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화 (194/402)
  • 역시 잘하잖아.

    푸드트럭의 앞에 강우와 김춘배가 앉아있었다. 김춘배는 방금 만들어진 따끈한 핫도그를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굶었냐? 방금 밥 먹고 왔다며.”

    김춘배가 입안 가득 핫도그를 오물거리며 씩 웃었다.

    “그게 입맛이 없어서 많이 못 먹었어.”

    “웬일이냐? 먹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김춘배가 밥을 굶고.”

    “그러게 말이다.”

    김춘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진짜 갑자기 이건 뭐야?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어제?”

    강우의 말에 김춘배가 헛웃음을 흘렸다. 촬영장을 가득 채운 푸드트럭들의 규모가 하루 만에 준비가 되나 싶었다. 물론 촬영장에도 때에 맞춰 밥차가 오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푸드트럭들처럼 예쁘게 꾸며지고 메뉴까지 다양하지는 않았다. 특히 푸드트럭마다 김춘배의 응원 문구가 적혀있었다. 사람들이 오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히 인식할 수 있게 말이다.

    “어, 성현이 형이 알려줬다. 너 요새 힘들다며?”

    “......”

    김춘배가 고개를 푹 떨궜다. 강우에게는 늘 신세만 지고 부담만 주는 자신이라 생각했다. 강우가 김춘배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괜찮아 인마. 친구끼리 뭘 숨겨.”

    “숨기는 게 아니고 미안해서 그런다. 난 항상 너한테 짐만 되는 거 같아서.”

    생각해보면 강우가 없었다면 자신은 어찌 됐을까 싶은 김춘배였다. 강우와 함께 봤던 오디션 때도 아버지의 공장일도 그리고 대학진학과 이번 영화까지. 강우는 김춘배에게 버팀목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런 말 할 거면 나 그냥 가고.”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김춘배가 황급히 강우를 붙잡았다.

    “아…. 아니야! 쏘리쏘리!”

    강우가 자리에 앉으며 김춘배를 바라보았다.

    “자신감 하면 김춘배였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누구냐? 고작 같은 조연배우 한 명한테 갈굼당했다고 잔뜩 주눅이 든 신인배우 김춘배?”

    “.......”

    따갑게 날아드는 일침에 김춘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춘배야.”

    “어….”

    강우가 김춘배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나를 안 믿어주면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 거야. 너 연기 잘하잖아. 자신감을 가져라. 그리고 네 뒤에 내가 있잖아. 아니 대진 엔터테인먼트가 있잖아.”

    “그래, 맞아.”

    김춘배의 눈빛이 돌변했다. 강우가 말없이 김춘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박 이사님! 오셨습니까?”

    그때, 촬영장의 한쪽에서 한 명의 남성이 달려왔다. 바로 이번 영화 제작사의 대표였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김 대표님.”

    “오시는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저희를 위해 신경 써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제작사 김 대표는 깍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진 엔터테인먼트가 이번 영화의 최대 투자자였으니 말이다. 대진 그룹의 실세가 강우라는 것은 제작사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아…. 제가 갑자기 와서 촬영에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다른 투자자분들에 비하면 정말 간섭도 없으신데 이렇게 응원까지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투자자들이 영화판에 간섭이 심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투자자들이 마음대로 시나리오를 바꾸거나 배우를 물갈이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진 엔터테인먼트는 달랐다. 영화감독에게 전권을 주고 자유롭게 촬영을 하게 했다. 촬영 현장의 복지도 크게 신경 썼다. 인원도 넉넉히 고용하게 했고. 촬영날짜를 맞추려 무리하게 일정을 진행하게 하지도 않았다.

    “오늘은 조용히 구경만 하다 가겠습니다. 너무 소란스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촬영에 방해가 되니까요.”

    “네, 이사님.”

    그때, 영화감독이 나타났다. 아마 제작사 대표가 부른 것 같았다. 영화감독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이사님, 오셨습니까.”

    “고생이 많으십니다. 감독님.”

