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82/402)
  • 춘배는 버려!

    왁자지껄한 호프집의 안쪽에 친구들이 둘러앉았다. 작년 겨울 이후 다시 방문한 호프집은 분위기도 그대로였다. 강우와 친구들은 자리도 일 년 전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누가 너 굶기냐?”

    강우의 질문에 안주를 우걱우걱 입에 넣던 박광웅이 고개를 들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친구들의 멍한 표정이 보였다. 박광웅이 멋쩍게 웃으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오늘 종일 굶었다. 지혜가 아직 집에 오지 않았거든.”

    “어머님은?”

    “아버지랑 잠깐 고향에 내려가셨다. 일이 있어서.”

    박광웅의 표정이 조금은 어두워졌다. 하지만 강우와 친구들은 무슨 일인지 묻지는 않았다. 오직 남재식만이 무언가를 아는 듯 덩달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주문하신 오백 다섯 잔 나왔습니다.”

    친구들의 앞으로 맥주가 놓였다. 박광웅이 맥주를 힐끗 바라보더니 강우를 향해 내밀었다.

    “나 오늘은 술 안 마실래. 네가 마셔라.”

    “한 잔은 괜찮아.”

    “아니야. 한 잔으로 안 끝날 거 같아서 그래.”

    박광웅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수능이 며칠 안 남았으니 컨디션 조절을 하는가 보다. 강우와 친구들이 맥주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수능 준비는?”

    강우가 안주를 집어 먹으며 물었다. 박광웅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일 년 동안 열심히 준비는 했는데…. 남들은 삼 년을 공부하고 또 재수도 하고 그러잖냐.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겠다.”

    의미 없이 지나쳐버린 3년의 세월 탓일까. 박광웅은 자신감이 없는 표정이었다.

    “공부한 시간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공부했냐가 더 중요하지. 열심히 했으니까 좋은 결과 나올 거야. 시험장 들어가서 긴장하지나 마라.”

    강우의 격려에 박광웅의 안색이 조금은 밝아졌다. 순간,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강우가 한쪽 손으로 미간을 살짝 눌렀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친구들이 강우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친구들이 보기에도 요즘 강우의 스케줄은 인간이 감당하기 힘들어 보였다. 강우가 손을 들며 괜찮다는 표현을 했다. 친구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냥 살짝 두통이야. 신경을 쓰지 말고 먹어.”

    친구들이 잠시 강우를 보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금세 왁자지껄해지는 친구들 사이에서 강우는 미간을 좁힌 채 있었다.

    ‘갑자기 이 기억이….’

    강우의 머릿속으로 재수를 했던 미래의 기억이 떠올랐다. 미래의 기억 속 강우는 재수를 했었다. 물론 제대로 재수 준비도 하지 않고 수능만 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경기도에 있는 4년제 대학을 다녔었다.

    ‘독립유공자 가산점 제도가 아니었으면 못 붙었을 대학이었지.’

    그리 유명하지는 않은 대학이었다. 미래의 기억 속 강우는 나이가 들며 공부를 등한시했던 과거를 후회했었다.

    ‘가진 것도 뒷배도 없는 나에게 유일한 동아줄이 학력이라는걸. 왜 몰랐는지….’

    강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중소기업을 다니며 힘들게 살았었다. 흙수저 그 자체인 강우는 3년을 게을리한 대가를 처절히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 수능에 대한 기억이 또렷이 떠올랐다.

    ‘심지어 수능 문제 하나하나까지 말이야.’

    강우가 차분히 기억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박광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벌어진 일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수능 시험문제를 전부 알고 있으니 내가 알려줄 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또 모른 척 그냥 지나치기도 뭐하고….’

    강우는 박광웅에게서 힘들게 살았던 미래의 자신을 엿보고는 했다. 그 순간, 강우가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는 씩 웃었다.

    “뭐야? 머리 아프다고 찡그리고 있더니 갑자기 웃어?”

    옆에 앉아있던 신원주가 강우를 이상한 놈 보듯 바라보았다. 김춘배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저러잖아. 갑자기 머리 아프다고 하다가 막 혼자 실실 웃고.”

    “시끄럽고 술들이나 마셔.”

    강우가 친구들의 공격을 단숨에 반격했다. 그리고는 박광웅을 바라보았다.

    “수능 마지막 총정리는 했냐?”

    “아직. 그거 이틀 전부터 하는 게 좋다고 해서.”

