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198/402)
  • 아빠 보러 가는 날.

    벌컥.

    문이 열리고 강용이가 후다닥 달려 나왔다. 잔뜩 상기된 표정의 강용이가 베란다를 향해 달려갔다.

    “눈이다아아!”

    유난히 눈을 좋아하는 강용이가 베란다 창밖을 보며 눈을 빛냈다. 아파트 단지를 하얗게 뒤덮은 풍경을 눈에 담으며 강용이가 생각에 잠겼다.

    “하아~”

    강용이가 베란다 창문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창문에 뿌연 김이 서리자 강용이가 작은 손가락을 들어 열심히 무언가를 썼다.

    -아빠 보러 가는 날.-

    창가에 쓴 글씨를 본 강용이가 씩 웃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김이 서려 글씨가 흐릿해졌다. 강용이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몸을 돌려, 바로 달려갔다.

    “형아! 빨리빨리!”

    강용이의 재촉에 방에서 여행 가방을 싸던 강우가 픽 웃었다. 강용이의 여행 가방까지 싸주느라 손이 너무 바빴다.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봐.”

    “응!”

    강용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실 여행 가방을 강용이가 먼저 싸놓기는 했었다. 다만 오늘 아침 강우가 열어보니 제대로 정리가 돼 있지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가지런히 정리해주는 중이었다. 강용이는 그런 강우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형아가 짱이지.”

    “하여간.”

    강우가 픽 웃으며 짐을 마저 정리했다. 그때, 거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준비 아직이야?”

    강우가 여행 가방 정리를 끝냈다.

    “지금 끝났어요!”

    강우와 강용이가 여행 가방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오늘따라 유독 아름다운 어머니가 있었다. 롱코트를 입은 어머니는 마치 모델 같았다. 오랜만에 만날 아버지를 위해 신경을 잔뜩 쓰신 듯했다.

    “우아~ 우리 엄마 이쁘다.”

    강용이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새로운가 보다. 쪼르르 달려가 어머니의 치마에 매달렸다. 어머니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용아, 아빠 보러 가는 게 그렇게 좋아?”

    “응! 너무 좋아.”

    강우가 흐뭇하게 웃으며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직 비행기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강우가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누구냐?”

    “할아버지, 저예요.”

    “강우구나 들어오거라.”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아버지는 신문을 읽고 계셨다.

    “할아버지, 저희 준비됐어요.”

    “그래?”

    할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네, 저희 없는 동안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형님도 있고. 강우 네가 가사도우미도 불러줬잖니. 또 말숙이가 가끔 들른다고 했으니까 괜찮다.”

    사실 강우는 할아버지와 최준을 같이 모시고 가려 했다. 하지만 두 분은 한국에 남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강우는 할아버지와 최준을 위해 이재원이 추천해준 가사도우미를 고용했다. 그리고 소식을 들은 김말숙이 가끔 찾아와 챙긴다고 했으니 걱정은 없었다.

    “그래도 같이 가면 좋았을 텐데요.”

    “아니야. 이번에는 셋이 가서 아범이랑 오붓하게 있다가 오거라.”

    “네, 할아버지.”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 할아버지 방을 나왔다. 그리고 최준의 방을 노크했다.

    “강우구나?”

    최준은 혼자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할아버지를 이기겠다며 바둑에 빠져계신 요즘이었다. 강우가 최준을 위해 바둑 개인 교사를 고용해 주었을 정도였다.

    “바둑 두고 계셨어요?”

    “어제 재봉이랑 둔 대국 복기 중이었지. 그 사람 언제 한 번 이겨보나.”

    강우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최준이 강우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강우 너도 네 할아비 편이지?”

    “네? 아…. 아닙니다. 저는 중립으로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정말 친손자와 친할아버지인 것처럼 친근했다. 최준이 강우를 향해 말했다.

    “잠깐 와서 앉아라.”

    “네, 할아버지.”

    강우가 최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최준이 돋보기안경을 벗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야, 마음 편하게 여행을 가는 거면 좋겠는데 말이다.”

    “아닙니다.”

    강우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이번 중국행에는 중요한 목적도 있었다.

    “아범이 그렇게 빨리 사람들을 찾아낼 줄 몰랐는데 말이다.”

    “아버지가 진짜 노력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는 중국에서 일당백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사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중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아직 모든 사람을 찾아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사람들의 뜻을 최대한 존중해 주어라. 나랑은 다르게 이미 중국에 가족들도 있을 테니 말이야.”

    “네, 그분들이 원하시는 대로 할게요. 걱정하지 말고 맡겨주세요.”

    “그래, 고맙다.”

    이미 세월이 흐를 때로 흐를 상태였다. 중국에 뿌리내린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의 상황은 최준과는 달랐다. 최준에게는 강우 가족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다녀올 동안 건강 잘 챙기시고요.”

    “그래, 걱정하지 말아라.””

    “네, 할아버지.”

    강우가 인사를 마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긴 숨을 뱉어냈다. 이번 중국행은 정말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형아! 빨리 가자!”

    강용이는 벌써 현관에서 나갈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와 최준의 방에 인사하러 들어갔다.

    “가자.”

    인사를 끝낸 어머니가 현관을 나섰다. 강용이는 대번에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버튼을 누른 강용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했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강용이와 어머니가 먼저 탔다. 강우가 커다란 여행 가방을 번쩍 들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닫혀있는 집 문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부우웅.

    강우를 태운 택시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베란다에서 강우와 가족이 탄 택시를 바라보았다.

    “형님, 강우가 잘하고 오겠죠?”

    “그럼, 누구 손자인데….”

    할아버지와 최준이 멀어져 가는 택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벌써 가족들이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늙어서 주책이죠?”

