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화 (197/402)
  • 그런데 우리 오늘은 뭐 하냐?

    딸랑.

    카페 문을 열고 강우와 이나은이 들어섰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대번에 시선이 쏠렸다. 사람들은 이제 강우는 물론 이나은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 강우야!”

    한쪽에서 이재원이 강우를 크게 불렀다. 일부러 저러나 싶은 강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이나은과 함께 이재원에게 다가갔다. 이재원의 옆에는 미나가 앉아있었다.

    “한국어 공부는 잘했어?”

    이나은이 미나에게 물었다. 미나가 싱긋 웃었다.

    “네, 언니.”

    그리고는 이재원을 슬쩍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이나은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원 오빠가 잘 가르쳐 주지?”

    “네, 재원 오빠 친절해요.”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에게 친절한 이재원이라니.

    “뭐? 뭐?”

    이재원이 강우를 향해 과장되게 말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이재원과 미나는 서로 언어를 가르쳐 주며 자주 만나고 있었다.

    “아, 미나야. 이번에 학교는?”

    강우가 유창한 일본어로 미나에게 물었다. 미나는 외국인 전형으로 이번 대학 입시에 지원한 상태였다. 학교는 신촌에 있는 Y 대학이었다.

    “결과는 아직 안 나왔어요.”

    “그래? 꼭 붙을 거야 걱정하지 마.”

    미나는 일본에서도 성적이 아주 좋았다. 그리고 중요한 한국어 능력 평가도 합격한 상태였다. 강우와 미나가 일본어로 대화하자 이재원이 투덜댔다.

    “둘이 또 일본어로 말한다.”

    “형도 얼추 알아듣잖아요.”

    “그냥 한국어 하자 한국어.”

    미나가 킥하고 웃으며 한국어로 답했다.

    “네, 재원 오빠.”

    “어….”

    이재원이 그런 미나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정신을 차리고 강우를 바라보았다.

    “촬영은?”

    “하아…. 잘했죠.”

    강우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재원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너 카메오 출연한 거 조만간 기사 나갈 거야.”

    “내가 하지 말랬죠?”

    강우가 발끈하자 이재원이 손을 휘휘 저었다.

    “어허! 우리가 투자한 영화인데 대박 나면 좋잖아. 기사 나간다? 오케이?”

    “하아….”

    강우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영화 개봉일에 맞춰 강우의 카메오 출연을 기사화할 예정이었다. 전국민적으로 인기가 있는 강우의 기사라면 영화 화제 몰이에 효과 만점일 것이었다.

    “그리고 권창식 배우는 조만간 계약 마무리하기로 했다.”

    “정말요? 어떻게요?”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있다고 했었다.

    “망했다. 그 회사.”

    “아….”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IMF로 인해 어려워진 것은 경제뿐만이 아니었다. 문화 예술계도 요즘 날씨만큼이나 차가운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투자가 끊겨 촬영을 멈춘 영화가 한두 개가 아니었고, 연예 기획사가 하루아침에 망해버리기도 했다.

    “이게 잘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대우 잘해주세요. 앞으로 기대되는 배우님이거든요.”

    “걱정하지 마라. 우리 회사 영입조건 알잖냐.”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진 엔터테인먼트는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연예인들을 영입하고 있었다. 모두 강우가 정리해준 리스트대로였다. 강우는 미래에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영입할 생각이었다. 물론 각자 계약이 남아있었기에 장기적 프로젝트였다.

    “한승규 배우는요?”

    “음…. 한승규 배우는 조금 문제가 복잡해. 그 소속사를 가족들이 운영하고 있더라고.”

    강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래, 한승규 배우가 고민해 본다고는 했으니까 기다려 보자.”

    “잘됐네요. 영화 개봉은 내년이죠?”

    “어, 설날쯤 해서 개봉할 생각이야. 그쯤 되면 우리 상영관 숫자도 충분히 확보되어 있을 거니까.”

    SJ 그룹과 대진 그룹은 경쟁적으로 상영관을 늘려가고 있었다. 문화 산업 장악을 위한 두 대기업의 싸움의 서막이 열리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강우는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정보력에서 앞서는 나를 이길 수는 없지.’

