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이 있으니 든든합니다.
연회장 안의 시선이 대번에 강우에게 쏠렸다. 수많은 감정이 실린 시선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긴장을 잔뜩 할 정도였다. 하지만 강우는 태연했다.
“오랜만이군요.”
대통령의 말에 강우가 움찔했다. 주변의 시선이 왜인지 조금 더 따가워진 듯했다. 강우가 입을 열려 하자 청와대 직원이 강우에게 마이크를 전달했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대통령님.”
“덕분이지요.”
대통령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둘 사이에 특별한 일이라도 있나 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입이 이내 열렸다.
“박강우 이사를 비롯한 여러분 모두가 경제를 위해 밤낮으로 일을 해주니 내가 어찌 안 건강할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의 농담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강우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이 강우를 보며 미소를 짓더니 물었다.
“이스포츠라는 아주 훌륭한 사업을 개척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이곳에 있는 다른 분들에게 설명을 좀 해줄 수 있을까요?”
강우가 속으로 역시라는 생각을 했다. 강우가 구상한 이스포츠 사업이야말로 현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딱 맞아떨어지는 사업이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수많은 벤처 사업가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게임과 인터넷 사업이 크게 발달했었다. 대통령은 강우의 입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말하려 하는 것이었다.
“게임은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취미입니다. 이미 외국에서는 게임 산업으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강우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일본 같은 경우는 비디오 게임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미국의 유명 소프트 개발사가 일본을 견제하고자 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혼자서 게임을 즐기거나 혹은 몇 명이 모여서 게임을 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게 발명되고 사람들은 온라인상의 커뮤니티에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게임 산업은 대변혁의 시기에 들어섰습니다. 아니 게임 산업뿐만이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모든 산업 분야에 인터넷의 발달이 영향을 끼칠 거로 생각합니다. 문화, 유통, 제조, 무역, 건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올해 하반기 이후로 인터넷망 인프라를 급속도로 넓혀 가고 있습니다.”
강우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재원이 기다렸다는 듯 물을 건넸다. 강우가 물을 조금 마신 뒤 주변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는 한국이 나아갈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토는 적고 인구수 역시 다른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합니다.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성장해 온 것은 바로 우수한 교육을 통한 인력 인프라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 자원을 한 단계 발전시켜 미래 산업인 문화, 네트워크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개막하는 이스포츠 프로리그가 바로 그 시발점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강우의 말에 주변에 정적이 흘렀다. 누구는 의아함을 또 어떤 이는 감탄을 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재벌 2세가 뭉쳐있는 테이블의 반응은 무표정이었다.
“이 사람이 내가 할 말을 다 해버려서 나는 오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대통령의 말에 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강우가 자리에 앉았다.
“역시 박강우.”
이재원이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얼굴 가득 강우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형 차례도 올 텐데 할 말은 생각해 놨죠?”
“아….”
이재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와 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도 볼만했다. 특히 같은 자리에 앉은 VC 소프트의 김대진은 멍한 표정이었다. 강우의 말을 듣고 자신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팔았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후였다.
“이사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먼 곳까지 보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대진의 칭찬에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대통령과의 간담회는 계속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대통령의 질문을 받고 대답을 했다. 하지만 강우의 발언 이후 나온 말 중 임팩트가 있는 말은 있지 않았다.
“다들 오늘 어려운 걸음 내어주어서 고맙습니다. 바쁜 사업가들 앉혀놓고 너무 내 이야기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IMF 극복을 위해 모두 힘을 합쳐주기 바랍니다.”
잠시 후, 마지막 발언을 끝으로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장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대통령에게 손뼉을 쳤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가득한 연회장을 대통령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후…. 진짜 대통령도 할 일이 아닌 듯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 당선돼서 벼랑 끝 같은 기분일 거야.”
멀어져 가는 대통령을 보며 이재원이 말했다. 강우가 말없이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국민의 힘으로 IMF는 곧 극복된다. 하지만 사회 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지지.’
있는 사람들에게 IMF는 오히려 기회의 시기였다. 무너져 내린 것은 한국에 그나마 존재했다던 중산층이었다. 강우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재벌 2세들의 변함없는 표정 그리고 신흥 사업가들의 희망에 찬 얼굴이 참 대비적이었다.
* * *
강우와 이재원이 청와대 정문에서 나타났다. 기다리고 있던 김 기사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 이사님!”
너무나 반가워하는 김 기사의 표정에 주변 다른 기사들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재원과 강우도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식사는 맛있는 거 드셨어요?”
“네, 근처 가서 갈비탕 먹었습니다.”
이재원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제일 비싼 거 드셨죠?”
“네, 사장님.”
강우도 말을 거들었다.
“사우나 가서 좀 쉬다가도 오셨어요?”
“네, 이사님.”
그렇게 세 사람이 웃고 대화를 나누던 때였다. 연회장에서 같이 나온 재벌가 자제들 몇 명이 이재원에게 다가왔다.
“이재원 씨.”
조금은 거만한 듯한 말투에 이재원이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확인했다. 3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이재원은 단번에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
“안녕하십니까.”
“형한테 이야기 듣던 대로 잘생겼네요?”
이재원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눈앞의 남성은 배다른 둘째 형의 절친 중 한 명이었다.
“감사합니다. 오늘 자리가 자리인지라 미리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괜찮아요. 사실 이재원 씨에게 볼일이 있었던 건 아니거든요.”
