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185/402)
  • 제가 할 겁니다.

    띠띠. 띠띠.

    중환자실의 안쪽에 김일국이 누워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낀 김일국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노환으로 신체 기능이 모두 떨어진 김일국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김일국의 곁에는 위생복을 입은 강우가 있었다.

    “......”

    강우가 김일국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오랜 세월 고생을 하다 이제 겨우 나아진 삶을 살게 된 김일국이었다. 강우의 도움으로 걱정 없이 지낸다며 껄껄 웃던 통화 속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하지만 세월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나 보다.

    ‘꼭 깨어나세요.’

    강우가 김일국의 손을 한 번 꽉 잡아준 후 중환자실을 나왔다. 밖에는 초췌한 모습의 남녀가 앉아있었다. 김일국의 아들과 딸이었다.

    “강우야….”

    두 사람이 강우에게 다가왔다. 강우가 김일국 아들과 딸에게 말했다.

    “의사 말로는 당분간 중환자실에 있어야 한대요. 지금 신체 기능이 너무 떨어져서 자력으로 호흡이 힘드시다고 해요. 폐에 물이 차서 급하게 수술을 했다고 해요.”

    “아버지가 평소에 폐가 안 좋으셨어…. 한국전쟁 때 북한군한테 잡혀 몇 개월 동안 동굴에 갇혀 계셨었는데 그때 건강이 많이 상하셨어.”

    아들의 말에 강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면 참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윗세대분들이었다.

    “마음의 준비는 하는 게 좋겠어요….”

    강우의 말에 아들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김일국의 딸은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몸을 돌렸다.

    “알겠다. 그리고 이거….”

    김일국 아들이 품에서 한 권의 수첩을 꺼냈다. 닳고 닳은 가죽 덮개가 강우의 손에 닿았다.

    “이건….”

    “한번 읽어봐.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에게 전해주라고 한 물건이야.”

    강우가 수첩을 열었다. 수첩 안에는 세월이 흘러 흐릿해진 글씨들이 적혀있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글씨였다.

    -나는 의열단 소속으로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싸웠다.-

    첫 문장을 읽은 강우가 단숨에 수첩을 넘기기 시작했다. 수첩은 김일국의 선친인 독립운동가 김성진의 것이었다. 김성진은 의열단에 소속돼 활동했던 분이었다. 할아버지보다 윗세대의 독립운동가였다.

    사라락. 사라락.

    강우가 침음성을 흘렸다. 수첩은 김성진의 회고록이었다. 그곳에는 의열단 활동을 했던 기억과 같은 의열단원들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수첩이 끝나갈 무렵 김성진의 한이 담긴듯한 문장이 있었다.

    -적은 내부에 있었다….-

    그 순간,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그리고 눈앞으로 어두운 상해의 뒷골목이 나타났다.

    탁탁탁.

    누군가가 어두운 골목을 뛰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에는 절박함과 두려움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잡아라! 조센징!”

    커다란 고함과 함께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사복을 입은 일본 순사였다. 순사들은 남성을 맹렬히 쫓았다. 남성은 골목골목을 빠르게 빠져나가 한 건물에 도착했다.

    탕탕.

    “날세! 김성진! 빨리 문을.”

    덜컥.

    문이 열리고 쫓기던 남성 김성진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쓰러지듯 바닥을 우당탕 굴렀다.

    “큭….”

    김성진은 한 손으로 복부를 틀어막고 있었다. 틀어막은 복부에서는 피가 울컥 흐르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김성진에게 한 명의 남성이 다가왔다.

    “김 동지, 괜찮은가?”

    “폭탄 운반에 실패했네. 저들이 우리 계획을 다 알고 있었어.”

    “다른 동지들은?”

    김성진이 신음성을 흘렸다. 폭탄을 운반하던 동지들은 모두 순사들의 총탄에 목숨을 달리했다.

    “......”

    김성진이 침묵했다. 어둠에 반쯤 가려진 남성의 입꼬리가 뱀처럼 휘어져 올라갔다. 순간, 김성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탕!

    김성진이 망설임 없이 품에 있던 총을 꺼내 남성을 쏘았다. 그와 동시에 숨어있던 비밀장소의 문이 콰앙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제길!!”

    김성진이 건물 안의 비밀통로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빠르게 몸을 숨겼다.

    “칙쇼! 찾아라!”

    “협조자가 죽었습니다!”

    비밀통로에 숨어 있던 김성진이 숨을 죽였다. 자신의 예상대로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심어진 밀정이었을 수도….’

    김성진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언제부터인가 의열단 내부의 정보가 마구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들도 조선 내에 밀정을 심어 놓았다. 지금, 이 순간은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모를 정도로 치열한 정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

    김성진은 다짐했다. 반드시 내부에 있는 밀정을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말이다. 이윽고 김성진의 의식이 툭 하고 끊겼다.

    “으음….”

    강우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기억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김성진의 의지가 생생히 느껴졌다. 강우가 수첩을 마저 읽었다. 수첩에는 김성진이 평생을 고심하고 찾아낸 밀정으로 예상되는 명단이 있었다. 하지만 김성진은 염원을 이루지는 못했다. 숨겨져 있는 밀정을 찾아내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더 나중의 기록이 있다.’

    바로 독립군 사령부에서 찾은 장부였다. 그 장부에는 후대에 밝혀낸 밀정들의 정보가 적혀있었다. 강우가 수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수첩과 장부의 정보를 합친다면 거의 완벽하게 숨겨진 밀정을 찾아내는 게 가능해.’

    하지만 강우는 장부를 세상에 밝히는 것을 미루고 있었다. 광복 이후 그들은 대한민국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후손들은 대한민국의 이너써클을 이루고 있었다. 아직 강우에게는 힘이 부족했다.