    마지막 총정리는 그동안 공부했던 문제집을 빠르게 훑어보는 방법이었다.

    “그럼 그거 내가 도와줄까? 언제 날 잡아서 한번 내가 싹 정리해줄게.”

    “정말?”

    박광웅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강우가 누구던가? 수능 최초 만점에 서울대 수석 입학 그리고 1학기 전체 수석에 빛나는 수재였다. 바쁘게 일을 병행하면서도 공부 역시 놓치지 않아 서울대에서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라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리기도 했다.

    “어, 진짜.”

    “나야 좋기는 한데….”

    박광웅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에게는 늘 받기만 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요즘 강우가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럼 해. 뭘 자꾸 망설여.”

    “고마워.”

    박광웅이 고맙다며 강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 강우가 화들짝 놀라며 곰 같은 두툼한 손을 피했다. 친구들이 그런 강우를 보며 또 혀를 내둘렀다.

    “대단해. 하여간.”

    강우와 박광웅은 바로 다음 날로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약속을 잡고 술을 마시던 중 박광웅이 물었다.

    “그런데 정호는 왜 안 온 거야?”

    “정호 요즘 바쁘다.”

    강우의 말을 신원주가 거들었다.

    “정호 사시 준비하잖아. 최대한 빨리 사시 합격하고 싶다고 하더라.”

    “사…. 사시를 벌써? 아직 1학년인데?”

    박광웅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빨리 합격해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렇구나. 하긴 정호 그놈이라면 불가능은 아닐 거다. 공부라면 숨 쉬는 거랑 동급으로 생각하는 놈이니까.”

    박광웅의 말에 다른 친구들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난 여름휴가 끝나고 연정호는 친구들에게 사시 도전을 선언했다. 그 이후로 연정호는 무섭도록 공부에 몰두했다.

    “맞아. 이놈이 말을 안 해서 그랬지 사실 대학 입학하는 순간부터 준비하고 있었더라고.”

    “강우랑 나도 학교에서 스치듯 보는 게 전부야. 이놈이 또 고등학생 때처럼 밥 먹으면서도 공부하더라. 아마 화장실서도 공부 걸어가면서도 공부할걸?”

    신원주가 책을 들고 좀비처럼 캠퍼스를 배회하는 연정호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춘배가 슬쩍 잔을 내밀었다.

    “으으~ 나는 절대 그렇게는 못 살아. 일단 마시자.”

    강우와 친구들이 김춘배의 말에 공감하며 맥주를 벌컥 마셨다.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점점 달아올랐다.

    “우리 피시방 갈까?”

    강우의 제안에 친구들이 대번에 좋다고 했다. 요즘 들어 게임에도 재미를 붙이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강우와 친구들이 근처의 피시방으로 향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매캐한 담배 연기가 강우를 반겼다.

    “으…. 담배 냄새.”

    흡연하지 않는 신원주와 남재식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반면 담배를 피우는 김춘배와 박광웅은 재떨이부터 챙겼다.

    “저기 자리 있다.”

    한쪽에 일렬로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강우와 친구들이 자리로 가서 앉았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수 좀 사 올게.”

    “나도 같이 가.”

    남재식이 강우를 따라 일어섰다. 강우와 남재식이 음료수를 사러 가며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면에는 온통 스페이스 크레프트가 실행되고 있었다.

    “다들 스페이스 크레프트만 하네.”

    남재식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강우가 말없이 남재식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두 사람이 음료수를 사 자리에 돌아왔다.

    “오? 이거야? 네가 개발했다던 게?”

    남재식의 옆자리인 박광웅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잠깐의 틈을 내서 티니지를 하고 있었나 보다.

    “어, 얼마 전부터 정식 서비스 시작했다.”

    “내 친구 대단하다. 게임 개발자라니.”

    박광웅이 고생했다며 남재식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남재식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했다.

    “어디 한판 붙어볼까?”

    친구들은 먼저 스페이스 크레프트를 실행했다. 친구들이 모였으니 팀을 먹고 게임을 하기로 했다. 다만 숫자가 다섯 명인 게 문제였다.

    “아 정호 있었으면 딱 맞는데.”

    “그러게.”

    친구들이 연정호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결국, 팀은 강우와 김춘배가 한팀 그리고 나머지 셋이 한팀을 하기로 했다. 강우의 실력이 프로선수급이었으니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내기하자. 이차 쏘기 어때?”

    “좋지.”

