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402)
  • 간식 다 사준다.

    달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노래자랑이 펼쳐졌다. 자리에 앉은 강용이의 입에서 구수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나는~ 개똥벌레~”

    강용이의 선곡에 버스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박자를 맞춰 손뼉을 쳤다. 잔뜩 신난 강용이가 두 눈까지 감고는 노래에 심취했다.

    “우리 막내 노래 취향이 좀 특이한데?”

    이재원이 강우를 툭 치며 물었다. 두 사람은 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아있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 보면 미래에도 강용이의 음악 취향은 남들과는 달랐다.

    “원래 그래요. 좋아하는 거 보면 남들이나 또래랑은 좀 다르죠.”

    “그래도 끼는 없네.”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강용이는 모습을 비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번 모임의 막둥이인 강용이의 노래에 크게 화답하며 즐거워했다.

    부우웅.

    관광버스는 굽이굽이 언덕을 넘어 속초로 향했다. 산 중턱에 이를 때면 짙은 안개가 끼기도 했다. 한국 여행이 처음인 미나는 상기된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미나의 옆에는 어느새 친해진 이나은이 앉아있었다.

    “두 사람 금세 친해지네.”

    “나은이가 외동이라 정에 약해요. 마침 나이대도 맞고 미나 때문에 일본어 공부도 시작한다더라고요.”

    “진짜?”

    이재원이 흐뭇하게 웃었다. 강우가 이재원을 향해 슬쩍 물었다.

    “그런데 사실이에요?”

    “뭐가? 무슨 일 있어?”

    이재원이 시치미를 떼며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치려는 흉내를 냈다. 이재원이 기겁을 하며 강우의 몸을 붙잡았다.

    “항복. 항복.”

    “이기지도 못할 거.”

    강우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재원의 옆에 앉았다. 이재원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말이야 나는 여자한테 관심이 크게는 없었거든?”

    “왜요? 잘나가는 여자도 줄을 섰으면서.”

    강우의 말대로였다. 이재원에게 들어오는 중매며 소개팅 제의는 엄청났다. 물론 강우도 여러 중매쟁이와 여자들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상태였었다. 하지만 이나은과의 관계가 알음알음 소문이 나면서 이재원에게 집중포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음…. 그냥 잘나가는 집 여자들은 별로 매력이 없어. 좀…. 가식이 보인다고 할까?”

    “그래요? 그러면 미나는요?”

    이재원은 여자를 잘 믿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여자를 봐도 늘 직관적으로 단점을 찾고 의심을 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이재원은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그런 이재원이 미나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

    이재원이 머뭇거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는 걸 믿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만나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건져낸 강우가 있었다. 강우를 만나고 많은 일을 겪으며 운명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어가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 만나고 조금 놀랐다. 그냥 심장이 뛰더라고.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재원이 작게 말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강용이의 노랫소리가 강우와 이재원의 대화를 비밀스럽게 감추어 주었다.

    “그게 첫눈에 반한다는 거죠. 형, 미나 진짜 착하고 좋은 여자예요.”

    “그런 거 같아.”

    이재원이 슬쩍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이야기하기에는 부끄러운 듯했다. 강우도 더는 묻지 않았다. 관광버스는 즐거움을 가득 담은 채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갔다.

    치이익.

    이윽고 관광버스가 휴게소에 멈춰 섰다. 앞문이 열리자 강용이가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화장실 갈래요!”

    버스 안에서 먹을 것을 잔뜩 먹은 강용이가 탈이 났나 보다. 후다닥 화장실로 달려가는 모습에 버스 안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강우가 이재원을 툭 하고 쳤다.

    “가요. 가서 맛있는 거도 좀 사주고 그래요.”

    “어? 어어….”

    강우와 이재원이 이나은과 미나에게 다가갔다. 강우가 이나은을 향해 말했다.

    “나은아, 뭐 먹을래?”

    “응, 휴게소 왔는데 당연히 먹을 거 먹어야지.”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가 이번에는 미나를 향해 일어로 물었다.

    “미나도 같이 갈래? 한국 휴게소에 진짜 먹을 거 많아.”

    “그래요?”

    미나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강우가 씩 웃으며 이재원을 앞으로 내세웠다.

