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6/402)
  • 너희를 누가 말리니.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항에 강우와 아버지가 도착했다. 아직 비행기 시간이 남았기에 두 사람은 근처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다란 캐리어를 앞에 두고 아버지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강우가 아버지를 힐끗 바라보았다.

    “가기 싫으시죠?”

    아버지가 스르륵 고개를 돌려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강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아빠가 가서 할 일이 많아. 걱정하지 말아.”

    “네. 그럼 먼저 상해로 가시는 거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상해로 가서 바로 사령부 공사 현장에 방문할 생각이야. 거기서 상해 시장이랑 만나서 회의 좀 하고 그다음에 북경으로 넘어가야지.”

    광복군 사령부의 복원 공사는 한참 진행 중이었다. 가능한 빠른 기간에 복원을 마치고 박물관 형식으로 개방을 할 예정이었다. 상해 시장을 만나는 것은 투자 때문이었다. 강우의 중국 법인과 대진 그룹은 상해에 대규모 투자를 할 예정이었다.

    “아버지 상해 투자 건 마무리되면 저번에 제가 알려드렸던 회사들에 투자 가능 여부 꼭 알아봐 주세요.”

    “어디 보자.”

    아버지가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 수첩에는 강우가 꼼꼼히 정리해준 중국의 투자 회사 명단과 투자 시기 그리고 투자할 액수 정도가 적혀 있었다. 강우가 중국 상황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얻어낸 미래의 기억들이었다.

    “그런데 강우야, 이 수첩대로만 하면 된다 이거지?”

    아버지가 수첩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나도 세세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모든 정보가 담겨있었다. 강우가 속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태연한 척 말했다.

    “네, 제가 중국에서 얻은 정보랑 인터넷이랑 검색해서 만든 거예요. 대진 그룹 투자팀의 조언도 받았고요.”

    “그래?”

    아버지가 이제는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뱉어냈다.

    “아무튼, 강우야, 아빠 가고 나면 네가 또 바빠지겠구나. 이제 곧 개강인데 괜찮을지 모르겠어.”

    “저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 수강 신청도 잘했어요. 대부분 아침에 강의 몰아놔서 강의 듣고 일 보면 돼요.”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대견스럽다는 듯 강우를 바라보았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1학기 과 수석을 놓치지 않은 강우였다.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괴물 같은 아들이었다.

    “그래, 아빠는 항상 너를 믿지. 그래서 이렇게 오래 집을 비울 수도 있는 거고.”

    “그럼요. 걱정하지 마시고요. 가서 건강 꼭 챙기세요. 혼자 계신다고 끼니 거르지 마시고요.”

    “알겠어.”

    이윽고 비행기 시간이 다 되었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캐리어를 끌고 체크인카운터로 향했다. 그곳에서 짐을 부치고 탑승권을 발권했다.

    “강우야, 그럼 아빠 간다.”

    “네, 잘 다녀오세요.”

    아버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양팔을 벌렸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아버지를 껴안았다. 두 사람이 잠시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흠흠…. 진짜 간다.”

    “네.”

    아버지가 조금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강우가 잠시 아버지가 떠난 곳을 바라보았다. 미래와는 너무나 달라진 아버지와의 관계는 늘 묘한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잘 다녀오세요. 아버지.’

    강우가 속으로 아버지를 한 번 더 배웅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공항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주차장에 도착해 한참이나 하늘을 바라보았다.

    슈우우우웅.

    하늘로 비행기가 한 대씩 날아갔다. 그중에는 아버지가 탄 비행기도 있을 것이었다. 이윽고 강우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우가 현관으로 들어섰다. 어머니가 방에서 나왔다.

    “아빠는?”

    “잘 가셨어요. 가족들이랑 떨어져서 조금 힘드시긴 한가 봐요.”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그러시겠지. 가족이라면 얼마나 우드드하는 아빠인데. 이번 여행도 강우 너한테 좋은 추억 만들어 주고 싶다고 매일 밤 얼마나 계획을 짜고 MC 연습도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데.”

    “정말요?”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만 기다려봐.”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연습장을 하나 들고나왔다.

    “한번 봐봐.”