    그때, 이재원이 주문해 놓은 오렌지 주스가 나왔다.

    “강우 너 중국 언제 간다고?”

    “크리스마스 끝나고요.”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는 아버지를 만나러 중국행을 앞두고 있었다. 한국 쪽 일이 안정되어 시간이 났다.

    “회사는?”

    “마사토 이사님이 있으니까요.”

    “하긴 마사토 아저씨가 일 하나는 엄청 잘하시지.”

    이재원이 마사토를 떠올리며 씩 웃었다. 마사토는 빠르게 한국 회사에 적응했다. 이제는 동양 무역의 업무를 대부분 처리할 정도였다. 그러자 강우에게 더 시간이 났다. 마사토 덕분에 이사진을 더 뽑아야 하는 걱정도 사라졌다.

    “동양 무역은 그렇다 치고 대진이 걱정이다. 너 없으면 앞이 캄캄하다고.”

    이재원이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엄살 부리지 말아요. 대진에 얼마나 유능한 인재들이 많은데.”

    “그 인재들을 제대로 끌어줄 네가 없는 게 문제라는 거지.”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이재원은 엄살을 부리는 게 맞았다. 대진 그룹이 추진하는 모든 사업은 날개가 돋친 듯 고공행진 중이었다. 마지막 골칫덩어리이던 대진 건설마저 회생시켜놓은 상태였다.

    “그룹은 알아서 잘 돌아갈 거고. 형은 특별히 재단 일에 신경 써 주세요. 이제 곧 신청자들 받아서 주택 공급사업 시작할 거니까요.”

    대진 건설이 가지고 있던 미분양 아파트와 주택을 모두 해결한 것이다. 이제 서울시 개발공사와 함께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줄 일만 남아있었다.

    “알겠어. 그렇지 않아도 언론의 관심이 크다. 이번 일이 전례가 없는 일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시선이 쏠려있어.”

    “그러니까 더 실수 없이 그리고 잡음 안 생기게 형이 신경 써야 해요.”

    강우의 당부에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이재원을 격려했다.

    “형이 나 없는 동안 조금 더 고생하면 되겠네요.”

    “그래야지 뭐.”

    이재원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맞다. 그럼 할아버님들은?”

    “한국에 계실 거예요.”

    이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니도 중국 가신다며?”

    “네, 같이 가요. 강용이도요.”

    이재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어머니도 중국에 같이 가니 두 분 할아버지의 생활을 누가 돌봐주나 싶었다. 하지만 이내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그러면 너 올 때까지 두 분은 내가 책임질게.”

    “형이요?”

    강우가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이재원이 멋들어진 미소를 지었다.

    “어, 내가 잘 아는 이모님 있어. 그분한테 가서 청소랑 빨래랑 할아버지들 밥도 해드리라고 할게.”

    “아…. 그래도 되나요?”

    강우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어차피 회장님 집에서 일하시다가 쉬고 계시는 중인데 잠깐이니까.”

    “그럼 섭섭하지 않게 챙겨드릴게요. 잘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오케이. 나만 믿으라고.”

    이재원의 말에 강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두 분 할아버지가 남는다고 해도 걱정이 없었다. 이재원이 수시로 드나들게 분명했다. 이재원이 남은 음료를 쭉 마시더니 말했다.

    “그런데 우리 오늘은 뭐 하냐?”

    이재원이 물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배고프죠? 일단 나가서 맛있는 거 먹죠?”

    “오케이. 가자 내가 아는 맛있는 식당이 있다.”

    네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으로 나왔다. 조금은 썰렁하기까지 한 거리 분위기였다. 경기침체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분위기마저 바꾸어 놓았다. 네 사람이 택시를 잡아탔다.

    * * *

    “......”

    이재원이 멍한 표정으로 닫힌 가게 문을 바라보았다. 가게의 입구에는 ‘오늘만 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 사장님도 커플인가 보네.”

    강우가 이재원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이재원이 미나를 힐끗 보더니 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럼 내가 가고 싶은 데가 있긴 한데. 거기 갈래요?”

    강우의 제안에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환하게 웃었다.

