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누구야?!
커다란 스타디움의 공조실에 양복을 입은 남성이 나타났다. 잔뜩 긴장한 남성은 권총을 정면에 겨눈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공조실의 한쪽으로 김춘배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은색 특공대 복장을 하고 빨간 베레모에 개인화기를 사선으로 메고 있었다.
“여기는 통제 구역입네다. 접근을 멈춰 주시오.”
김춘배가 대사를 뱉었다. 그러자 상대 배우가 총을 내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죠?”
“왜? 볼일이라도 있나 보지?”
상대 배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김춘배와 같은 복장을 한 군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상대 배우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컷!”
그때, 감독이 멈추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손뼉을 치며 주연 배우를 칭찬했다.
“카~ 연기 참 잘해요. 한승규 씨.”
“감사합니다.”
스태프들의 시선이 주연 배우 한승규를 향해 쏟아졌다. 감독이 주연 배우의 눈치를 슬쩍 보며 말했다
“승규 씨, 그런데 말이야. 여기 다른 연기자들 표정이랑 대사가 좀 어색해 다시 한 컷 가야 할 거 같은데. 괜찮겠어요?”
“그러시죠.”
주연 배우 한승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춘배와 나머지 연기자들이 풍선 바람 빠지듯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 한쪽에 앉았다. 추운 겨울바람이 건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으으…. 춥네.”
“오늘 집에 가기 글렀다.”
엑스트라들 사이에 김춘배도 있었다. 비중은 적지만 조연급 배우인 김춘배였다. 하지만 첫 영화 촬영이었다. 모든 게 낯설고 어려워 이렇게 엑스트라들 사이에 있는 게 편했다.
“춘배야.”
그때, 주연 배우 한승규가 김춘배를 향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한승규의 손에는 따듯한 커피가 담긴 컵이 들려있었다. 주연 배우가 김춘배에게 잔을 내밀었다. 김춘배가 바짝 얼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선배님! 감사합니다.”
“편하게 해. 편하게.”
한승규가 김춘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김춘배가 바짝 얼어서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아까 합 맞출 때 눈빛이랑 목소리 톤 좋았어. 감독님이 조금 완벽하게 찍고 싶으신 모양이야. 힘내고, 남은 촬영도 잘 부탁해.”
“네! 선배님.”
한승규가 자리를 떠나 잠시 휴식을 취하러 갔다. 김춘배가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으으~ 춥다.”
추운 겨울바람에 훌쩍 콧물이 흘렀다. 사실 처음 영화 촬영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커다란 포부를 품었었다. 이번 영화를 통해 자신을 알리고 유명해지리라 다짐했다.
“하아~”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내로라하는 대선배들과 합을 맞추며 점점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었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자신감이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시작은 작은 일에서부터였다.
“김춘배!”
멀리서 감독이 김춘배를 불렀다. 담배를 뻑뻑 피우는 감독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네! 감독님!”
김춘배가 우렁차게 대답을 하며 감독에게 달려갔다. 감독은 모니터링 화면을 들여다본 채 심각한 표정이었다.
“네! 감독님!”
“춘배야, 처음에는 톡톡 튀고 잘했는데 왜 그러는 거야?”
감독이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김춘배의 몸이 움찔거렸다. 평소 낙천적인 김춘배의 얼굴이 전에 없이 딱딱히 굳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하다고 할 게 아니라 이거 좀 봐.”
김춘배가 모니터링 화면을 바라보았다. 감독이 말을 이어갔다.
“너 지금 배역이 뭐야? 남한에 잠입해서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인 북한군 특전사 아니야?”
“맞습니다.”
“그래서 복장도 남한의 특공대로 위장한 상태고, 그런데 말투가 왜 이래?”
감독의 지적에 김춘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자신은 완벽한 북한 말투를 쓰고 있었다. 이 배역을 위해 특별히 북한에서 탈출한 새터민까지 몇 명이나 만났는지 몰랐다.
“......”
김춘배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감독이 푹 한숨을 쉬었다.
“북한말을 이렇게 대놓고 쓰는 간첩이 어디 있겠어? 한국말을 쓸라고 하는데 어색한 그런 느낌으로 가야지.”
“아….”
김춘배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탄식을 뱉어냈다. 작은 디테일에 신경 쓰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었다.
“죄송합니다.”