    영화감독이 강우의 옆에 있는 김춘배를 힐끗 바라보았다. 오늘 벌어지는 상황들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김춘배가 멋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 춘배는 고등학교 때부터 제 친구입니다.”

    “그랬군요.”

    영화감독이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김춘배는 촬영하는 내내 강우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투자자가 친구라는 것을 밝히면 돌아올 혜택이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영화감독이 김춘배를 다시 봤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친구에 그 친구라는 건가….’

    강우가 김춘배의 등을 팡팡 쳤다.

    “그래도 그냥 조연배우입니다. 제 친구라고 해서 달라지는 거 없습니다.”

    “당연하죠. 배우는 연기로 말할 뿐이니까요.”

    영화감독의 말에 김춘배의 표정이 불타올랐다. 강우가 오늘 촬영을 지켜본다 했으니 꼭 증명해내리라 다짐했다.

    * * *

    촬영장이 재개됐다. 꿀 같은 휴식과 진수성찬을 접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레디! 액션!”

    영화감독의 신호와 함께 촬영이 시작됐다. 오전에 김춘배가 NG를 냈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한승규가 나타나고 김춘배가 대사를 뱉어냈다. 그러자 영화감독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오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연기력이었다.

    “컷! 좋아!”

    영화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배우들이 일제히 탄성을 뱉어냈다. 김춘배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춘배, 역시 잘하잖아.”

    주연배우 한승규가 김춘배를 칭찬했다. 김춘배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영화감독이 김춘배를 불렀다. 김춘배가 재빨리 다가갔다. 영화감독이 모니터링 화면을 가리켰다.

    “봐. 이거야. 이거라고 춘배야.”

    “네, 감독님.”

    화면 안에는 날카로운 눈빛의 김춘배가 있었다. 서툰 한국어에는 북한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순간 화면 안 한승규와 김춘배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잘했어. 나는 네가 해낼 줄 알았다.”

    “감사합니다.”

    “좋아 오늘 컨디션 좋은 거 같으니까 다음 장면까지 몰아서 찍는 게 어때?”

    영화감독의 배려에 김춘배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주연배우도 아닌 조연배우의 컨디션을 생각해 씬을 몰아주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김춘배의 시선이 옆쪽으로 돌아갔다. 멀리 강우와 김성현이 보였다. 두 사람을 보니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네, 하겠습니다.”

    김춘배의 입에서 자신만만한 대답이 나왔다. 김춘배의 시선이 이번에는 다른 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의 권창식이 있었다. 김춘배와 권창식이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영화감독이 말한 김춘배의 다음 장면은 권창식과 김춘배의 무대였다.

    * * *

    약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김춘배는 의자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쉬는 듯했지만, 다음 촬영을 위해 무섭게 몰입을 하는 중이었다. 머릿속으로 조금 있으면 찍을 액션 씬이 마구 떠올랐다. 그동안 자신감이 없어 몇 번이고 미루어졌던 씬이었다.

    쉭. 쉭.

    김춘배의 손이 어지럽게 허공을 갈랐다. 무술 감독이 전수한 합을 몇 번이고 재현했다. 그런 김춘배의 옆에는 강우가 있었다.

    “춘배야, 그게 아니고.”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김춘배가 펼쳐야 할 액션을 재현해냈다. 김춘배가 몇 번 연습하는 것을 보더니 그새 외워버린 것이다.

    팡. 파팡.

    강우의 손끝에서 파공음이 들렸다. 그 모습에 김춘배가 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 괴물….”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강우의 운동신경과 능력은 인간의 범주가 아니었다. 강우가 김춘배의 자세를 몇 번이고 고쳐주었다. 딱딱하고 엄한 무술 감독이 아닌 친구에게 교정을 받자 김춘배의 습득도 빨랐다.

    “좋아. 완벽해.”

    “정말? 고맙다 강우야.”

    강우가 김춘배의 어깨를 팡팡 두들겨 주었다.

    “파이팅!”

    “오케이.”

    강우와 김춘배가 전의를 불태웠다. 그때, 촬영장의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촬영 준비가 끝난 것이다.

