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5화 (195/402)
  • 네? 강우요?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 강우와 김춘배가 있었다. 김춘배는 모든 힘을 모두 쏟아냈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이참에 액션 배우로 전향하는 게 어때? 찰지게 치던데.”

    “후…. 몰라 나도. 그 순간 진짜 몸에 무슨 힘이라도 솟아나는 거 같았다니까.”

    김춘배가 허공에 주먹을 휙휙 휘둘렀다. 조금 전 맛보았던 격렬함과 숨 막히는 긴장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 맛에 연기를 한다 싶은 김춘배가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 촬영 얼마 안 남았으니까 마지막까지 힘내라.”

    “고마워. 진짜.”

    김춘배가 강우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마음에 담긴 고마움을 모두 표현하기에는 쑥스러웠다. 강우도 친구의 그런 마음을 잘 알았다.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뚜르르. 뚜르르.

    그때,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강우와 김춘배가 동시에 핸드폰을 꺼냈다.

    “나야.”

    김춘배에게 온 전화였다. 강우가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김춘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선배님! 지금이요?”

    김춘배가 바짝 얼어버렸다. 누구 전화이길래 이러나 싶을 정도였다. 강우의 시선을 느낀 김춘배가 입 모양으로 권창식 선배님이라고 말해 주었다.

    “네! 선배님. 지금 가겠습니다.”

    김춘배가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냐? 권창식 선배님이 지금 술 한잔하자고 하시는데….”

    “그래?”

    사실 오늘 촬영이 끝나고 강우와 김춘배는 간단히 술 한잔하려고 했다.

    “응, 선배가 나 처음 부르는 거라 안 갈 수도 없고 미안하다.”

    “음…. 그럼 같이 갈까?”

    김춘배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강우가 함께 간다면 든든함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김춘배가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권창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저 춘배입니다. 저기 일행 한 명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매니저님은 아니고요. 제 친구인데요.”

    권창식이 오케이를 외쳤나 보다. 김춘배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님. 지금 당장 튀어 가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김춘배가 운전하는 로드매니저를 향해 목적지를 말했다. 김성현은 회사 일로 먼저 들어가 본 상태였다. 평소라면 끝까지 함께했겠지만, 오늘은 강우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로드매니저가 알았다고 하고는 차를 몰아 목적지로 향했다.

    잠시 후.

    “매니저님, 먼저 들어가세요.”

    “고생하셨어요.”

    강우와 김춘배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두 사람을 내려준 밴이 스르륵 출발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촬영장이 있던 잠실 근처의 번화가였다. 권창식이 있다는 술집은 번화가의 구석진 곳에 있는 막걸릿집이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구수한 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우와 김춘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강우야, 저기 계신다. 선배님!”

    김춘배가 구석에 있는 권창식을 불렀다. 그리고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권창식의 앞쪽으로는 한승규도 있었다.

    “여~ 춘배 왔냐?”

    김춘배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강우도 뒤를 따랐다. 뒤늦게 강우를 발견한 두 사람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님? 춘배야, 같이 온다던 친구가 이사님이셨어?”

    “네, 원래 둘이 한잔하려고 했거든요.”

    김춘배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권창식이 크게 웃었다.

    “잘됐네. 그렇지 않아도 이사님에 대해 좀 알아가고 싶긴 했지.”

    “나도 마찬가지다.”

    한승규도 강우를 보며 호감을 드러냈다. 한승규는 이미 여러 개의 영화를 찍고 히트시킨 배우였다. 하지만 이번 영화 같은 작업 환경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한승규는 이런 작업 환경이야말로 한국 영화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몇 번이고 감탄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그런 작업 환경을 주도한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배우 한승규입니다. 꼭 대화 나누어 보고 싶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뵈니 더 미남이시네요. 박강우입니다.”

    강우와 한승규가 악수했다. 강우의 시선이 권창식에게 향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사님.”

    권창식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인사가 끝나고 네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이모! 여기 막걸리랑 해물파전 추가요.”

