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200/402)
  • 제 조건은 이게 끝입니다.

    다음 날. 강우가 아파트를 나섰다. 그러자 멀리서 차 한 대가 스르륵 다가왔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차량을 바라보았다. 강우 앞에 도착한 차량 문이 열리고 반가운 인물이 나왔다.

    “강우야!”

    “어? 혁오 형님? 어떻게 오셨어요?”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위혁오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내렸다. 위혁오가 강우에게 다가와 반갑게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어떻게 오기는 너 왔다고 해서 얼굴도 볼 겸 오늘 종일 같이 다니려고 왔지.”

    “요새 바쁘시다면서요.”

    위혁오는 현재 당에 입당한 상태였다. 위진오의 당내 힘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 위혁오가 오늘은 강우를 위해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아무리 바빠도 너는 내가 챙기고 싶어서.”

    “감사합니다.”

    강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위혁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는 운전석에 탔다. 강우는 조수석에 탔다.

    “일단 호텔로 가면 되지?”

    “네.”

    강우의 오늘 첫 일정은 투자하기로 한 회사들의 창업자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차량은 아파트를 떠나 북경 중심부의 호텔에 도착했다.

    “형님도 같이 들어가세요.”

    “그럴까?”

    강우와 위혁오가 호텔로 들어가 약속 장소로 향했다. 호텔 안에 있는 레스토랑이 약속장소였다. 강우가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혹시 예약하셨습니까?”

    “네, 12시 위진오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위진오라는 이름이 나오자 직원이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강우를 대하기 시작했다. 위진오의 위세가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예약석에 다가가자 상대방이 먼저 와있었다. 삐쩍 마른 모습을 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재식이랑 너무 느낌이 비슷하네.’

    물론 남재식이 더 깔끔한 인상이기는 했다. 강우가 다가오자 상대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를 보고는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안녕하십니까? 마원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이 영어로 인사를 해왔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유창한 중국어를 뱉어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박강우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원 사장님.”

    삐쩍 마른 마원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중국어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우와 인사가 끝나자 위혁오가 손을 내밀었다.

    “위혁오입니다. 반갑습니다.”

    “마원입니다.”

    마원은 위혁오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그럼 준비되는 대로 부탁합니다.”

    위혁오의 말에 직원이 알겠다고 공손히 답하고는 사라졌다. 오늘은 예약된 요리가 나올 예정이었다. 강우가 마원을 바라보았다. 미래의 기억으로 알고 있는 중국 최고의 부자를 이렇게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원은 급하게 투자자를 찾고 있는 창업자에 불과했다.

    “제 생각보다 나이가 어리시군요.”

    “그렇습니까?”

    마원의 얼굴에는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다. 갑자기 투자하겠다고 나서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자신의 회사를 알고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먼저 식사 전에 이야기를 끝내고 싶습니다.”

    마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강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미래의 기억에도 마원의 스타일은 이렇다고 알려져 있었다.

    “말씀하시죠.”

    “우리 회사에 얼마를 투자하실 수 있습니까?”

    위혁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마원이 강우를 조금 불신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럴만했다. 마원은 이미 투자를 하겠다며 다가오는 사기꾼도 많이 겪었다. 눈앞에 투자자라고 나선 강우가 너무 어려 보이니 또 사기인가 싶었다.

    “지금 내 동생을 무시하는 건가? 그건 우리 위씨가문을 모욕하는 것과 다름없다.”

    “아…. 아닙니다!”

    마원이 살짝 몸을 떨었다. 베이징 중앙당의 실력자로 떠오르는 위진오와 강우가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없었다.

    “강우는 위진오 님의 양자이다.”

    “죄…. 죄송합니다.”

    마원이 급하게 사과를 해왔다. 이미 당과 여러 차례 일을 같이했던 마원이었다. 미약하지만 당에 조금의 꽌시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나타난 강우의 배경은 그 급이 달랐다.

    “아닙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투자하겠다고 하니 못 미더울 만하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강우가 씩 웃으며 가지고 온 서류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중국어로 깔끔히 정리한 투자 계획서를 내밀었다. 마원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투자 계획서라 하면 보통 투자를 받는 회사가 준비하는 것이었다. 투자자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사라락. 사라락.

    마원이 강우가 내민 계획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지금 마원이 준비하고 있는 사업의 구상과 미래 그리고 투자금과 향후 운영 방향까지 적혀있었다.

    “맙소사….”

    마원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계획서에 적힌 내용은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했다.

    “중소기업을 위한 전자상거래에 대한 구상은 나만 하는 줄 알았는데….”

    “한국도 IT에 큰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같은 사업을 준비 중입니다.”

    강우의 말에 마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 국경은 무의미해진다. 눈앞에 아이디어와 자금까지 있는 경쟁자가 나타났나 싶었다.

    “그렇다면 우리 회사에 투자하시는 이유가….”

    “아…. 한국은 한국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사업을 진행할 겁니다. 중국 내수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자국 회사가 좋지 않겠습니까?”

    마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마원이 다시 계획서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적힌 투자금의 액수에 또 경악했다.

    “천…. 천만 달러….”