    “춘배야.”

    김성현이 김춘배의 차례를 알렸다. 김춘배가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준비가 끝난 촬영장으로 향했다. 이번 촬영장 역시 공조실의 안쪽이었다.

    “잘해보자고.”

    먼저 도착해 있던 권창식이 김춘배를 향해 말했다. 김춘배가 고개를 끄덕했다.

    “네, 선배님.”

    두 사람의 준비가 끝나자 영화감독이 외쳤다.

    “레디! 액션!”

    그와 동시에 김춘배와 권창식이 어지럽게 얽히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이미 몇 번이고 맞추어본 합대로 격투 장면을 펼쳤다.

    퍽. 퍽.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에 대한 진심이 섞인 걸까? 두 사람의 격투 씬은 거칠었다. 한쪽에서는 무술 감독이 긴장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권창식보다는 김춘배를 더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이내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뭐지? 며칠 전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만큼 김춘배가 보이는 액션 씬은 훌륭했다. 두 사람의 합도 너무나 잘 맞았다. 보는 이들에게 실제 상황으로 착각하게 할 만큼 말이다. 무술 감독이 한쪽에 있는 강우를 슬쩍 바라보았다. 조금 전 김춘배와 함께 액션 씬을 연습하는 것을 보기는 했다. 하지만 일반인인 강우의 도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대단하네. 따로 무술이라도 배웠나?’

    무술 감독이 강우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가던 때였다. 김춘배가 대본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큭….”

    권창식이 땅을 구르고 그 위로 김춘배가 몸을 덮쳤다. 주머니에서 군용 나이프를 꺼내든 김춘배가 권창식의 목에 가져다 댔다.

    “죽으라우!”

    짧은 대사였지만, 살기가 가득했다. 깔려있던 권창식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공포에 질렸다.

    “이익….”

    “죽어!!!”

    두 사람의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김춘배의 군용 나이프가 권창식의 심장으로 다가갔다. 권창식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김춘배의 군용 나이프가 권창식의 심장을 찔렀다. 양복 안에 미리 준비되었던 권창식의 혈액 팩에서 피가 왈칵 터져 나왔다.

    “끄르륵….”

    권창식이 거품을 무는 소리를 내며 절명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

    “......”

    조감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빨리 가서 권 배우님 상태 확인해!”

    조감독과 스태프들이 과몰입한 나머지 권창식을 향해 달려갔다. 정적이 흐르던 촬영장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커…. 컷!”

    잠시 멍했던 영화감독이 촬영 종료를 알렸다. 권창식에게 달려갔던 스태프들이 앞다투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다친 데 없으세요?”

    걱정할 만큼 김춘배와 권창식의 격투 씬은 격렬했다. 권창식이 스태프들을 슬쩍 밀어냈다.

    “괜찮습니다. 멀쩡해요.”

    스태프들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이번 장면은 한승규의 부하 역할인 권창식이 일방적으로 당해 죽는 씬이었다. 그만큼 김춘배보다 권창식이 얻어맞는 분량이 많았다.

    “야. 김춘배.”

    권창식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입에 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를 퉤하고 뱉어냈다. 김춘배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 선배님.”

    “그래, 인마 이거지. 내가 너한테 바랐던 게 이거라고. 잘했다 멋있었어. 나 순간 진짜 죽는가 싶었다.”

    권창식이 씩 웃으며 김춘배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욕이나 한 사발 얻어먹을 줄 알았던 김춘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꾸벅 인사를 했다.

    “가…. 감사합니다.”

    “이제 좀 연기자 같네. 너 마음에 들었어. 너하고 마지막 장면을 찍어서 좋았다. 나중에 술 한잔하자.”

    권창식이 씩 웃으며 발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김춘배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영화감독이 말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래 여기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이야. 내가 나를 챙기지 않으면 남이 챙겨주지는 않는다고.’

    문득 강우가 생각난 김춘배가 시선을 돌렸다. 멀리 강우가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들었다.

    ‘저놈은 예외지만.’

    김춘배가 씩 웃으며 마주 엄지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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