    권창식이 익숙한 듯 주문했다. 입구 쪽에는 지긋이 나이가 든 할머니가 전을 굽고 있었다. 이 집의 사장님이었다. 그 할머니를 보니 문득 피맛골 김말숙이 떠오르는 강우였다.

    “자자 한잔하시죠.”

    권창식이 강우에게 막걸리가 든 주전자를 내밀었다. 강우가 잔을 두 손으로 들어 내밀었다. 권창식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춘배, 너도 한 잔 받아라.”

    “네, 선배님.”

    김춘배가 공손히 잔을 받았다. 한승규가 잔을 들었다.

    “한잔하시죠.”

    네 사람의 잔이 허공에서 닿았다. 강우가 막걸리를 단숨에 마셨다. 알싸한 막걸리의 향기가 퍼져나갔다. 강우와 김춘배가 이미 나와 있던 빈대떡을 집어 먹었다. 입안 가득 기름기가 퍼지며 막걸리의 향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크…….”

    술이 들어가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강우가 자신을 어려워하는 권창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빛을 빛냈다.

    ‘배우 권창식.’

    미래의 기억에 따르면 대한민국을 주름잡는 명배우가 되는 자였다. 조금 거친 면도 있지만, 유머러스한 성격과 끝내주는 연기력으로 후배들의 존경도 받는 배우였다.

    ‘한마디로 영입대상 1호라는 이야기지.’

    강우가 이번에는 한승규를 바라보았다. 깔끔한 마스크와 뛰어난 연기력으로 현재 자타공인 최고의 배우였다. 다만 미래의 기억으로는 조만간 꽤 긴 공백기를 가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역시 영입대상이고.’

    강우가 다시 권창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춘배가, 권 배우님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더라고요. 연기 지도해주시고 적응 잘하게 도와주신다고요.”

    “???”

    김춘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테이블 아래로 김춘배의 발을 지그시 눌러 밟았다. 김춘배가 움찔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네! 선배님. 맞습니다.”

    “그…. 그래요?”

    권창식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김춘배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대진 엔터테인먼트 소속이라 낙하산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럴만했다. 이번 영화 촬영 전 김춘배의 이력은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정말 노력하고, 이 바닥에서 몇 년이고 고생한 후배들이 김춘배에게 배역을 뺏겼다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 못마땅하게 대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위축되는 김춘배의 모습에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사실 제가 처음에 많이 갈군 건 사실입니다. 못마땅하기는 했거든요. 그래서 춘배가 기가 많이 죽어서 촬영 내내 힘들어하는 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격이 수더분하지 못해서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내 방식대로 해봤는데….”

    권창식이 잠시 말을 끊었다. 한승규는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나이들끼리의 오해는 당사자들끼리 푸는 게 맞았다. 권창식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튼, 미안하다 춘배야. 내가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오해도 있었고, 나중에는 나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래도 배우는 연기로 말하는 거니까. 오늘 마지막 촬영에서 오해 다 풀었다.”

    “가…. 감사합니다! 선배님.”

    김춘배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인정받고 싶었던 선배의 칭찬에 말이다. 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때로는 인간관계에 의도치 않은 오해의 골이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풀지 못한 오해의 골은 서로의 다른 생각으로 점점 깊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사라지는 건 생각보다 단순할 수도 있었다.

    “자! 이거 한 잔 마시고 우리 묵은 감정은 싹 털어내자.”

    “네! 선배님.”

    김춘배와 권창식이 잔을 나눠 단숨에 단번에 마셨다. 옆에 있던 한승규가 슬쩍 잔을 내밀었다.

    “나 빼고 마시는 게 어딨나?”

    김춘배가 화들짝 놀라며 한승규의 잔을 채웠다. 한승규가 농담이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갔다. 김춘배와 권창식은 찐한 남자의 대화를 나누며 남은 오해를 깔끔히 풀었다. 한승규가 강우를 향해 말했다.

    “이사님.”

    “네, 말씀하세요.”

    한승규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멋쩍어했다. 나이는 한참 어린 강우였지만, 이상하게 어려웠다.