    현재 위안화 환율로 따진다며 팔천만 위안에 다다르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베이징에 있는 아파트 가격이 20만 위안을 조금 웃도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마원이 급하게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큰 금액을 한 번에 투자하신단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마원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거액을 투자하는 만큼 얼마만큼의 지분을 요구할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내심 기분이 좋은 것도 사실이었다.

    ‘이 정도 첫 투자라면 다른 곳에서 투자를 유치하기에도 좋지.’

    돈이 돈을 부르는 원리였다. 거액의 투자를 받은 것이 알려진다면 다른 사람들도 관심을 드러낼 것이었다. 실패는 생각하지 않았다. 마원은 자신이 벌이는 사업에 자신감이 있었다. 완벽한 미개척지나 다름없는 중국 시장을 손에 넣을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분이….”

    “마원 사장님의 경영을 좌지우지할 생각도 없습니다. 딱 지분의 20%만 가져가겠습니다.”

    마원의 멍한 표정을 지었다. 천만 달러라는 큰 금액을 투자하면서 적절한 지분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았다.

    “저…. 정말이십니까?”

    “네, 저는 다른 곳에도 투자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 기업의 경영철학을 간섭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금이 부족하다면 추가 투자할 생각도 있습니다.”

    마원이 감탄성을 뱉어냈다. 그리고 투자 계획서와 강우를 바라보며 설레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다만, 약속 하나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씀하시죠.”

    “갑자기 자금이 늘어났다고 해서 다른 사업에까지 일을 벌이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사업에 집중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마원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럴 이유도 마음도 없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제 조건은 이게 끝입니다.”

    마원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 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미국이나 다른 나라를 다니며 인터넷 문화를 맛본 마원이었다. 큰 포부를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여러 번의 고배를 마시고 다시 시작한 지금의 회사였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자금이 부족해 임금이 밀리고 사업 진행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저는 미래에 투자합니다. 지금 당장 어떤 결과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차분히 하시던 대로 사업을 진행해 주세요.”

    “허….”

    마원이 탄성을 뱉어냈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강우의 모습이 너무나도 커 보였다. 이제는 나이가 어리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럼 투자는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네, 잘 부탁드립니다.”

    강우가 씩 웃으며 미리 준비해온 계약서를 꺼냈다. 영어와 중국어 버전으로 작성해온 계약서였다. 마원이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회사의 명운이 달린 계약서이니 자세히 볼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십니다. 내용이 정말 꼼꼼합니다.”

    “지금 당장 사인을 하라는 건 아닙니다. 돌아가서 더 꼼꼼히 살피시고 연락해 주십시오.”

    강우가 중국 법인 명함을 꺼내 건넸다. 마원이 소중히 명함을 받았다. 마침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서양식 레스토랑인 만큼 코스요리였다. 전채요리가 먼저 나왔다.

    “캐비어입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캐비어를 먹었다. 이윽고 메인요리로 잘 구워진 스테이크가 나왔다. 세 남자가 말없이 칼질을 시작했다.

    “그런데 박 사장님은 몇 살이십니까?”

    “이제 열아홉입니다.”

    마원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면 한국 나이로는 스무 살이시군요.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젊은 분이 벌써 이런 사업 감각이 있으시다니요.”

    그리고 ‘돈도요.’라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서 운이 좋았습니다.”

    “운을 얻는 건 하늘이 주지만 어떻게 이용하냐는 사람이 정하는 거죠.”

    마원이 씩 웃었다. 마치 자신의 회사에 투자하는 게 잘하는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강우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초라해 보이지만 미래를 알기 때문이었다.

    “사업 이야기를 다 마무리해서 다행입니다.”

    강우의 부드러운 말에 마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자금 부족으로 매우 힘들던 상황입니다. 이렇게 귀한 분을 만나니 앞으로 제 사업이 크게 될 거 같습니다.”

    “꼭 그러실 겁니다.”

    마원이 강우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저 여유로움과 확신에 찬 모습이 부러웠다. 지금 눈앞에 나타난 강우는 마원에게 귀인 그 자체였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식사가 이어졌다. 고민을 털어낸 마원은 정말이지 잘 먹었다.

    ‘재식이랑 다른 점은 잘 먹는다는 건가?’

    강우가 남재식을 떠올리며 픽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슬쩍 물었다.

    “마원 씨는 술 좋아하십니까?”

    “술이요? 아닙니다. 제가 평소에 태극권을 좀 하는데 술은 수련에 방해가 되죠. 그래서 잘 안 마시는 편입니다.”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술을 싫어하는 것까지 비슷했다.

    ‘뭐지….’

    마원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언제 한번 시간이 되시면 태극권 수련 모임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아…. 태극권이요?”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마원이 점점 열의에 차서 태극권의 효능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강우는 짐짓 놀라는 척 또 감탄하는척하며 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났다.

    “꼭 찾아와 주십시오. 준비해 놓고 있겠습니다.”

    “네, 시간을 내서 찾아가겠습니다. 계약도 마무리해야 하니까요.”

    마원이 강우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강우가 마주 웃으며 만족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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