김춘배가 곧바로 사과했다.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한 대 피우자.”
“네….”
김춘배와 감독이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감독이 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가치를 건넸다.
“담배 없지?”
“감사합니다.”
촬영 중이라 품에 담배도 없었다. 감독이 내미는 담배를 넙죽 받자 쓱 불까지 들어왔다.
“아…. 네.”
김춘배가 멋쩍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김춘배에게 불을 붙여준 감독이 자신도 한 개비 입에 새로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우….”
김춘배가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마시더니 뱉어냈다. 촬영 내내 쌓였던 근심이 담배 연기를 타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연기 너머로 감독과 눈빛이 마주쳤다.
“힘드냐?”
“아…. 아닙니다.”
“아니긴 인마. 네 얼굴에 다 나와 있어. 조연급 배우가 보조출연자들 사이에 묻혀서 숨어있고 말이야.”
김춘배가 고개를 푹 떨궜다. 영화는 수많은 사람이 어울려 찍는 유기체였다. 그리고 김춘배는 그 유기체 속에서 자신과는 상극이 되는 사람을 만났다.
“연기하다 보면 거친 상대도 만나고 또 욕하는 선배도 있고, 감싸주는 선배도 있고. 영화판은 전쟁이야. 이판사판에 산전수전 육지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고, 살아남는 놈이 이기는 곳이라고.”
“.....”
영화감독이 김춘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창식이가 너 미워서 그러는 거 아닐 거다. 그놈도 연기에 미친 놈이라 그래. 기죽지 말고 네 모습을 보여봐.”
“네, 감독님.”
영화감독이 고개를 끄덕하고는 담배를 땅에 툭 하고 던졌다. 발로 쓱쓱 밟아 담배를 끈 감독이 사라져갔다.
“하아~”
김춘배가 한숨을 쉬고는 피우던 담배를 땅에 비벼 껐다. 그리고 영화감독이 버린 꽁초도 주워 쓰레기통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쪽에 있는 쓰레기통에 다가갔다. 그곳에는 영화를 찍는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수고하십니다.”
김춘배가 꾸벅 인사를 하며 쓰레기통으로 다가갔다. 누군가를 발견한 김춘배가 움찔하며 멈춰 섰다. 몇 명의 배우들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김춘배가 슬그머니 쓰레기통에 담배꽁초를 버렸다. 그리고 빠르게 몸을 돌렸다.
“어? 춘배야.”
김춘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속으로 ‘젠장’을 외쳤다. 하지만 속마음을 숨겼다.
“네! 선배님!”
이내 웃으며 몸을 돌렸다. 여러 배우 사이에 한 명의 남성에게 김춘배의 시선이 꽂혔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남성이 손을 까닥해 김춘배를 오라 했다.
“밥 먹었냐?”
“아…. 아직입니다.”
김춘배가 속으로 ‘웬일이냐? 이 인간이’ 싶었다. 눈앞의 남성은 김춘배와 같은 조연 배우였다. 김춘배보다는 비중이 훨씬 있는 배우였다. 바로 주연 배우인 한승규의 부하로 나오는데 분량도 제법이었다.
“밥은 먹고 다녀라. 한국인은 밥심인데. 굶고 다니니까 그 모양이지.”
“네….”
“너, 조금 전 컷에서 NG 냈다며?”
그새 소문이 쫙 퍼졌나 보다. 대기 중이던 배우들의 귀에도 들어간 걸 보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려다가….”
“인마, 열심히는 누구나 해. 잘하는 게 중요하지. 정신 안 차릴 거냐? 지금 네가 하는 배역 따고 싶어서 얼마나 많은 배우가 줄을 섰었는지 몰라?”
김춘배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또 같은 이야기였다. 영화 촬영 초반부터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못마땅해하던 눈앞의 남성이었다. 이름은 권창식이었고, 나이는 김춘배보다 훨씬 많았다.
“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참았던 설움이 폭발했을까? 김춘배의 입에서 조금은 까칠한 말투가 터져 나왔다. 권창식이 ‘요놈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장난기 가득하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갔다.
“야 이….”
권창식의 입에서 한 소리가 터져 나오려던 찰나였다.
“안녕하십니까?”
한쪽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김성현이 나타났다. 권창식이 살짝 움찔하며 꾸벅 인사를 했다.