    신원주와 남재식이 실실 웃으며 좋아했다. 박광웅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3:2인데 내기하면 우리가 이기는 거 아니냐?”

    “광웅아, 상대방이 강우라고 박강우. 인간 만능설의 창시자가 될 수도 있는 박강우. 사실 우리 네 명이 한팀을 하는 게 맞아.”

    말을 마친 신원주가 김춘배를 힐끗 바라보았다. 김춘배는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낯설어하는 중이었다.

    “나…. 이거 진짜 못하는데.”

    신원주가 씩 웃었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김춘배를 선심 쓰듯 던져준 것이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좋아. 그럼 3판 2선승으로 내기는 2차에 노래방까지.”

    “콜!”

    신원주와 남재식이 좋다며 응했다. 강우가 김춘배에게 말했다.

    “너는 그냥 이거저거 해보고 놀아.”

    “그래?”

    김춘배는 영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강우가 상대 팀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 오늘 실수한 거야.”

    그 말에 신원주와 남재식이 불길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게임은 시작이 되었다.

    띠. 띠. 띠.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 소리가 끝나고 게임 화면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상대 팀이 된 친구들의 눈이 번뜩였다.

    “야! 강우만 찾아!”

    “춘배는 버려!”

    강우가 실소를 흘리며 마우스를 놀렸다. 이윽고 넓은 지도에서 친구들이 강우를 찾았다. 그리고는 비명을 질렀다.

    “야! 여기다 네 시에 박강우! 있는 병력 다 끌고 쳐들어와!”

    “오케이!”

    친구들의 병력이 일제히 강우를 향해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강우는 능숙하게 입구를 막고 벙커를 이용해 공격을 막아냈다. 친구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시간을 준다면 강우를 이기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제길! 뚫어!”

    “일꾼도 다 보내!”

    친구들이 마지막 힘을 짜내 강우를 향해 쳐들어왔다.

    “야! 이거 공격하는 사람들 어디 갔나?”

    강우가 여유롭게 웃으며 친구들을 놀렸다. 힐끗 옆을 바라보니 김춘배는 하나둘씩 병력을 뽑아 이리저리 움직이며 놀고 있었다.

    “그래, 그거 계속 뽑아. 그래서 내가 가자고 하면 따라와. 알겠지?”

    “어어.”

    김춘배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병력을 차분히 모은 강우의 역습이 시작됐다. 김춘배도 강우를 따라 맵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신원주와 남재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광웅이 차례대로 지도에서 지워졌다.

    “이야! 이거 엄청 재밌는데?”

    김춘배는 신이 났다. 강우를 따라다니며 친구들의 기지를 박살 내는 것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으흐흐! 역시 뭘 하든 간에 강우랑 팀 먹는 게 최고지!”

    김춘배의 말에 친구들이 이를 악물었다.

    “이번 판은 졌다. 다음 판 해!”

    또 다음 판이 이어졌고, 역시나 강우와 김춘배의 승리였다. 신원주와 남재식이 강우를 보며 탄식을 뱉어냈다.

    “하…. 진짜 이길 수가 없어.”

    박광웅은 멍한 표정이었다. 사실 재수를 하느라 게임과는 멀리 지낸 박광웅이었다. 하지만 국민 게임의 반열에 올라선 스페이스 크레프트를 모를 수는 없었다. 틈틈이 어느 정도 게임을 즐기기도 했었다.

    “와…. 진짜 프로급이라더니 대박이네. 하긴 구단주기도 하니까.”

    박광웅이 감탄을 하며 말했다.

    “우리 생각난 김에 재식이가 개발한 게임도 해보자.”

    “좋지.”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티니지를 실행했다. 캐릭터 생성 화면이 나타나고 친구들이 하나둘씩 자신의 취향에 맞는 클래스를 선택했다.

    “이야~ 이 게임 엄청 재밌는데?”

    친구들이 의도적으로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더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더욱 과장되게 게임이 재밌다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 이거 티니지네?”

    몇몇 사람들은 티니지를 알아보았다. 이윽고 피시방 화면이 하나둘씩 티니지로 바뀌어 갔다. 친구들이 남재식을 보며 씩 웃었다. 남재식이 슬쩍 엄지를 들었다.

    “고맙다. 다들 응원해 줘서.”

    남재식이 감동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남재식을 박광웅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 이거 봐라.’

    강우가 눈을 빛내며 남재식과 박광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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