적회복 신청을 하며 유가족으로 인정해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한국 보훈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이유로 거절하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한국 보훈처의 입장도 이해는 된다.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으니까.’

세월이 너무 지나 가족임을 증명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강우가 생각을 정리하고 진남규를 바라보았다. 정말 후손이 맞는지 강우도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무턱대고 후손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모두 도와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혹시…. 친조부님에 대한 자료가 남아있을까요?”

“정말이십니까?”

진남규가 망설이듯 물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했다.

“네, 약속드립니다.”

“......”

강우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진남규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그동안 도와주겠다며 말만 하던 많은 사람이 있었다. 진남규는 그런 사람들에게 속고 실망하며 점점 냉소적으로 되어갔다. 그런 이유로 오늘 강우에게도 조금 냉정하게 군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믿어보겠습니다.”

진남규의 말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믿어보세요. 이번에는 절대 실망할 일 없을 겁니다.”

진남규 어머니가 왈칵 눈물을 흘렸다. 강우를 보고 있으니 정말 이루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남규가 어머니를 위로했다.

“엄마, 울지 마.”

진남규의 목소리는 어느덧 어머니를 걱정하는 아들로 돌아와 있었다. 어쩌면 가슴 깊이 쌓여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순간일지도 몰랐다. 강우는 그런 두 모자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중국에 온 진짜 목적. 그걸 잊지 말자.’

물론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도움의 손길이라고 생각했다.

* * *

스르륵.

늦은 밤. 고급 세단이 호텔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강우와 위혁오가 내렸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강우가 운전석에 있는 진남규를 향해 말했다. 진남규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덕분에 오늘 하루 외근 같은 느낌도 들고 좋았습니다. 좋은 것도 많이 먹고요.”

“아…. 그런가요?”

강우와 진남규가 동시에 씩 웃었다. 이윽고 진남규는 세단을 주차하러 떠났다.

“우리도 그만 올라가서 쉬자.”

“네, 형님.”

강우는 저녁 미팅까지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 강우는 미래에 중국 게임 시장을 장악할 회사에 투자를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항만에서 만난 이유는 창업자의 아버지가 항만 관리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오늘 투자가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야. 그쪽 창업자가 그렇게 사람 만나는 걸 꺼린다던데.”

“그래서 그쪽 아버지랑 같이 만난 거잖아요. 다행히 투자를 받아들이겠다고 해서 다행이죠.”

강우와 위혁오가 대화를 나누며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지배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오늘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고요?”

“없었습니다. 진남규 직원이 아주 잘해주었습니다.”

강우의 말에 호텔 지배인이 환하게 웃었다.

“다행입니다. 사실 진 직원이 한국말도 하고 영어도 하고 해서 특별히 제가 사장님을 모시라고 했었습니다.”

“아…. 그래요?”

강우가 살짝 놀라며 답했다. 강우가 호기심을 보이자 호텔 지배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 그 친구가 대학도 아주 좋은 곳을 나왔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어디죠? 북경대?”

위혁오가 크게 관심을 드러내며 자신의 모교를 언급했다.

“아닙니다. 청화대를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학과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뭐라고 하더라?”

“괜찮습니다. 따로 물어보겠습니다.”

위혁오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강우도 새삼 놀랐다. 어려운 환경에서 중국 명문대 중 한 곳인 청화대를 졸업했다고 했다.

“아! 제가 너무 두 분을 붙잡고 있었군요. 빨리 올라가서 쉬십시오.”

호텔 지배인이 꾸벅 인사를 했다. 강우와 위혁오가 숙소로 올라갔다. 그리고 간단히 샤워하며 휴식을 취했다.

똑똑.

“누구세요?”

노크 소리에 강우가 문을 향해 다가갔다.

“진남규입니다.”

“네, 잠시만요.”

강우가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진남규가 문 앞에 있었다. 두 손에는 두툼한 서류 봉투가 들려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남규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부탁드립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강우가 서류 봉투를 받았다. 그리고 안쪽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먼저 흑백사진이 보였다. 생전에 진병호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순간,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그리고 진병호의 일생이 마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강우가 씩 웃었다. 진남규는 독립투사의 후손이 확실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