“김 부장님, 안녕하세요.”
“이야~ 창식 씨, 오늘도 우리 춘배한테 연기 지도해 주고 계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선배님들이 예뻐해 주시니 우리 춘배가 연기가 쑥쑥 늘어나고 있습니다.”
김성현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자 권창식이 김이 빠진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닙니다. 그럼….”
권창식이 담배를 끄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김성현이 잠시 매서운 눈으로 권창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감히 내 새끼를 건드려? 두고 보자 너.’
순하고 착한 김성현이었다. 하지만 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독해질 필요도 있었다. 특히 자신이 너무 아끼는 김춘배같이 순해 터진 연예인을 캐어하려면 말이다.
“춘배야, 아직 샷 들어가려면 시간 남았지?”
“네, 다른 장면들 먼저 찍고 마지막에 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안 바쁘세요?”
김춘배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김성현은 현재 대진 엔터테인먼트에서 부장직을 맡고 있었다. 일개 배우를 매니지 할만큼의 위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김성현이 고집을 부렸다.
“바쁘지. 바빠도 네가 내 첫 연예인이고 내 새끼인데 너는 끝까지 내가 매니지 할 거야. 걱정하지 마라.”
“네….”
김춘배가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김성현이 김춘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밥 굶었지? 핼쑥해진 거 봐라. 가자 밥 먹으러.”
“대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아까 조감독한테 물어봤어. 너 시간 많다.”
김성현이 물에 빠진 쥐같이 늘어져 있는 김춘배를 끌고 사라졌다. 김춘배가 떠났어도 촬영장은 변함없이 돌아갔다. 김춘배는 아직 조연에 불과한 배우였으니까 말이다.
* * *
부우웅.
밥을 먹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춘배가 생각에 잠겨있었다. 조금 있으면 시작할 촬영 생각에 벌써 한숨이 나왔다. 자신감이라면 어디 가서도 지지 않았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장난기 많고 거침없었다. 하지만 일찍 맛본 사회의 쓴맛은 쓰고도 썼다.
“다 와 간다.”
김성현의 말대로였다. 멀리 촬영 현장이 보였다.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는 주변을 촬영장의 조명들이 별처럼 수를 놓고 있었다. 김춘배가 아련한 표정으로 촬영장을 바라보았다. 촬영 초기에만 해도 밤하늘을 보듯 설레는 모습이었었다.
“어?”
그때, 김춘배가 의자에 깊숙이 묻었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얼굴을 차창에 바짝 가져다 댔다. 어둑한 촬영장으로 여러 대의 트럭들이 도착해 있었다.
“저게 뭐지? 형, 저거 뭐예요?”
김춘배가 김성현에게 물었다. 김성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춘배, 너 요즘 힘들었지?”
“네?”
김춘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힘든 것과 눈앞의 상황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차량이 촬영장에 가까워졌다.
“어어?”
김춘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촬영장 안을 가득 채운 트럭들의 정체는 푸드 트럭이었다. 푸드 트럭에는 김춘배의 사진과 여러 문구가 적혀있는 현수막이 달려있었다.
“이사님이 너 힘내라고 아주 통 크게 쏘셨다.”
“가…. 강우가요?”
김춘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강우라는 이름은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차량이 멈추고 김춘배가 차에서 내렸다.
“춘배 씨!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주변의 스태프들과 보조출연자들이 고맙다고 인사를 해왔다. 김춘배가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야~ 우리 이사님 스케일 봐라. 이거 완전히 호텔 레스토랑을 만들어 놓으셨네.”
주차를 마치고 온 김성현이 탄성을 뱉어냈다. 그 순간이었다.
“아예 호텔을 들어서 옮길까 하다가 참았는데요. 이 정도도 괜찮죠?”
“강우야!”
촬영장의 한쪽에서 강우가 나타났다. 김춘배의 얼굴이 환해졌다. 왜인지 눈가에서 찔끔 눈물이 나려고 했다. 강우가 그런 김춘배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뭐야? 우는 거야 웃는 거야? 징그럽게.”
“아…. 아니거든!”
김춘배가 황급히 표정을 정리했다. 강우가 씩 웃으며 김춘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누가 내 친구 힘들게 했어? 어? 누구야?!”
강우가 괜히 과장되게 말했다. 김춘배의 얼었던 자신감에 순간 불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