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79/402)
  • 다 같이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일인데요.

    덜컥.

    강우가 사무실 한쪽의 창문을 열었다. 창문으로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불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으아….”

    강우가 의자에 앉아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눈앞에 놓인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뜨거웠던 여름만큼이나 동양 무역의 하루하루는 뜨거웠다.

    ‘설비 증설은 인제 끝났고 본격적으로 생산에 돌입하기로 했지.’

    총 세 군데의 가공업체가 동양 무역의 투자를 받았다. 그리고 지분을 넘겨주고 비정규직 사원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도 성공했다. 이제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게 된 수많은 근로자를 생각하니 강우의 마음이 푸근해졌다.

    ‘일단 조미김의 수출을 시작으로 스낵김은 시장을 차근히 공략해 나가야지.’

    강우가 생각하는 스낵김의 주요 타깃은 한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권이었다. 벌써 강종민 과장이 동남아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판매망을 물색하는 중이었다. 현지의 여러 기업이 큰 관심을 보였다.

    ‘음…. 현지 업체를 끼고 시작하는 거보다는 우리가 직접 판매를 하는 게 좋기는 한데 말이지.’

    하지만 역시나 외국에 진출해 안정적인 유통망을 얻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특히나 신생 기업이라면 말이다. 강우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미래의 기억에서 아버지는 동남아와도 사업을 진행했었다. 그때, 분명히 제법 영향력 있는 인물을 알았던 거 같기는 한데….’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기억의 트리거를 작동하려면 직접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관련된 정보를 훑어보던가 말이지.’

    강우가 조만간 동남아에 관련된 정보들을 수집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라락.

    강우가 다른 서류를 힐끗 바라보았다. 일본의 김치 사업은 순항 중이었다. 생산량을 늘리는 족족 일본 곳곳으로 팔리고 있었다. 덕분에 조금 느긋하게 생각하던 제2 김치 공장의 건설도 속도를 내는 중이었다. 새 공장이 완공되고 본격적으로 김치 생산을 시작한다면 일본 김치 사업은 동양 무역의 손에 들어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확실한 캐쉬카우가 있으니 좋군.’

    일본에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외화는 아직 환율이 널뛰기하는 지금 상황에서 호재였다. 더군다나 강우는 얼마 전 더 큰 호재를 얻었다. 일본에서 변호사가 한국을 방문해 하루오와 기무라의 유산을 사단 법인 광복에 상속하는 일을 마무리했다. 이제 하루오와 기무라의 유산은 사단 법인 광복에 귀속돼 예정된 방식으로 사용될 것이었다.

    ‘소송을 책임질 변호인단을 꾸려야 하는데. 이건 정호한테 한번 알아보라고 해야겠네.’

    아직 1학년이었지만, 서울대 법대생인 연정호였다. 선배들의 라인을 타고 위로 올라가다 보면 분명 뛰어난 인재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미래의 기억에서도 해결이 되지 않은 강제노역과 위안부 문제였다. 강우는 힘들고 긴 싸움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잘들 돌아가셨으려나.’

    일을 마친 하루오와 기무라도 일본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네 분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강우는 하루오와 기무라가 다시 한국에 올 거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네 분이 그렇게 잘 지내셨는데 말이야.’

    강우가 그 장면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네 분이 원한다면 다시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강우는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똑똑,

    그때, 사무실이 열리고 황규범 부장이 들어왔다.

    “강우 이사, 바빠?”

    “아니요. 괜찮습니다.”

    황규범 부장이 손에 들고 있던 음료 캔을 살짝 흔들었다.

    “너무 종일 일만 하는 거 아니야? 옥상에 잠깐 쉬러 가는 게 어때?”

    “좋죠.”

    강우와 황규범 부장이 회사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건물 옥상은 사원들을 위한 휴게장소로 잘 꾸며져 있었다. 곳곳에 조명도 설치하고 정원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강우와 황규범 부장이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11월의 쌀쌀한 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조금은 거칠게 스쳐 지나갔다.

    “으으…. 이제 추워지네. 곧 겨울이겠어.”

    “그러게요. 점점 추워지네요. 아 참 재환이는 외고 간다고 했죠?”

    아들을 언급하자 황규범 부장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응. 맞아.”

    “좋은 결과 있으면 좋겠네요.”

    “나도 떨리네. 이번 일 겪으면서 강우 네가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또 느꼈다.”