    “재원이 형이 돈 많으니까 먹고 싶은 거 다 사달라고 해. 잘하면 휴게소에 있는 거 다 사줄 수도 있을걸?”

    “뭐에요 그게.”

    미나가 빵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말인지는 못 알아들었지만, 이재원이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이 관광버스에서 내렸다. 강우가 먼저 이나은과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리 먼저 가요.”

    이나은도 눈치껏 걷는 속도를 올렸다. 단둘이 남은 이재원이 미나가 알아듣기 쉽게 차근히 말했다.

    “간식 다 사준다.”

    “네.”

    이재원과 미나가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빨라 앞서나가던 이재원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슬쩍 걸음을 늦추었다. 아직은 서툴지만, 이재원의 노력이 엿보이는 장면이었다. 한쪽 기둥에 서서 그 모습을 보던 강우와 이나은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했다.

    “좋아. 작전 성공.”

    “우리도 간식 사 먹으러 가자. 최대한 두 사람은 피해서.”

    강우와 이나은이 마치 첩보 작전인 양 휴게소를 이리저리 숨어다녔다. 이윽고 개인 정비들이 끝나고 다시 관광버스가 출발했다. 버스 안으로 온갖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나나! 감자 감자!”

    강용이의 재촉에 아버지가 버터로 겉을 구워 소금을 살짝 뿌린 통감자를 건네주었다. 혹시 몰라 짠 건 조금만 먹으라는 아버지의 말에 강용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제 안 아픈데.”

    “그래도 강용아.”

    강용이의 옆자리에 앉은 어머니가 강용이를 달랬다. 강용이가 알겠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거는 재원이 형 줘야지. 어?”

    맨 뒷자리로 향하려던 강용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이나은과 함께 앞쪽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강용이가 맨 뒷자리를 바라보았다. 이재원과 미나가 나란히 앉아 간식을 먹고 있었다. 어설픈 한국어와 손짓과 발짓을 섞어가면서였다.

    “재원이….”

    “강용아. 그냥 형아 줘.”

    강우가 강용이를 낚아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맨 뒷자리로 향했다. 그리고는 약속이나 한 듯 모른 체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 다들 타셨죠? 출발합니다!”

    이번 여행의 총무를 맡은 아버지가 인원 점검을 마쳤다. 관광버스가 휴게소를 벗어나 다시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 * *

    속초에 도착한 관광버스는 커다란 펜션단지에 들어섰다. 인원수가 많기에 콘도나 호텔보다는 펜션단지를 하나 통 크게 빌린 강우였다.

    치이익.

    버스가 멈춰서고 앞문이 열렸다. 강우가 먼저 내리자 펜션 사장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성수기도 끝나고 휴가철도 끝나가는 끝물에 펜션을 통째로 빌린 손님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아이고~ 먼 길 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예약한 박강우입니다.”

    강우가 인사를 하며 펜션을 둘러보았다. 건물 여러 개를 작은 주택 단지처럼 지어놓은 곳이었다. 사실 강우 일행의 인원수보다 더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하지만 강우가 통째로 예약을 했다.

    “자자 숙소를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차에서 내린 아버지는 어디서 준비했는지 확성기를 사용해 진두지휘 중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아버지의 말에 따랐다.

    “먼저 마사토 가족은 저쪽에 1호실. 강우야 네가 안내 좀 해줘.”

    “네.”

    아버지가 강우를 불렀는데 이재원이 재빨리 답하고는 나섰다. 그리고는 마사토를 향해 말했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래.”

    마사토 가족이 짐을 들고 1호실로 향했다. 이윽고 가족 단위로 계속 숙소 배정이 이어졌다. 숙소 배정이 모두 끝나고 마지막으로 강우 가족이 숙소로 향했다.

    덜컥.

    문이 열리고 널찍한 숙소가 나타났다. 강용이가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좋다!!”

    “강용아, 넘어져.”

    뒤를 이어 어머니와 아버지가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강우까지 들어오자 숙소를 사용할 인원이 전부 모였다. 할아버지와 최준, 하루오와 기무라는 따로 제일 좋은 숙소를 배정해 드렸다.

    “강우야, 일단 이리 와봐. 오늘 일정 좀 확인해줘.”