    “이번 영화 촬영 현장이 너무 편했습니다. 내가 영화를 찍으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요. 혹시 대진 엔터테인먼트가 처음 뛰어든 분야라 그런 건지 아니면 앞으로도 이런 환경을 쭉 이어갈 건지 궁금하군요.”

    한승규의 말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영화계 아니 방송계의 사정은 다 같았다. 배우들이 빛나기 위해 수많은 스태프들이 갈려 나가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달랐다. 계약서를 준수하는 작업 시간과 보수도 훌륭했다. 촬영을 위한 예산도 아끼지 않아 늘 풍족한 환경에서 작업했다.

    “당연하죠. 영화의 결과물은 배우분들이 보여준다지만, 그 과정에 숨어있는 수많은 스태프분 그리고 보조 출연자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배우분들의 노력이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게 아닐까요?”

    강우가 먼 미래에 화제를 모았던 모 배우의 수상소감을 살짝 얹어 말했다. 한승규와 권창식이 멍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김춘배는 역시 내 친구라는 표정을 지으며 뿌듯해했다.

    “맞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도 한국 영화가 발전하려면 지금처럼 주먹구구식의 촬영 일정과 환경 그리고 투자자들의 지나친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말 제 생각과 똑같은 분을 만나다니 기쁘네요.”

    한승규의 눈에 강우에 대한 호감이 짙어졌다. 권창식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저희 대진 엔터테인먼트는 지금과 같은 작업 환경을 추구할 겁니다. 영화 산업의 바탕이 되는 여러 스태프분과 배우분들의 작업 환경이 개선된다면 명작은 계속 탄생할 겁니다. 저는 한국 영화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강우의 말이 끝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몇 없던 가게 안의 손님들도 어느새 강우에게 시선을 집중되고 있었다. 사실 강우와 한승규를 몰라볼 수가 있었겠는가? 다만 조촐한 사적 자리를 존중해주기 위해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부럽네요. 강우 이사님과 같이 일하는 직원들 말입니다.”

    한승규가 진심이 담긴 부러움을 드러냈다. 강우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같이 일할 기회가 있었으면 꼭 모시고 싶습니다.”

    “음….”

    한승규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사실 지금 한승규는 지금 소속사와 갈등이 있었다. 무리한 스케줄을 짜고, 터무니없는 출연료를 요구하며 출연 계약을 뒤엎는 일도 있었다. 연기에만 집중하고 싶은 한승규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생각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 대진 엔터테인먼트는 언제나 한 배우님에게 열려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승규가 강우가 내미는 명함을 받았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강우의 시선이 이번에는 권창식을 향했다. 권창식이 무언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권창식은 현재 소속사와의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었다.

    “권 배우님도 꼭 모시고 싶은데 생각 있으시면 연락해 주시죠.”

    “정말입니까?”

    권창식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좋아했다. 명함을 덥석 받아서 싱글벙글했다. 김춘배가 그런 권창식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선배님, 우리 회사 진짜 좋아요. 꼭 오십시오.”

    “그래그래. 우리 같은 회사에서 일해보자.”

    불과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얼굴을 붉히던 두 사람이었다. 지금은 마치 오래된 형제처럼 친해 보였다. 권창식의 화끈한 성격도 있었지만, 김춘배의 친화력도 한몫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질 때였다.

    뚜르르. 뚜르르.

    김춘배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김춘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술 감독님? 네? 강우요?”

    김춘배가 강우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느낀 강우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김춘배가 씩 웃더니 호언장담했다.

    “그럼요! 제 부탁이면 무조건 오케이죠! 네네! 알겠습니다.”

    김춘배가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우야, 무술 감독님이 너한테 부탁이 있대.”

    김춘배의 말이 끝나자 강우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한승규와 권창식이 무슨 부탁인지 눈치를 채고 웃음을 지었다. 김춘배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내가 할 거라고 했다고. 부탁 좀 하자. 카메오 출연.”

    “하아….”

    강우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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