    “그래? 어디 갈 건데?”

    “음…. 빈대떡?”

    강우의 말에 이나은이 좋다며 손뼉을 쳤다.

    “오빠, 거기 빈대떡 정말 맛있어요.”

    “그래? 너희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궁금해지는데?”

    이재원이 미나를 바라보았다.

    “미나야, 빈대떡 먹으러 가자.”

    “빈대떡이요?”

    아직은 한국 음식에 대해 다양하게 알지 못하는 미나였다. 강우가 미나에게 음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좋아요. 맛있을 거 같아요.”

    마침 이재원이 오자고 한 곳도 종로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네 사람은 걸어서 피맛골로 향했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김말숙이 혼자 앉아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할머니, 저희 왔어요.”

    강우의 목소리에 자리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김말숙이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아유~ 이게 누구야? 우리 강우랑 나은이 왔어?”

    김말숙이 이번에는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재원 군이죠?”

    “어? 저를 아세요?”

    이재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요, 우리 강우가 올 때마다 자랑하던 형인데요. 그리고 텔레비전에서도 여러 번 봤어요.”

    “아…. 그러셨군요.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한 이재원이 강우를 보며 픽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김말숙에게 말했다.

    “그럼 저도 강우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그럴까요?”

    김말숙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이재원이 기분이 좋아짐을 느꼈다.

    “일단 앉아요. 할머니 저희 매일 먹던 거로 주세요.”

    “그래, 오늘 특별한 날이니까 내가 더 신경 써서 만들어 줄게.”

    잠시 후. 김말숙이 정성 들여 만든 빈대떡이 나왔다. 강우가 접시를 받으며 김말숙에게 물었다.

    “할머니, 식사하셨어요? 안 드셨으면 저희랑 같이 먹어요.”

    “아니야. 넷이 오붓하게 먹어.”

    강우가 김말숙의 손을 잡았다. 가게에 들어올 때 보았던 쓸쓸한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괜찮아요. 저희야 매일 뭉치는걸요? 같이 드세요.”

    “맞아요. 같이 드세요.”

    이나은도 강우를 거들었다. 이재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옆에 있던 의자 하나를 가져와 김말숙의 아래에 놓았다.

    “같이 드세요. 원래 이런 날에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아요.”

    “아휴 참….”

    김말숙이 이내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미나가 재빠르게 김말숙의 잔에 막걸리를 따라주었다. 김말숙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내가 주책맞게 젊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 괜찮을지 모르겠네….”

    “아니에요. 같이 드세요.”

    김말숙이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강우는 그런 김말숙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많이 외로우시겠지….’

    강우는 할아버지에게 김말숙의 사정을 모두 들어 알고 있었다. 김말숙은 고아였다. 부모님과 형제들을 모두 6.25에 잃었다. 대부분의 전쟁고아가 그랬듯이 김말숙도 보육원에 맡겨져 자랐다. 억척같이 생활한 김말숙은 성인이 되어 할아버지의 회사에 입사했다.

    ‘할아버지가 친동생처럼 챙겨주셨다고 했지.’

    그래서 김말숙은 할아버지를 끝까지 믿어주었던 유일한 직원이기도 했다. 강우가 힐끗 김말숙을 바라보았다. 이나은과 미나가 김말숙을 살뜰히 챙기고 있었다. 김말숙의 주름진 얼굴로 서서히 미소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나은아, 고마워.”

    “많이 드세요.”

    강우가 이나은과 김말숙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김말숙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강우야, 사장님한테 들었어. 중국 간다며?”

    김말숙이 지칭하는 사장님은 할아버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네, 내일모레 출발해요.”

    “엄마랑 동생이랑 셋이 다 가지?”

    “네.”

    김말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내가 시간 날 때마다 집에 들러서 사장님이랑 준이 오라버니랑 챙길게.”

    준이 오라버니라는 호칭에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니에요. 사람 부르기로 했어요. 가게 일도 보셔야 하는데….”

    “아니야. 내가 그래야 마음이 편해. 두 분 다 내 친오빠 같은 분들인데.”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김말숙이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텅 빈 가게 안에 온기가 차올랐다. 김말숙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정다움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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