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402)
  • 유명해지기 전에 사인이라도 받아놔야지.

    찬 바람이 부는 명동거리에 이나은이 나타났다. 두꺼운 외투를 입은 이나은은 총총걸음으로 동양 무역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한겨울이 되자 명동거리는 반짝이는 불빛들로 가득 채워졌다. 하지만 IMF의 여파로 예전과 같은 활기참은 찾을 수 없었다.

    “후…. 춥다.”

    이나은이 양손을 모아 입김을 후 불었다. 강우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외투 안에 예쁜 원피스를 입은 상태였다. 이제는 완연히 추워진 날씨에 몸이 으슬으슬했다. 이윽고 이나은이 동양 무역 건물 앞에 도착했다.

    “어?! 나은 씨?”

    마침 퇴근하던 직원들이 이나은을 알아보았다.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강우 만나러 왔어요.”

    그 말과 동시에 강우가 건물에서 나왔다. 이나은을 보고는 헤벌쭉 웃음을 지었다.

    “나은아!”

    “강우야!”

    오랜만에 만나는 두 연인이 서로를 보며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직원들이 그 모습을 보며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아~ 이제 곧 크리스마스인데 나는 외롭구나~”

    “너도 여자친구 만들던지.”

    직원들이 티격태격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강우와 이나은이 그런 직원들을 보며 빵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도 갈까?”

    “응.”

    강우가 팔짱을 끼라며 한쪽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나은이 착 다가와 강우의 팔짱을 끼었다. 강우가 주머니 속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이나은의 손을 꾹 잡았다.

    “안 추워? 따듯하게 입고 오라니까. 또 얇게 입고 왔지?”

    “아니야~ 안 추워.”

    강우와 이나은이 명동거리를 걸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자주 가던 분식집을 갈 생각이었다.

    “어? 여기 언제 피시방이 생겼지?”

    “그러게.”

    분식집이 있는 건물의 지하에 피시방이 신장개업한 상태였다.

    “나은이다.”

    강우가 건물 입구에 서 있는 전신대를 가리켰다. 아름다운 엘프의 모습을 한 이나은이 우아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다만 엘프 복장을 한 탓에 잘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강우야….”

    강우가 전신대를 보며 감탄하자 이나은이 얼굴을 붉혔다. 이나은의 부끄러운 목소리에 강우가 씩 웃었다.

    “진짜 누구 여자친구인지 엘프 그 자체네.”

    “그만해. 나 얼굴 터지겠어.”

    이나은이 강우의 팔뚝을 퍽 하고 쳤다. 강우가 비틀거리는 척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분식집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분식집 사장님이 강우와 이나은을 알아보았다.

    “아휴~ 이게 누구야? 강우랑 나은이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한동안 바빴어요.”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이나은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 떡볶이랑 돈가스 너무 먹고 싶었어요.”

    “그래, 얼른 앉아.”

    강우와 이나은이 한쪽 자리에 앉았다. 분식집 사장이 익숙하게 물었다.

    “자주 먹던 대로 주면 되지?”

    “네! 사장님!”

    강우가 우렁차게 답했다. 이윽고 강우와 이나은의 앞으로 뜨끈한 국물이 놓였다. 강우가 수저통에서 수저와 포크를 꺼내 이나은에게 놓아주었다.

    후루룩. 후루룩.

    추운 겨울 마시는 분식집 국물에 이나은의 얼었던 몸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아~ 좋다.”

    이나은이 두 눈을 감고 긴 숨을 뱉어냈다. 그 숨으로 몸 안의 냉기가 모두 뱉어지는 듯했다. 강우가 그런 이나은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본격적인 연예인 활동을 시작하며 이나은은 점점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째 점점 이뻐지는 거 같네. 불안하게시리.’

    강우가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얼굴을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이윽고 주문한 음식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떡볶이다.”

    이나은이 음식을 빠르게 먹기 시작했다. 강우가 물을 따라 주며 말했다.

    “나은아, 천천히 먹어.”

    “응? 아…. 미안.”

    이나은이 양 볼 가득 음식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 모습이 또 너무 귀여워 강우가 헤벌쭉 웃었다.

    “아니야. 급하게 먹으면 체할까 봐.”

    “그러게. 요즘 광고 찍는 스케줄이 조금씩 늘어나서 밥 빨리 먹는 게 버릇이 됐어. 스태프분들이 내가 밥 먹는 거 기다리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JG 소프트의 튀니지 광고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린 상태였다. 그로 인해 이나은도 광고 모델로 이름을 조금은 알린 상태였다.

    “역시 우리 나은이 착해.”

    “헤헤….”

    이나은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강우는 그런 이나은을 보며 흐뭇해했다. 분명 유명한 스타가 되어도 지금의 모습을 잃지 않을 게 분명했다. 미래의 기억에서도 이나은의 예의 바르기로 유명한 스타였으니까 말이다.