    강우가 연습장을 펼쳤다. 그곳에는 빽빽이 글씨가 적혀 있었다. 모두 아버지의 필체였다.

    “와….”

    연습장에는 여행 스케줄을 비롯해 가족 오락관에서 할 게임의 내용 그리고 멘트까지 적혀 있었다. 강우가 한 장씩 한 장씩 연습장을 넘겼다. 한 권을 가득 채울 정도로 고민하고 고민한 아버지의 흔적이 보였다.

    “아빠가 이번 여행에서는 너 신나게 놀게만 해주고 싶다고 혼자 다 준비한 거야.”

    “그랬군요.”

    “그럼, 밤마다 방에서 MC 보는 연습하면서 나보고 매일 어색하지 않냐며 묻는대, 아니라고 해주느라 혼났어.”

    어머니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강우가 아버지를 떠올리며 마음이 찌르르해짐을 느꼈다.

    “아버지도 참….”

    “아빠는 네가 항상 나이에 맞지 않게 많은 걸 지고 있다며 걱정하셔.”

    “엄마,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제가 하는 거 전부 다 좋아요.”

    “그래 우리 아들.”

    어머니가 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물었다.

    “강용이는 학교 갔죠?”

    “응.”

    대학교보다 빠른 개학을 한 탓에 강용이는 등교한 상태였다.

    “오늘 일찍 끝나겠죠?”

    “그럴걸? 개학식만 하고 끝난다고 했으니까.”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강우를 따라나서며 물었다.

    “강용이 학교 앞에 가게?”

    “네, 저번에 약속했으니까요. 오늘은 제가 데리고 올게요.”

    “그래, 강용이 좋아하겠다.”

    강우가 현관을 나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용이의 학교로 향했다. 강용이가 다니는 학교는 압구정 초등학교였다. 강우가 학교 앞에 도착하자 마침 하교 시간이었다.

    “어어? 강용이네 형이다.”

    하교하던 학생들이 강우를 확인하고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우가 픽하고 웃어버렸다. 초등학생들마저 알아보다니 이제는 어쩔 수 없나 싶었다.

    “어?! 형아!”

    그 순간, 강용이가 정문으로 나타났다. 강우를 알아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날 듯이 달려왔다.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개학 잘했어?”

    “응! 친구들 만나서 여행 간 거 자랑도 하고 했어.”

    그때, 강용이의 친구들이 강우에게 몰려들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둘러쌌다.

    “안녕하세요!”

    강우가 친구들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자 친구들이 또 난리가 났다.

    “와! 텔레비전보다 잘생겼어.”

    “키도 엄청나게 커!”

    강용이의 친구들이 마치 강우를 해부하듯 마구 만지며 뜯어보았다. 강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강용이가 친구들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우리 형아 닳아 없어지겠다! 그만!”

    강용이의 말에 친구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강우가 강용이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서는 늘 애교 많은 막내인 강용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사뭇 달랐다. 친구들 앞에서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어, 알겠어.”

    친구들이 착한 양이 되어 강용이의 말을 따랐다. 강우가 그런 강용이를 보며 씩 웃었다. 생각해보면 미래의 강용이도 이런 아이였다. 형편이 좋지 못한 집안 사정으로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 색을 잃어갔지만 말이다.

    “강용아, 형아가 친구들 맛있는 거 사줄까?”

    “진짜?!”

    강용이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얘들아! 우리 피자 먹으러 가자!”

    “좋아!!”

    친구들이 대번에 좋다고 했다. 역시 이 시기에는 피자만 한 게 없었다. 강우는 강용이와 친구들을 데리고 근처의 피자 전문집으로 향했다.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형이 다 사줄게.”

    강우의 말에 강용이와 친구들이 잔뜩 신이 났다. 그리고는 먹고 싶은 것을 이것저것 시켰다. 주문한 피자가 나오고 아이들의 손이 바빠졌다. 허겁지겁 먹는 아이들의 모습에 강우가 말했다.

    “얘들아,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한다.”

    강우의 말에 아이들이 입안 가득 음식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빨리 먹고 학원가야 해요.”

    “맞아요.”