    황규범 부장이 몸을 살짝 떨었다. 강우의 하루 스케줄을 떠올리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우가 그런 황규범 부장을 향해 슬쩍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아니야 그런 거. 그냥 네가 요새 너무 무리하는 거 같아서 잠깐 쉬게 해주려고 오자고 한 거야.”

    “그랬나요? 저 멀쩡한데.”

    강우가 팔을 들어 멀쩡하다는 듯 몸짓을 취했다. 황규범 부장이 씩 웃었다.

    “진짜? 젊어서 그런가? 가끔 나는 네가 슈퍼맨 아닌가 싶어.”

    “젊어서 그런 거죠.”

    “우리 아들은 공부 조금 하고도 피곤하다고 골골하는데.”

    “하하….”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황규범 부장의 말처럼 엄청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강우였다. 개강한 상태라 오전에는 학교를 오후에는 동양 무역과 대진 그룹을 오가고 있었다. 주말에는 밀린 사단 법인의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정 힘들면 나한테 말해. 내가 업무량 덜어 줄 수 있으니까.”

    “네, 알겠어요.”

    “강우 이사.”

    “네.”

    황규범 부장이 조금은 민망한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 직원들 연봉 올려준 거 말이야. 다들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 아직 연봉 협상 시기도 아닌데….”

    “그래요? 회사 수입이 몇 배로 늘었으니까 당연하죠. 다 같이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일인데요.”

    황규범 부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회사가 커져도 재산이 늘어도 명예를 더 얻어도 늘 한결같은 강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진짜 내가 무슨 복이 있어서 이 회사에 들어왔는지…. 아직도 처음 면접을 보러 왔을 때가 떠오른다.”

    “그러게요. 저도 기억나요. 부장님이 우리 회사 들어온 게 저희한테도 큰 복이었죠,”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황규범 부장이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강우의 말은 사실이었다. 황규범 부장은 완벽한 중간 임원이었다. 사무실의 분위기를 능숙하게 조절하고 업무적으로도 일당백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이제 조만간 좋은 소식도 있을 거예요.”

    “그…. 그래?”

    황규범 부장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직장인에게 좋은 소식이라는 게 뭐가 있겠는가? 월급이야 얼마 전 올랐으니 승진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저 더 많이 도와주세요. 이제 어지간한 회사 일들은 전부 부장님 선에서 결제해주시고요.”

    “그래, 나만 믿어. 동양 무역은 내 집이나 다름없으니 최선을 다해 일하마.”

    “네, 우리 같이 동양 무역을 큰 회사로 만들어봐요.”

    황규범 부장의 눈빛에 결연한 의지가 서렸다. 강우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돈독해지는 직원들과의 관계가 참 좋았다. 마치 손안에 들려있는 따듯한 캔 음료처럼 강우의 마음도 훈훈해졌다.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이 한동안 자리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황규범 부장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맞다. 조금 있으면 생일이지?”

    “네, 맞아요.”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맞다고 했다. 황규범 부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뚜르르. 뚜르르.

    그 순간,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수화기에서 이재원의 상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야. 지금 미팅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다.-

    “어떻게 됐어요?”

    -민자사업 건 우리가 땄다.-

    강우가 씩 웃음을 지었다. 이재원은 오늘 용산역 민자 개발사업 건을 두고 한국철도공사와 미팅을 했었다.

    “잘됐네요. 여기 업무 마치고 잠깐 들를게요.”

    -천천히 와도 돼.-

    이재원이 강우를 걱정하듯 말했다. 이재원 역시 요즘 강우의 초인적인 스케줄을 잘 알고 있었다.

    “네, 알겠어요.”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황규범 부장을 향해 말했다.

    “그만 들어가요. 업무 처리하고 대진 쪽에 넘어가 봐야 할 거 같아요.”

    “그래, 알겠어.”

    강우와 황규범 부장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강우는 남은 업무를 빠르게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방을 나서니 직원들 역시 업무에 한창이었다. 강우가 힐끗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퇴근 시간인 6시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다들 업무 마무리하고 퇴근 준비하세요.”

    강우가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외투를 챙기며 말했다.

    “네, 이사님.”

    직원들이 하나둘씩 업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절대 야근이 없는 동양 무역의 흔한 풍경이었다.

    “그럼 먼저 갑니다.”

    강우가 사무실을 벗어나며 인사했다. 직원들도 앞다투어 강우를 향해 인사를 했다. 사무실을 벗어나자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초겨울의 바람이 더 쌀쌀해져 있었다.