    ‘저들의 방해 공작을 이길 만큼의 힘이 생긴 후에….’

    그 후에 강우는 장부를 세상에 내놓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강우는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강우가 깊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눈앞에 초췌한 두 사람의 모습에 가슴 깊이 울컥 솟아나는 감정이 올라왔다.

    ‘이런 분들이 잘살아야 하는 건데 말이야….’

    강우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두 분 식사는 하셨어요?”

    김일국의 아들과 딸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쓰러졌으니 밥이나 먹을 정신이 있겠는가. 그나마 강우가 도착하고 나서야 일부 근심을 덜어놓은 상태였다.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인 부분이든 말이다.

    “맛있는 밥 사드릴게요. 저랑 같이 나가요.”

    “그럼 아버지는….”

    아들이 망설이며 중환자실을 바라보았다. 강우가 김일국 아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최고의 의료진이 곁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중환자실이라 면회가 쉽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두 분도 기운을 차리셔야죠.”

    “알겠어.”

    강우와 두 사람이 병원 밖으로 나갔다. 강우는 두 사람을 위해 뜨끈한 보양식을 먹으러 갔다. 그리고 하염없이 쏟아내는 두 사람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지금 두 사람에게는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가장 필요해 보였다.

    * * *

    부우웅.

    늦은 밤. 강우의 승용차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능숙하게 주차를 마친 강우가 차에서 내렸다. 쌀쌀한 공기만큼이나 강우의 마음도 착 가라앉아있었다.

    덜컥.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할아버지와 최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에서 연락은 드렸지만, 김일국이 걱정돼 잠을 설치고 계신 듯했다.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강우를 보고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국, 그 사람은?”

    “상태는 괜찮은 게야?”

    두 할아버지의 질문에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래 버티기 힘드실 거 같아요.”

    할아버지와 최준이 침음성을 뱉어내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우가 두 할아버지의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일단 서울대 병원에서 신경을 많이 쓰겠다고 했어요. 의식이라도 돌아올 수 있는 게 지금은 최선이라고 했어요.”

    “그래, 마지막 가는 길에 한 마디 대화라도 나누고 싶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할아버지와 최준의 시선이 스르륵 수첩으로 향했다.

    “강우야, 이게 뭐냐?”

    “김일국 할아버지가 보관하고 계시던 선친이신 김성진 독립운동가님의 일기장이에요.”

    할아버지가 큰 관심을 보이며 수첩을 집었다. 수첩을 펼친 할아버지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강우야, 할아버지 돋보기 좀 다오.”

    “네.”

    강우가 안경집에서 돋보기안경을 꺼내 할아버지에게 드렸다. 그리고 최준의 돋보기안경도 챙겨 드렸다. 두 분 할아버지가 나란히 앉아 수첩을 읽기 시작했다.

    사라락. 사라락.

    수첩을 모두 읽은 할아버지가 침음성을 뱉어냈다.

    “오랜 시간이었다. 항일 투사들과 내부 밀정의 싸움은 항일 운동의 시작과 끝까지 함께였어. 그리고 광복을 한 이후도 마찬가지다. 독립운동가가 밀정이 되고 밀정이 독립운동가가 된 경우는 셀 수도 없어.”

    “그래, 광복 이후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역사 청산이 없었지.”

    강우가 눈을 빛냈다.

    “제가 할 겁니다.”

    강우의 말에 할아버지와 최준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물론 어려운 일인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힘을 키우는 중이고요. 동양 무역을 크게 만들고 대진 그룹을 제 품에 품는 것도, 다 같은 이유입니다. 제게 필요한 건 약간의 시간이에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할아버지와 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할애비는 너를 믿는다.”

    “그래 강우야. 급하게 생각할 거는 없다. 이미 세월이 많이 흘렀어. 천천히 하나씩 해나가도록 하자꾸나.”

    두 분 할아버지의 말에 강우의 남아있던 조급함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네, 명심할게요.”

    “시간이 늦었구나.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어라.”

    할아버지와 최준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셨다. 거실에 앉아 잠시 생각을 하던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사무실로 출근한 강우가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한쪽에 놓여있는 금고로 다가갔다.

    삐삐.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덜컥하고 금고가 열렸다. 강우가 그 안에 잘 보관된 나무상자를 꺼냈다. 책상 위에 나무상자를 올려놓은 강우가 조심히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독립군 사령부에서 발견한 한 권의 장부가 있었다.

    ‘음….’

    강우가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장부 옆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수첩과 장부를 비교하며 읽기 시작했다.

    사라락. 사라락.

    이윽고 강우가 탄성을 뱉어냈다. 수첩과 장부에서 언급하고 있는 밀정 의심자들의 명단이 상당 부분 겹치고 있었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이 두 개가 상호 보완적으로 그들을 지칭하고 있다.’

    강우가 수첩과 장부를 같은 나무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금고에 넣고 잠갔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꼭 어르신의 못다 한 사명을 끝내겠습니다.’

    강우가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쓸쓸히 돌아가신 고 김성진 독립투사를 기리며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뚜르르. 뚜르르.

    이윽고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강우야 나야. 나 지금 오디션 보러 왔는데 너무 떨려.-

    이나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우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이나은이 광고 모델 오디션을 보는 날이었다.

    “지금 갈까?”

    -어? 아니야! 오늘 회사 일도 있고 바쁘잖아. 그냥 목소리 들으려고 전화했어. 네 목소리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거든.-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두 연인은 서로의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 잘할 거야. 할 수 있어. 이번 CF는 우리 나은이 거다! 파이팅!”

    -풉…. 그게 뭐야….-

    이나은이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가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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