    “지금 찍고 있는 광고가 음료 광고라고 했지?”

    “응. 나랑 다른 연예인분 한 명이랑 같이 찍어.”

    이나은은 지금 두 번째 CF를 찍고 있었다. 강우가 강력하게 추천한 CF였는데 이 광고 역시 개성 있는 대사로 큰 인기를 끌었던 광고였다.

    “이번에도 광고 잘 찍고. 이번 광고 찍고 나면 다음에는 드라마 오디션도 보자.”

    “드라마?”

    이나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도 연극을 하며 연기력을 키우고는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드라마라면 연기를 조금 못해도 티가 크게 나니 비난의 여론도 무섭기도 했다. 이나은이 말을 이어갔다.

    “연기가 아직 부족한데….”

    “누가 그래? 네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데.”

    강우는 이미 여러 번 극장에 찾아가 이나은의 연극을 봤었다. 그때마다 무대에서 빛을 내는 이나은을 보며 감탄을 하기도 했었다.

    “그래? 강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당연하지. 내가 장담하는데 드라마 데뷔하는 순간 전 국민이 주목한다.”

    “와~ 그 정도야?”

    강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했다. 그 진지한 표정에 이나은이 킥하고 웃었다. 두 사람은 분식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나누는 대화는 즐거웠고, 서로를 보니 음식 맛도 기가 막혔다.

    “잘 먹었습니다.”

    강우와 이나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식집 사장이 도화지와 커다란 매직펜을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이나은에게 쓱 내밀었다.

    “나은이 더 유명해지기 전에 사인이라도 받아놔야지.”

    “네?”

    이나은이 또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분식집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나은에게 쏠렸다. 그중 몇몇 남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어디서인가 본 거 같은 얼굴인데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여기요. 사장님, 다음에 또 올게요.”

    시선이 쏠리자 이나은이 사인을 급히 하고는 가게 밖으로 나갔다. 혹여나 소란이 일어나 장사에 방해가 될까 싶었나 보다. 강우는 가게에 남아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 눈이다.”

    어느새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나은은 전신대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강우가 탄성을 뱉어냈다. 누가 엘프이고 사람인지 구별이 되지를 않았다. 그때, 몇 명의 남성들이 눈길을 달려 피시방으로 달려왔다.

    “오늘 밤새….”

    남성들이 입구에 도착해서는 일제히 멈춰 섰다. 그리고 전신대와 이나은을 번갈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화들짝 놀라 이나은의 손을 잡았다.

    “나은아, 가자.”

    “어? 어어….”

    이나은이 강우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피시방을 들어가려던 남성들이 전신대와 이나은을 번갈아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 설마.”

    남성들이 피시방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갔다. 강우와 이나은은 피시방에서 조금 멀어진 곳에 멈춰 섰다.

    “나은아, 안 되겠다. 앞으로 알아보는 사람들 점점 늘어날 텐데. 특별한 방법을 사용해야겠어.”

    “응?”

    장난스러운 강우의 말투와 표정에 이나은이 킥하고 웃었다. 강우가 이나은을 데리고 근처의 옷가게에 들렸다. 그리고는 이나은의 얼굴을 전부 덮을만한 모자를 사고 선글라스도 하나 샀다.

    “이거 써봐.”

    이나은이 모자와 선글라스를 받아 썼다. 그리고는 짐짓 주변을 경계하는 척하며 강우의 흉내를 냈다.

    “이런다고 날 못 알아볼까요?”

    “......”

    오래전 소개팅 날 이재원에게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그러자 이나은이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었다.

    “어차피 내가 벗어도 강우 너 때문에 다 알아보네요.”

    “어?”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강우를 힐끔거리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그렇긴 하네.”

    * * *

    어두컴컴한 개발실의 구석에 남재식이 있었다.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남재식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퀭하니 마른 얼굴에의 양쪽으로는 광대뼈가 툭 하고 튀어나와 있었다. 특히 실실 웃고 있는 지금 그 광대뼈가 더욱 도드라졌다.

    “흐흐…. 대박이다. 대박이야.”

    남재식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흘렸다. CF 광고가 나가기 시작한 이후로 회원가입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남재식이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엘프가 그려진 포스터가 있었다.

    “진짜 박강우 이 대단한 놈.”

    맨 처음 강우가 이 포스터를 만들자고 했을 때 남재식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강우의 생각이니 그대로 따랐다. 강우는 이 포스터를 JG 소프트에서 배포하고 있는 튀니지 설치 CD에 사은품으로 주었다. 그 이후로 설치 CD는 날개가 돋친 듯 배포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신대를 만들 생각은 또 어떻게 한 거야.’