    탁.

    강우가 아버지의 승용차에 올라탔다. 아버지가 중국에 가신 이후로는 강우가 사용 중이었다. 승합차는 집에 세워져 있었다. 많은 사람을 태울 때만 이용하고는 했다.

    부우웅.

    승합차는 빠르게 달려 대진 그룹의 본사가 있는 종로에 도착했다. 명동에서 종로는 그리 멀지 않았다.

    * * *

    강우가 로비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반겨주었다. 대진 그룹 본사 건물의 밤을 책임지는 경비분이었다.

    “강우야, 왔니.”

    “안녕하세요. 오늘도 밤새 고생이시겠어요.”

    “나야 늘 하는 일인데.”

    지긋이 나이 든 경비분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강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전략본부실로 향했다.

    띵.

    문이 열리고 강우가 복도를 가로질러 전략본부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의 안쪽에는 아직 수많은 직원이 치열하게 업무 중이었다. 동양 무역과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궁극적으로는 대진 그룹도 동양 무역 같은 업무수행 방식으로 변경하고 싶은데 말이지.’

    물론 멀지 않은 시기에 가능할 것이었다. 이재원도 강우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동안의 관습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 없을 뿐이었다.

    “이사님!”

    강우의 호칭도 바뀌어 있었다. 이철금 회장은 강우의 능력에 크게 감탄했다. 그리고 전략본부실을 통째로 맡겼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인 강우가 대기업 전략본부실을 손에 얻었지만, 그 누구도 반대하거나 불만을 품지 못했다. 그만큼 강우가 이루어 놓은 것이 많았다.

    “다들 수고하시네요.”

    강우를 발견한 직원들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양손 가득 서류를 든 직원들은 강우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강우가 사무실의 안쪽에 있는 전략본부장실에 들어갔다.

    똑똑.

    외투를 벗기가 무섭게 직원들의 러쉬가 시작됐다. 강우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얼핏 보이는 문틈으로 다른 직원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최근 대진 그룹의 대소사는 모두 전략본부실을 거쳐 가고 있었다. 이철금 회장의 특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우의 손을 거치지 않은 사업 건은 아예 진행도 하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대진 건설사 미분양 건으로 서울시 도시개발공사와 최종 미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직원이 강우의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강우가 서류를 넘겨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이재중에게 전권을 넘겨받은 강우는 건설사의 심폐소생에 돌입했다. 그중에서 가장 우선시된 것이 바로 미분양 주택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언제죠? 제 일정에 맞춰주세요. 이번 미팅은 제가 직접 들어갑니다.”

    “네, 이사님. 일정 조율하겠습니다.”

    강우의 말에 직원 한 명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수첩 하나를 꺼내 들어 살폈다. 대진 그룹의 모든 직원에게 필수 품목이라는 강우의 일정표였다. 그곳에는 강우의 강의 시간부터 시작해 다른 모든 일정이 적혀있었다.

    똑똑.

    사원이 나가자 다른 사원이 기다렸다는 듯 들어왔다. 그리고는 또 강우의 책상 위에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멀티플렉스 2호점과 3호점이 착공되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오픈 예정일에 맞추는 게 아닙니다. 조금 늦어지더라고 안전하고 완벽하게 지어주세요. 그리고 멀티플렉스 내부에 입점할 상점들도 신중히 골라 주시고요.”

    “네, 이사님.”

    그렇게 한두 명씩 사원들이 들어와 결재 서류를 놓고 나갔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전략 본부장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후….”

    강우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서류를 하나씩 다시 점검했다. 바쁘다고는 하지만 꼼꼼한 업무처리를 해야 했다.

    똑똑.

    “누구세요?”

    강우가 업무에 집중한 채 말했다. 문이 열리고 이재중이 얼굴을 슬쩍 내밀었다.

    “강우야~”

    잔뜩 친근한 목소리를 내는 이재중에 강우의 시선이 돌아갔다. 이재중이 양손에 먹을 것을 들고는 씩 웃고 있었다.

    “오셨어요?”

    “우리 강우, 밥 굶었지? 내가 초밥 사 왔다.”

    이재중이 방 안으로 들어와서는 탁자 위에 사 온 것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고 이재원이 들어왔다.

    “강우야, 밥 안 먹었지? 내가…. 어? 형?”

    이재원이 양손에 먹을 것을 들고는 나타났다. 강우가 피식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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