    강우가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강남이라 그런지 학구열이 장난이 아니었다. 강우가 물끄러미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강용아, 너도 학원 더 다닐래?”

    “아니. 난 지금도 충분해.”

    강용이는 지금 본인이 원하는 학원 몇 군데를 다니고 있었다. 태권도와 영어 그리고 일본어 회화학원이었다. 강남권의 다른 학생들이 다는 학원과는 개수도 차이가 났다.

    “강용이 학원 안 다녀도 반에서 1등이에요!”

    “맞아요. 강용이 못 하는 게 없어요.”

    친구들이 앞다투어 강용이를 찬양했다. 강용이가 씩 웃으며 콧대를 높였다. 그런 강용이의 모습에 강우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은 예의도 발랐다. 강우에게 일일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갈 길을 갔다.

    “저…. 사인 좀 해주세요. 부모님이 꼭 받아오랬어요.”

    “저는 누나가요.”

    몇몇 아이들이 공책을 강우에게 내밀었다. 강우가 태연히 공책을 받아들었다. 이제 사인 요청 정도야 익숙한 강우였다.

    “그래,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강우가 사인하며 말했다. 아이들이 혀를 삐쭉 내밀었다.

    “혹시 직업이 선생님이세요?”

    “어?”

    강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아이들이 씩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강용아, 너희 형 진짜 멋있다! 인정.”

    용건을 마친 아이들이 우르르 사라졌다. 강우와 강용이가 제자리에 서서 사라져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형아, 애들이 어려서 그래. 이해해.”

    강용이가 강우의 팔을 쓰다듬어 주었다. 강우가 또 웃음을 터트리며 강용이를 번쩍 들어 목말을 태웠다. 강용이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즐거워했다.

    “형아, 가자! 이랴~”

    “그래, 가자!”

    강우가 강용이를 태우고 발걸음을 옮겼다. 보기 드문 모습에 주변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강우와 강용 형제를 알아본 사람들이 흐뭇하게 웃으며 지나갔다. 잔뜩 신난 강용이에게 강우가 말했다.

    “오늘 학원 뭐 뭐 있지?”

    “태권도랑 영어.”

    강우가 씩 웃었다.

    “우리 오늘 하루 쨀까?”

    “째? 아~ 땡땡이! 좋아 가자!”

    강용이가 신난다며 발을 굴렀다. 강우가 살짝 휘청이더니 금세 중심을 잡았다. 강우가 강용이를 태운 채 압구정 거리를 걸었다.

    “강용이 어디 가고 싶어?”

    “나는 형아랑 가는 데면 아무 데나 좋아.”

    “녀석.”

    강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형아, 아빠는 잘 가셨어?”

    “응, 잘 가셨어.”

    “한동안 못 오시겠지?”

    강용이의 말투에 벌써 그리움이 묻어있었다. 강우가 속으로 탄성을 뱉어냈다. 미래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와 강용이의 관계는 강우보다 더 좋지 않았다.

    “응, 아마 한동안?”

    “크리스마스 전에도?”

    강우가 피식 웃었다. 아이의 생각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는 우리가 아버지 보러 가면 되지.”

    “진짜지?”

    강우가 손을 들어 강용이의 팔을 쓰다듬어 주었다.

    “응, 꼭 약속할게.”

    “오케이!”

    강우가 다시 신이 났다. 강우와 강용이는 그렇게 한참이나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한동안 바빠 놀아주지 못했던 만큼 열심히 놀아주었다.

    “음냐….”

    늦은 저녁. 강우의 등에 업힌 강용이는 곤히 잠들어있었다. 오랜만에 업어보는 강용이는 그 무게가 제법 무거워져 있었다. 점점 자라는 강용이의 덩치만큼 강우의 마음도 푸근해졌다. 강우가 아파트 단지를 걷자 주민들이 아는 체를 했다.

    “강우 학생, 동생 업고 가네?”

    “우애가 그렇게 좋다고 소문났어. 참 보기 좋네.”

    강우가 알아봐 주는 주민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집 앞에 도착했다.

    딩동.

    덜컥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박강우! 강용이 학원….”

    어머니가 강우의 등에 업혀 잠든 강용이를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너희를 누가 말리니.”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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