    전신대를 피시방에 배포하기 시작하자 또 엄청난 효과가 나타났다. 피시방의 튀니지 정액제 이용률이 급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CF가 방송되기 시작하자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게임 CF라는 특이점과 이나은이 분장한 엘프의 모습 때문이었다.

    ‘맨 처음 텔레비전 광고를 찍자고 했을 때만 해도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남재식이 감탄성을 뱉어냈다. 게임을 제작하는 과정과 서비스하는 과정 그리고 이제는 홍보까지 강우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아이디어 뱅크라고 생각했다. 남재식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생각난 김에 강우를 보고 싶었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의 신호가 가고 덜컥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강우야, 나다. 어디냐?”

    -나? 명동.-

    남재식이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퇴근 시간을 한참이나 넘긴 상태였다. 동양 무역이 정시 퇴근으로 유명했으니 의아할 만했다.

    “퇴근 안 했어?”

    -아니. 퇴근은 아까 했지. 그런데 왜? 뭐 막히는 거 있어?-

    “아니, 만나서 술 한잔할까 했지.”

    -그래? 나야 좋은데…. 지금 나은이랑 있어서.-

    “진짜? 잘됐네. 그렇지 않아도 나은이한테 정말 고마워서 뭐라도 사주고 싶었는데. 오늘은 내가 화끈하게 쏠 테니까 같이 술 한잔하자.”

    수화기 너머로 강우가 이나은에게 물어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강우의 말을 들은 이나은이 웃음을 터트리며 좋다고 하는 게 들렸다. 남재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의자에 걸려있는 외투를 챙겨입으며 말했다.

    “된다고 하지?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금세 달려간다.”

    -야! 천천히….-

    툭.

    통화가 끝나고 남재식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려다 움찔했다. 개발실의 곳곳으로 수많은 개발자가 장렬히 전사해 있었다. 이용자가 몰리며 생각지도 못한 버그가 생기고 서버도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다. 개발자들은 밤낮으로 업무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만큼 튀니지에 관한 관심이 폭주하고 있었다.

    ‘이제 공성전 업데이트만 하면….’

    남재식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주변의 개발자들을 향해 두 손을 모아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조금만 더 고생해주면 두둑한 성과보수로 보답할 예정이었다. 남재식이 슬금슬금 걸어서 개발실을 벗어났다.

    휘이잉.

    한겨울의 찬 바람이 온몸을 때렸다. 남재식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슬쩍 고개를 드니 JG 소프트의 사옥은 불야성이었다.

    ‘강우한테 가기 전에 야식이라도 두둑하게 배달해 놓고 가야겠네.’

    남재식이 옷깃을 여미고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져갔다.

    * * *

    통화를 끝낸 강우가 이나은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온다는데?”

    “안 와도 된다니까.”

    이나은이 정말 괜찮다고 했지만, 남재식이 눈치 없이 오는 상황이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어버렸다.

    “그놈 눈치 없는 거야 알아주잖아. 그냥 온다는데 같이 놀다 들어가자. 너한테 고마운 것도 있고 그렇다는대.”

    “나한테?”

    이나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CF를 찍고 돈도 벌고 유명해진 것은 자신이었다.

    “우리 나은이 덕분에 게임이 대박 나게 생겼거든.”

    “정말?”

    이나은이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남재식은 강우의 친구지만 이나은에게 좋은 친구이기도 했다. 도움이 됐다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어, 그래서 오늘 크게 한턱낸다니까. 어디 가서 재식이 오는 거 기다리자.”

    “그럼 여기저기 구경 다니자. 분위기 너무 좋잖아.”

    이나은이 주변을 빙글 둘러보며 말했다. 강우가 흐뭇하게 웃으며 이나은을 따라나섰다. 강우와 이나은은 코끝이 빨개지도록 명동거리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여보세요? 어? 다 와 간다고? 그럼 백화점 앞에서 보자.”

    강우가 통화를 끝내고 이나은에게 말했다.

    “나은아, 재식이 백화점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래?”

    강우와 이나은이 명동에 있는 유명 백화점 본점으로 향했다. 어느새 눈발은 거세져 거리는 조금씩 하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강우와 이나은은 손을 잡고 걸었다. 눈이 오는 날, 도로에 차들은 어느새 거북이걸음이었다. 어둑해진 거리에 하얀 눈길이 깔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자동차들의 조명에 이나은의 얼굴이 감성으로 물들었다.

    ‘좋다….’

    이나은이 강우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두 사람은 백화점 앞의 벤치에 앉아 겨울의 풍취를 만끽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어?”

    이나은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멀리서 남재식이 눈발을 맞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간혹 부는 바람과 사투를 벌이면서였다.

    “얘들아, 오래 기다렸어?”

    백화점 앞에 도착한 남재식이 안도의 숨을 뱉어냈다. 강우가 그런 남재식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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