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화 (196/402)

야! 박광웅!

촬영장의 한쪽에 강우가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옆에는 김춘배와 권창식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강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권 배우님은 이제 촬영 없지 않나요? 죽었잖아요.”

“구경 왔습니다. 이런 진기한 장면은 직관하고 싶어서요.”

권창식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김춘배도 연신 웃음이 나오는지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강우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둘이 그냥 친형제라고 해도 믿겠네. 하는 짓이 똑같아.’

그때, 메이크업해주던 여성이 강우의 머리를 고정했다.

“움직이시면 안 돼요.”

“아…. 죄송합니다.”

강우가 정면을 바라보며 몸을 굳혔다. 메이크업을 끝낸 강우가 이번에는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양복의 안쪽으로는 가슴에 매는 권총집을 찼고, 권총도 꼽았다.

“안녕하십니까?”

준비를 끝낸 강우에게 무술 감독이 다가왔다. 그리고 오늘 있을 촬영에 관해 설명했다. 오늘 있을 촬영은 영화의 대미를 장식할 단체 총격 씬이었다. 오늘 촬영을 끝으로 영화도 마무리 단계였다.

“이사님은 한국의 요원 역할이십니다. 마지막에 북한에서 침투한 특수부대들과 대치하는 장면입니다.”

“네, 연습 많이 해서 동선이랑 역할은 숙지하고 있습니다.”

무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할을 흡수하는 강우의 능력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다들 준비해 주세요!”

조감독이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촬영 개시를 알렸다. 강우와 김춘배가 촬영장으로 향했다.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많은 연기자가 모여있었다. 한쪽에는 눈을 감고 있는 한승규가 있었다. 이미 치열한 격투 장면을 찍었는지 얼굴과 옷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자자! 다들 동선에 맞춰 자리 잡아 주시고요!”

조감독이 확성기를 이용해 크게 소리쳤다. 연기자들이 신속히 자리를 잡고 대기했다. 촬영장 주변에 십여 대가 넘는 카메라가 배치됐다. 연기자들이 카메라 대수를 보며 작게 감탄성을 뱉어냈다. 대진 엔터테인먼트의 촬영지원이 엄청나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자자! 준비들 끝나셨으면 샷 들어갑니다!”

조감독의 말에 촬영장에 정적이 흘렀다. 한국과 북한으로 나뉜 대형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레디! 액션!”

촬영이 시작됐다.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한국 군인들에게 점점 포위되기 시작했다.

탕! 탕!

총격전이 이어지고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강우는 차분히 차례를 기다렸다. 이윽고 한승규와 여주인공의 대치가 이어졌다. 서로에게 총을 겨눈 두 사람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한국 정보요원으로 분장한 강우는 그런 한승규의 뒤에 있었다.

‘윽….’

순간,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귓가로 포탄이 빗발치는 소리와 커다란 함성이 들렸다. 강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뭐…. 뭐야?’

그 순간이었다.

탕!

한승규의 총에서 불이 뿜어졌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무너져 내렸다. 한승규가 절규하듯 소리치며 여주인공에게 다가갔다. 재빨리 정신을 차린 강우가 사방을 경계하며 한승규의 곁을 지켰다. 한승규와 여주인공이 애절한 장면을 연출했다.

“컷! 좋아!”

그렇게 클라이맥스의 촬영이 끝났다. 영화감독이 모니터를 보더니 말했다.

“한 번 더 갑시다!”

영화감독의 말에 조감독이 바빠졌다. 다시 확성기를 들고 촬영장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강우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강우야, 괜찮아? 정신없지?”

북한군 역할을 맡은 김춘배가 다가와 멍한 강우를 툭 하고 쳤다. 강우가 움찔하더니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

“뭐야? 천하의 박강우가 어리바리할 때도 있어?”

김춘배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강우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 촬영이 시작되고 들렸던 포격 소리와 함성 그리고 눈앞으로 펼쳐질 듯하다 사라진 장면.

‘이게 무슨 일인지….’