남성의 말에 이재원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고 지켜보던 강우의 속에서 화르르 불길이 치솟았다. 감히 이재원을 건드리다니 이것은 자신에 대한 도전과 다름없었다.
“박강우 씨?”
남성이 강우를 보며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박강우. 현재 대진 그룹의 가파른 상승세를 이끄는 잠룡이라 소문나 있었다.
“네.”
강우가 짧게 답했다. 그때부터였다. 남성의 심기가 조금은 불편해진 티가 났다. 강우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유유상종이라더니.’
단 몇 마디 말과 표정으로 눈앞의 남성이 어떤 스타일인지 파악이 된 강우였다. 바로 전형적인 귀한 집 아들이었다. 누구에게도 무시받은 적 없고, 원하는 것은 손에 넣은 그런 인생을 산 인간이 분명했다. 강우와 이재원과는 그야말로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저희 모임에 한 번 초대해도 될까요?”
정중한 듯했지만, 은연중에 당연히 오겠지라는 표정이 담겨있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쁘거든요. 학교생활에 제 사업체에 그리고 대진 그룹 일까지요. 그런 곳에 여력을 투자할 시간이 없네요.”
“음…….”
강우가 단칼에 거절하자 남성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하지만 주변에 시선을 많은 것을 느꼈는지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남성과 그 무리가 멀어지자 이재원이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내 동생. 참 대쪽 같아?”
“그건 맞죠.”
강우와 이재원이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는 동시에 세단에 올라탔다. 강우와 이재원을 태운 승합차가 청와대를 벗어났다.
* * *
이른 새벽. 집 안에 아쉬운 기운이 가득했다. 거실에서는 아버지가 열심히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버지가 중국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중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들이 이제는 아버지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혼자 해도 된다니까. 피곤할 텐데 더 자.”
“아니에요. 도와드릴게요.”
강우가 아버지를 도와 짐을 쌌다. 장기간 중국에 계셔야 하는 만큼 가져가야 할 짐도 많았다. 어머니는 주방에서 아버지를 위한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장기간 보지 못할 아버지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밥상이었다. 그때였다. 강우 방문이 벌컥 열리고 강용이가 후다닥 달려 나왔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향해 직진했다.
“아빠! 나중에 가면 안 돼요?”
강용이가 아버지의 등에 매달려 발을 구르며 졸랐다. 아버지가 좋아죽겠는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빠 가지 마? 돈도 벌지 말고?”
“응! 돈은 형아가 더 벌어 올 거야.”
“어? 이 녀석이!”
아버지가 손을 뒤로 뻗어 강용이를 붙잡으려 했다. 강용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도망을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머니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범아, 이제 가는 거야?”
방문이 열리고 할아버지가 나왔다. 최준도 뒤이어 방에서 나왔다.
“아버지, 더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와 최준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강우와 강용이도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아버지와 최준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옆쪽으로 자리 잡고 앉았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옷을 하나 집어 차분히 개기 시작했다.
“나도 도우마.”
“아버지, 제가 할게요.”
아버지가 옷을 가져오려 하자 할아버지가 손을 내밀어 막았다.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해주고도 싶고.”
“네….”
할아버지의 따듯한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조금은 흔들렸다. 나이가 들었어도 아버지의 따듯한 말에는 강한 울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가면 얼마나 있다가 오는 게야?”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가면 처리할 게 너무 많아서요.”
아버지의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문득 젊은 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사업을 한다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가족과 떨어져 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자신과 눈앞의 아들은 상황이 달랐다.
“그래, 가족들은 걱정하지 말고. 가서 일 열심히 하고 와.”
“네, 아버지가 있어서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내가 뭐 하는 게 있다고. 우리 강우가 있으니 믿고 다녀와도 되는 거지.”
“네, 가족들이 있으니 든든합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대견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모든 짐이 다 준비됐다. 강우와 가족들은 둘러앉아 이른 아침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강우와 아버지가 현관에 섰다.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큰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최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두 분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 갔다 올게. 집 잘 부탁해.”
“다녀와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볍게 포옹했다.
“아빠! 잘 다녀오세요. 강용이는 밥 잘 먹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그래, 내 새끼.”
아버지가 강용이를 한차례 번쩍 들어 안았다. 그리고는 강용이의 볼에 자신을 볼을 마구 비볐다. 강용이 간지럽다며 깔깔 웃었다.
“아빠, 수염 따가워.”
“하하. 녀석.”
가족과 모두 인사를 마친 아버지가 캐리어를 들었다. 강우도 커다란 캐리어 하나를 들었다.
“그럼 아버지 모셔다드리고 올게요.”
“그래, 운전 조심하고.”
강우와 아버지가 현관을 나섰다. 이른 새벽 주차장에는 하나둘씩 출근을 위해 나서는 사람들도 보였다. 강우와 아버지가 승용차에 도착했다.
덜컹.
트렁크를 열고 아버지의 캐리어를 담았다. 커다란 캐리어는 넣어지지 않아 뒷좌석에 실었다. 강우가 운전석에 타고 아버지가 조수석에 탔다.
“출발할게요.”
“그래.”
부우웅.
강우와 아버지가 탄 승용차가 천천히 속도를 냈다. 베란다에서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멀어져 가는 승용차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