    아버지가 강우를 불렀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의욕을 불태웠던 아버지였다. 지난번 강우가 계획했던 행사에 자극을 받아 이번 여행을 맡기라며 자신만만해했다.

    “음…….”

    강우가 일정표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 단위의 여행이기에 주로 펜션에서 보내는 여유 있는 일정이었다.

    “어때? 재미있겠어?”

    “음…. 좋은 사람들이랑 있는데 뭘 해도 재밌죠.”

    “맞지.”

    아버지가 씩 웃으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때, 이재원이 숙소로 찾아왔다.

    “강우야, 트럭 왔다. 빨리 나와봐.”

    “네! 나가요.”

    강우가 밖으로 나갔다.

    “일단 사장님이 주방에 다 옮겨 놓아도 된다고 하셨어. 상하는 음식들도 있으니까 빨리 옮기자.”

    “애들은요?”

    “다 나와서 나르고 있지.”

    강우와 이재원이 트럭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신원주와 김춘배, 남재식과 연정호가 열심히 짐을 나르고 있었다.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번 여행을 위해 특별히 신경을 써 초대한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광웅이는?”

    강우가 친구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주방 쪽에서 박광웅이 나타났다.

    “나 여기 있다.”

    그리고는 쌀 포대 두 개를 번쩍 들으며 강우를 슬쩍 바라보았다. 나 요즘 운동 좀 했다 하는 표정에 강우가 피식 웃었다.

    “박광웅 저 곰 같은 놈.”

    친구들이 박광웅을 보며 탄성을 뱉어냈다. 강우가 슬쩍 쌀 포대로 다가가 네 개를 들었다.

    “이런 미친!!”

    친구들이 또 탄성을 뱉어냈다. 강우와 박광웅이 경쟁하듯 주방으로 물건을 나르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도우려 나서자 이재원이 말렸다.

    “놔둬. 가진 게 힘밖에 없다는데 둘이 다 나르라고.”

    이재원의 말에 친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강우와 박광웅은 한참이나 경쟁하듯 짐을 날랐다.

    * * *

    “자자 여러분 이제 첫날 일정을 바로 시작합니다. 다들 질서정연하게 알겠죠?!”

    아버지가 확성기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질서정연하게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네!’하고 소리쳤다. 아버지가 뿌듯한 표정으로 버스를 가리켰다.

    “탑승~”

    아버지의 말과 함께 단체로 버스에 탔다. 친구들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어른들을 챙기고 짐을 정리했다. 강우는 손에 들고 있는 계수기를 누르며 인원을 점검했다.

    “후…. 많긴 많다.”

    총인원이 마흔 명에 육박하는 대인원이 움직이니 챙길 것도 준비할 것도 많았다. 그렇게 가족들 모두가 탑승했다.

    “강우야, 짐도 다 실었다.”

    박광웅이 구슬땀을 흘리며 말했다. 강우가 박광웅을 보며 말했다.

    “좀 쉬라니까.”

    “아니야. 내가 너무 좋아서 그래. 우리 부모님 얼굴 봤어? 너무 행복해하시잖아. 지금 나 버스 들고 뛰어가라고 해도 간다.”

    “뭐?”

    강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고맙다 강우야. 우리 가족까지 이렇게 신경 써 주고.”

    “아니야 뭐…. 어차피 이번 여행은 다 우리가 준비하기로 했었어.”

    스케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가족 여행의 소식이 박광웅에게도 알려졌다. 박광웅도 여행에 너무 참석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선뜻 가겠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박광웅 가족의 삶이 너무 빡빡했다. 그런 박광웅의 사정을 눈치챈 강우가 직접 나섰다.

    “정말 우리 가족 때문에 그런 거 아니지?”

    “아니라니까. 처음부터 우리가 다 준비하고 경비도 다 대기로 한 거였어.”

    “항상 너에게 신세만 지네. 나중에 꼭 갚을게.”

    강우가 박광웅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열심히 살아서 성공해라 그게 내가 바라는 거니까.”

    “알겠다.”

    박광웅이 씩 웃더니 힘찬 발걸음으로 버스에 탔다. 강우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인원 점검을 마친 강우가 버스에 올라탔다.

    부우웅.

    버스는 펜션을 벗어나 첫 번째 목적지인 설악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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