강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윽고 몇 번이고 촬영이 이어졌다. 하지만 같은 현상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오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고 영화감독이 강우에게 고맙다며 인사를 해왔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제가 방해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정말 연기 잘하셨습니다. 진짜 전쟁터 한가운데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영화감독이 강우를 칭찬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춘배가 또 신이 났다.

“감독님, 강우가요 안 하는 건 몰라도 한 번 하는 건 다 끝내주게 잘하거든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영화감독이 픽하고 웃었다. 김춘배도 씩 웃으며 강우의 등을 팡팡 쳤다.

“고맙다 친구야.”

“어? 어어….”

강우가 영화감독을 보며 말했다.

“오늘 촬영 끝나면 제가 소소하게 회식을 준비해놨습니다. 스태프분들이랑 보조출연자분들까지 모두요.”

“감사합니다!”

영화감독이 환하게 웃었다. 촬영 막판에 다들 지쳐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렇게 직접 회식까지 준비해 주다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자자! 오늘 단체 회식 있습니다! 우리 강우 이사님이 쏘십니다!”

조감독과 스태프들이 희소식을 사방에 전파했다. 촬영장에 커다란 환호성이 가득 찼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 * *

덜컥.

문이 열리고 현관으로 강우가 들어섰다. 영화감독과 한승규에게 붙잡혀 회식까지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후….”

강우가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강철 체력을 가진 강우였지만, 머리가 지끈 아파져 오고 능력이 발휘될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온몸이 물에 젖은 스펀지처럼 무겁고, 두통도 심했다. 특히 오늘은 더욱더 심했다.

“강우 왔니? 늦었네?”

인기척을 느끼고 어머니가 방에서 나왔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주무셨어요?”

“응.”

“강용이는요?”

“방에서 자. 아 참 아까 광웅이한테 전화 왔었어. 너랑 연락이 안 된다고 하던데?”

강우가 아차 싶어 핸드폰을 꺼냈다. 촬영을 위해 꺼놓은 전원을 아직도 켜지 않은 것이다.

“네, 연락해 볼게요.”

“그래, 알겠어.”

어머니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강우가 핸드폰 전원을 켰다.

1998. 12. 18. PM 09:31

강우는 박광웅이 연락한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오늘은 99년 수능 성적이 발표되는 날이었다. 강우가 박광웅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박광웅의 목소리였다. 단숨에 받은 걸 보니 전화를 기다렸나 싶었다.

“나다 강우. 전화 많이 했었냐?”

-어, 무슨 일 있었어? 계속 전화했는데.-

강우가 오늘 있었던 촬영을 떠올리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 그게…. 그런 일이 있었다. 오늘 성적 나왔지?”

-어. 나왔어.-

강우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몇 점이야? 아니다. 기다려 내가 그쪽으로 갈게.”

강우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현관으로 향했다.

“강우야, 또 나가?”

“엄마, 광웅이 좀 만나고 올게요.”

“너무 늦지 말고!”

강우가 현관을 나가며 알겠다고 답했다. 어머니가 현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 아들 참 바쁘게 사네. 친구들 하나하나 다 신경 쓰고.’

하지만 이런 아들의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주변 사람을 챙기고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아들의 모습이 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어머니가 강우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는 오매불망 형아를 기다리던 강용이가 잠들어있었다.

“우리 막내 오늘도 형이랑 자기는 글렀네.”

어머니가 자는 강용이를 안았다. 묵직한 무게가 제법 커버린 막내아들의 나이를 실감케 했다. 어머니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 *

부우웅.

강우를 태운 택시가 목동 사거리에 멈춰 섰다. 강우가 택시비를 내고 꾸벅 인사를 했다.

“수고하세요.”

“네, 손님~”

택시가 떠나갔다. 회식에서 술을 마신 탓에 차를 놓고 택시를 타고 온 강우였다.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리 목동 사거리의 명물이 되어버린 군고구마 통이 보였다. 강우가 씩 웃으며 군고구마 통을 향해 걸어갔다.

“광웅아.”

역시나 박광웅은 그곳에서 강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손에 들린 군고구마를 ‘후~ 후~’ 불어먹으면서였다. 강우를 발견한 박광웅이 씩 웃으며 종이봉투에 손을 넣었다.