    “원래 늙으면 약해지는 법이지.”

    “그러게요. 형님.”

    최준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하루오랑 기무라는 바쁘려나?”

    “형님,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씩 웃었다.

    * * *

    시끌벅적한 북경 공항에 강우와 어머니 그리고 강용이가 나타났다. 어머니와 강용이는 익숙한 듯 걸음을 옮겼다. 강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빠아아!”

    그때, 강용이가 화들짝 놀라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멀리 아버지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후다닥 달려간 강용이가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아버지가 강용이를 번쩍 들어 얼굴에 마구 비볐다.

    “우리 막내!”

    “으악! 아빠 따가워!”

    면도하지 않은 아버지의 까칠한 수염에 강용이가 웃음을 터트리며 즐거워했다. 강우와 어머니가 그런 강용이를 보며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여보, 오는 데 안 불편했어?”

    아버지가 강용이를 한쪽 팔에 안은 채 물었다.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이렇게 든든한 아들들이랑 왔는데 불편한 게 있었겠어요?”

    “그렇지?”

    아버지도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강우와 아버지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새 마른듯한 아버지의 모습에 강우의 코끝이 찡해졌다. 가족을 위해 먼 타지 생활도 마다하지 않는 가장의 모습이었다.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말랐어? 난 잘 모르겠는데….”

    아버지가 멋쩍게 웃었다. 아들과 가족에게 고생한 티를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머니가 여행용 가방을 툭툭 쳤다.

    “중국 음식 너무 기름져서 안 맞았죠? 내가 반찬 좀 싸 왔어요.”

    “정말?? 빨리 숙소로 가자고.”

    아버지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밑반찬에 벌써 군침이 돌았다. 강우 가족은 공항을 벗어났다. 밖으로 나가니 중국 현지 법인 직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인사해. 우리 아들 강우랑 강용이.”

    어머니는 이미 몇 번 방문해 직원과 안면이 있었다. 강우가 유창한 중국어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박강우입니다.”

    강용이는 서툰 중국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강용이입니다.”

    중국 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자. 일단 타.”

    강우 가족이 승합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숙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넓은 중국 곳곳을 정말이지 바쁘게 돌아다녔다. 투자 문제도 있었고,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을 찾아야 하는 이유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북경에 숙소가 한 곳. 중경에 숙소가 한 곳 마지막으로 길림성에 숙소가 있었다. 최준의 투자금으로 세워진 중국 법인은 북경에 본사를 두고 있었고, 길림성에는 종자 연구소와 대규모 고추 농장이 있었다.

    부우웅.

    승합차는 달리고 달려 북경 시내에 도착했다.

    “저기가 아빠 숙소.”

    아버지가 한쪽에 있는 아파트 단지를 가리켰다. 중국은 90년대 중반 전까지는 개인의 주택 거래를 금지했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이 넘어가며 주택 거래를 허용했다. 아버지가 사놓은 이 아파트 역시 그렇게 구매한 것이었다.

    “우와!! 저기가 아빠 집이에요?”

    “그래, 우리 가족 중국집이지.”

    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가족과 함께하니 무얼 해도 좋았다. 이윽고 승합차가 아파트 앞에 멈춰 섰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강우 가족이 차에서 내렸다. 아버지가 직원에게 수고했다며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 승합차가 떠나가고 강우 가족이 집에 들어섰다. 한국 집처럼 커다란 평수는 아니었지만, 잘 꾸며진 집이었다.

    “아빠, 내 방은?”

    “강용이 방?”

    아버지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방까지 꾸며 놓을 생각은 하지 못했나 보다. 강우가 픽 웃으며 강용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어차피 형이랑 잘 거면서.”

    “헤헤…….”

    강용이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어머니는 도착하자마자 익숙하게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여행 가방을 꺼내 가지고 온 반찬을 정리했다. 강용이가 그새 어머니를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엄마, 내가 할래!”

    “그래, 안 떨어트리게 조심하고.”

    어머니와 강용이가 짐 정리를 했다.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며 행복해했다. 혼자 지내던 집 안이 꽉 차는 기분을 느꼈다. 아버지가 강우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서재로 꾸며진 방으로 갔다.

    “여기는 아빠가 일하는 공간.”

    “진짜 잘 꾸며졌네요.”

    강우가 쓱 서재를 둘러보았다. 한쪽에 수북이 쌓여있는 서류들을 보니 아버지가 얼마나 바쁜지 실감할 수 있었다.

    “앉자.”

    “네.”

    강우와 아버지가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아버지가 다시 일어나 책상에서 서류 뭉치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강우를 향해 내밀었다.

    “이건 강우 네가 부탁한 투자처들에 투자한 내용이야.”

    강우가 서류를 받아 읽었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래에 중국 시장을 주름잡을 기업들에 투자를 성공한 것이다.

    ‘이건 나중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겠지.’

    아버지가 이번에는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강우를 바라보는 아버지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일단 이게 이번에 아빠가 찾아낸 명단이다.”

    “네.”

    강우가 서류를 받았다. 그리고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중국에 남은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의 명단이 있었다.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일을 진행하려면 서둘러야 할 거 같아.”

    “네….”

    강우가 서류를 보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최준의 당부를 떠올렸다.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방학이 끝나기 전 강우는 중국에 산적한 일들을 모두 해결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강우와 아버지는 한참이나 서재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밥 먹어요!”

    그때, 마치 한국에 있는 것처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드디어 어머니가 만들어 준 집밥을 먹을 생각 때문이었다.

    “가자 강우야.”

    “네.”

    강우와 아버지가 서재를 나왔다. 그리고는 탄성을 뱉어냈다. 국경을 넘어서도 어머니의 진수성찬은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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