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188/402)

기억하시죠?

강우와 권태복 회장이 마주 앉았다. 시끄러운 장례식장이었지만, 강우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권태복 회장의 옆에 있는 나창식을 바라볼 뿐이었다.

‘음….’

나창식의 인생을 한 편의 영화처럼 본 강우였다. 속에서 부글부글 열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기억은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단은 참자.’

그 순간, 강우의 시선을 받은 나창식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예의 바르다고 하더니 순 헛소문이었나 보군.”

“이보게.”

권태중 회장이 나창식을 말렸다. 강우는 말없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누가 감히 내 손자를 욕하는가?!”

분노가 담긴 목소리와 함께 할아버지가 강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옆에 최준도 한마디 거들었다.

“어른이 돼서 모범이 되지는 못할망정.”

할아버지와 최준의 말에 나창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권태복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보게 재봉 그리고 최준이 미안하게 됐네.”

“형님, 오늘은 제 친구이자 김성진 독립투사의 자제분의 장례식입니다. 광복회에서 나와서 분위기를 흐리겠다는 겁니까?”

지난 청와대 만남 이후 할아버지와 최준 그리고 권태복 회장은 몇 번의 술자리를 가졌다. 하지만 오늘 같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권태복이 움찔하며 당황했다. 할아버지의 평소와는 다른 서슬 퍼런 말투에 강우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할아버지에게서 날카로운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재봉, 그게 아닐세…. 나 이사 오늘 같은 날 왜 이러는 건가?”

“흠흠….”

나창식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강우는 그 이유를 알았다.

‘할아버지와 나창식은 독립운동 당시부터 안면이 있었다. 조선 땅에 있는 나창식과 접선한 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창식은 변절자이고 배신자이다.’

나창식은 광복 이후 당당히 독립투사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할아버지보다 높은 등급에 서훈이 되기까지 했다. 잘못된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일제에 충성하던 자들이 독립투사로 변하고 진정한 독립투사들은 자리를 잃은 그런 시대가 있었다.

“오는 거까지는 막지도 않았고, 뭐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란까지 피우는 건 용납 못 합니다. 특히 나창식 당신 말이오.”

“이 사람이 지금!”

나창식이 발끈했다. 그러자 권태복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네 자꾸 이러면 다시는 나를 따라다닐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걸세!”

“회…. 회장님.”

나창식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강우가 무슨 존재이길래 이리도 쩔쩔매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럼 조용히 있다 가십시오.”

할아버지와 최준이 다시 자리를 떠났다. 강우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자리를 지키던 권태복 회장이 일어났다. 권태복 회장은 함께 온 일행들과 함께 유가족에게 다시 인사를 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다른 일행은 밖으로 나가고 권태복 회장과 나창식이 강우에게 다가왔다. 강우의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눈을 부라리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 소란을 목격한 친구들이었다.

“네, 그러시죠.”

강우가 친구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는 자리를 옮겼다. 친구들이 언제든지 참전할 기세로 강우를 주시했다.

“오늘은 정말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네. 정말 미안하군.”

“아닙니다. 장례식장에서는 다양한 일이 벌어지는 법이니까요.”

“이해해줘서 고맙군. 그런데 말이야 언제 한번 나를 찾아와 줄 수는 없을까? 사실 오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아니었지 않은가?”

강우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자 나창식이 또 나섰다.

“우리 회장님이 그래도 독립유공자들 사이에서는 어르신에 속하는데. 어른이 부르면 한번 오는 게 맞지.”

“어허! 이 사람이 진짜!”

권태복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나창식의 얼굴에서 심술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미 광복회 내부의 몇몇 인사들은 권태복 회장으로서도 제어할 수 없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회장님이랑 단둘이 이야기 나누는 거로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권태복 회장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창식은 강우를 보며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내 몸을 돌려 권태복 회장을 쫓으려 했다.

“도이마 오사무. 기억하시죠?”

강우가 나창식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나창식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어깨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그 이름을 모두가 잊었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나창식이 강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너! 지금 무슨 말을!”

얼굴을 붉힌 나창식은 몹시 흥분되어 보였다. 강우가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정말 기억하시고 계셨군요? 참 유명한 악질 순사였는데 말이죠. 어르신도 제법 고생을 하셨나 봅니다.”

“으음….”

나창식이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강우가 고개를 꾸벅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오늘 조문은 감사했습니다.”

“......”

나창식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오사무는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투사들에게 악명 높았던 순사 중 한 명이었다. 강우가 이름만 언급했으니 자신과의 관계까지야 모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창식의 그 생각은 크게 틀렸지만 말이다.

“이보게! 그만하고 빨리 오라니까!”

권태복 회장이 나창식을 재촉했다. 강우에게 계속 불만을 표하는 줄 알았나 보다. 이윽고 권태복 회장의 일행이 장례식장에서 모두 사라졌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너희들의 정체를 세상에 다 밝혀 줄 테니.’

강우가 나창식의 뒷모습을 보며 다짐했다. 이윽고 강우가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갔다.