“하나 먹을래?”

“좋지.”

강우가 군고구마를 받아 껍질을 깠다. 황금빛 몸통이 모습을 드러내며 하얀 연기가 허공을 흩어졌다. 뜨거운 군고구마의 온기가 손끝을 타고 몸으로 퍼져 나갔다. 강하게 불어오던 겨울바람의 추위가 순간 잊혔다.

“아뜨뜨….”

군고구마를 크게 한 입 베어 문 강우가 입을 벌려 열기를 뱉어냈다. 박광웅이 픽 웃었다.

“입천장 다 까지겠다.”

“맛은 있네.”

두 사람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박광웅이 힐끗 뒤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불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자신은 저곳에 있었다. 그때는 참 암울한 하루하루였다. 드럼통 안에 일렁이는 불과 대비되게 칠흑 같은 인생이었다. 박광웅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앞서가는 강우에게서 후광이 비추는 듯했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일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그랬다.

“뭐 해?”

강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박광웅이 깊은 상념에서 벗어나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 아니야. 가자.”

강우와 박광웅이 조금 걷자 한쪽에 포장마차가 보였다. 강우와 박광웅의 눈이 동시에 서로를 향했다.

“콜?”

“콜.”

두 사람이 씩 웃으며 포장마차의 입구를 걷어냈다. 안쪽에서 구수한 안주 냄새가 두 사람의 코를 자극했다. 한쪽에 놓인 국물 통에서는 포장마차 안을 뜨끈하게 데워주듯 연기가 나고 있었다.

“이모, 여기 국수 두 그릇이랑 소주 한 병 주세요.”

처음 보는 포장마차 사장님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호칭은 이모였다. 두 사람의 정다운 주문에 포장마차 이모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총각들 추우면 이쪽으로 와서 앉아.”

포장마차 이모가 한쪽에 놓인 기름 난로를 가리켰다. 강우와 박광웅이 동시에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저희 젊어서 튼튼합니다.”

포장마차 이모가 알겠다고 하며 소주를 먼저 가져다주었다. 접시에 담긴 오이와 당근 그리고 초장까지 놓였다.

따라락.

강우가 소주병을 따서 박광웅에게 내밀었다. 박광웅이 잔을 받고는 강우의 잔을 채워주었다. 두 사람의 잔이 허공에서 닿았다. 그리고 말없이 각자의 입으로 향했다. 쓰디쓴 소주가 넘어가고 두 사람이 동시에 미간을 좁혔다.

“성적은?”

강우가 물었다. 박광웅이 당근을 초장에 찍어 크게 한 입 먹었다. 그리고는 손을 주머니에 넣어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직접 봐라.”

강우가 성적표를 받았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펼쳐보았다. 작년 자신의 성적을 확인할 때보다 몇 배는 긴장했다. 이윽고 강우의 표정이 환해졌다.

“야! 박광웅!”

박광웅이 환하게 웃었다.

“고맙다. 강우야. 네가 짚어준 문제들이 진짜 많이 나왔어. 아니 이건 미래에서 미리 나올 문제를 알고 있나 싶을 정도였다니까?”

“어?”

강우가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고쳐잡고 성적표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318점이라….’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점수였다. 물론 작년보다 출제 문제가 쉬워진 탓에 전체적인 평균이 올라갈 이번 수능이었지만 말이다. 이 정도면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은 문제없었다.

“내 인생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내가 이렇게 무언가에 노력해서 결과를 낸 적도 없었고.”

박광웅이 술잔을 채우더니 벌컥 마셨다. 강우가 말없이 박광웅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네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온 거야.”

“고맙다. 앞으로 더 열심히 살게.”

강우가 말없이 웃으며 친구의 미래를 응원해 주었다. 이제는 완전히 바뀌어 버릴 박광웅의 미래가 궁금했다.

“오늘같이 좋은 날에 둘이 마시기는 아깝네. 애들 다 부를까?”

강우의 질문에 박광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너랑 둘이 마시는 게 좋아.”

“아…. 그래 그럼.”

강우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윽고 주문한 국수가 나왔다. 강우와 박광웅이 후루룩후루룩 국수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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