* * *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강우와 유가족들은 경기도에 있는 한 봉안당에 모여있었다. 김일국은 생전에 원하던 대로 화장을 했다. 그리고 유골 일부는 아버지인 김성진이 있는 동작 현충원의 묘 위에 조금 뿌려졌다. 나머지 유골은 오늘 봉안당에 모셨다. 강우는 사단 법인 광복의 명의로 봉안당의 한쪽 면을 통째로 임대해 놓은 상태였다.

“강우야, 정말 고맙다. 아버지께서 편히 쉬실 수 있을 거 같아.”

김일국의 아들이 강우의 손을 붙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례식의 시작부터 끝까지 강우와 재단의 도움이 너무나도 컸다. 물질적인 도움뿐만이 아니었다. 강우가 세심하게 신경 써준 그 마음이 너무나 든든하고 외롭지 않았다.

“잘 추스르시고요. 무슨 일 있으시면 꼭 연락하시고요.”

“그래, 알겠어.”

옆에서 마지막까지 있어 준 할아버지와 최준도 김일국의 아들을 위로했다.

“이제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강우에게 꼭 연락하게.”

“힘내고. 남은 가족들을 잘 챙기게.”

김일국의 아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했다. 두 분 할아버지를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최준은 말없이 김일국의 아들을 안아주었다. 그리고 유가족들 하나하나를 안아주며 위로해 주었다.

“그럼, 어르신들 정신을 추스르고 나면 꼭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김일국의 아들이 할아버지와 최준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김일국의 가족이 재단에서 준비한 승합차에 올라탔다. 장례식을 모두 마치고 피곤한 가족들을 위한 강우의 배려였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네, 이사님.”

유가족들을 집까지 데려다줄 장 총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승합차가 떠났다. 강우가 잠시 그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일국의 유골이 잠든 봉안당을 바라보았다.

‘어르신, 편히 잠드세요. 제가 꼭 가족분들 지켜드릴게요.’

상념에서 벗어난 강우가 할아버지와 최준을 모시고 집으로 출발했다.

* * *

덜컥.

사단 법인 광복의 사무실 문이 열리고 강우가 들어섰다. 직원들이 벌떡 일어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려 사흘 동안 이어진 장례식에 계속 참석한 강우였다. 아침에는 학교에 점심에는 동양 무역에 들렀다. 그리고 저녁부터 새벽 내내 장례식장에 있었다.

“이사님! 안 피곤하십니까?”

장 총무가 대번에 달려와 강우를 향해 말했다. 직원들이 장 총무의 말에 동의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 멀쩡합니다. 진짜예요.”

강우의 생기 넘치는 표정에 직원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소문으로만 듣던 철인 박강우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니 그럴 만했다. 소문에 의하면 하루에 3~4시간 수면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직원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들이라면 절대 소화 불가능한 일이었다.

“회의 좀 하죠. 강 사무국장님이랑 박 사무국장님 좀 불러주세요.”

“네, 이사님.”

강우가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회의가 준비되는 동안 강우는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얻은 능력은 일반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직 독립운동가들에게만 그 능력이 발현되면 지나온 과거를 영화처럼 볼 수가 있었다. 강우가 품에 소중히 품고 있는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이 수첩을 얻고 나서부터였지.’

수첩에서 얻은 능력은 지금 강우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비록 광복군 사령부에서 얻은 비밀 장부가 있었지만, 거기에 모든 것이 적혀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만간 광복회에 한번 가봐야겠군.’

강우는 광복회에 속한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나보며 능력을 테스트해볼 생각이었다. 물론 광복회에 소속되지 않은 다른 유공자들도 한 명씩 만나볼 생각이었다.

똑똑.

그때, 문이 열리고 장 총무가 들어섰다.

“이사님, 회의 준비 끝났습니다. 다들 들어오라고 할까요?”

“네, 들어들 오세요.”

장 총무가 먼저 들어오자 뒤를 이어 강우가 언급한 사무국장 두 명이 들어왔다.

드르륵.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우가 입을 열었다.

“일단 강 사무국장님.”

“네, 이사님.”

강 사무국장은 생활복지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강우의 말이 이어졌다.

“독립유공자분들과 후손분들을 연령대별로 모두 건강검진을 진행해 주세요. 비용은 전부 저희가 부담하는 거로요. 건강검진 결과가 나와서 입원이나 수술이 필요한 분들은 바로 보고 없이 진행해 주시고요.”

“네, 이사님.”

강 사무국장이 감탄한 빛이 되었다. 어떤 재단이 먼저 나서서 이런 일을 진행한단 말인가.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그리고 박 사무국장님.”

“네, 이사님.”

박 사무국장은 재단에 도움을 받는 모든 독립유공자분들과 후손들의 연락과 관리를 맡은 인물이었다.

“광복회에 소속된 회원 명단을 좀 얻고 싶습니다. 광복회에 협조를 부탁해 보세요. 그리고 아직 저희와 연이 닿지 않은 유공자분들과 후손분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내 주세요.”

“네, 이사님.”

박 사무국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이번에 느끼셨겠지만, 시간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마냥 기다리는 건 방법이 아닙니다. 힘드시겠지만, 세세하게 먼저 나서서 하나하나 다 챙겨주세요.”

강우의 말에 장 총무와 두 명의 사무국장이 의지를 불태우며 답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짧은 회의를 마친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고들 해주세요. 저는 광복회에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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