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7/402)

사람 참 착해요.

가공업체 관계자들이 돌아가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똑똑.

강우 방문을 노크하고 황규범 부장이 들어왔다.

“강우 이사, 점심 먹으러 갈까?”

“좋죠.”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니 강종민 과장과 김지숙 과장도 기다리고 있었다. 강우와 세 사람은 근처의 찌개집으로 갔다. 점심시간을 맞이해 가게는 직장인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기 김치찌개 4인분 주세요. 고기 추가해서요.”

강종민 과장이 익숙하게 주문을 했다. 강우가 슬쩍 주문을 추가했다.

“라면 사리도 추가해주세요.”

이윽고 찌개가 나왔다. 브루스터에 올려진 커다란 냄비에는 고기가 듬뿍 담겨있었다.

보글보글.

찌개가 끓기 시작하자 강우가 국자를 덜어 각 접시에 찌개를 덜었다. 강종민 과장이 깜짝 놀라며 손을 뻗었다.

“강우 이사님, 내가 할게요.”

“아니에요. 제가 말했죠. 우리끼리 있을 때는 예전처럼 대해달라고요.”

강우의 말에 강종민 과장이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각자의 앞에 접시가 놓이고 식사가 시작됐다. 뜨거운 국물에 밥을 말아 고기까지 얹어 먹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밥을 먹자 강우가 라면 사리를 넣었다.

후루룩. 후루룩.

이 차전으로 라면 사리를 먹기 시작했다. 한동안 침묵의 식사가 이어졌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황규범 부장이 슬쩍 입을 열었다.

“강우 이사, 오늘 미팅한 업체들은 어때 보여?”

“우리가 제시한 조건은 거절 못 할걸요? 생산 설비를 깔아주는 원청 업체가 어디 있나요.”

“하긴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투자를 하는 거야?”

황규범 부장이 조금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가공업체는 한국에 많고 많았다.

“음…. 일단 제가 고른 회사들은 시설이 가장 잘 갖춰진 곳이에요. 다만 자금난 때문에 조금 힘들어하는 곳이죠. 투자하면서 지분을 요구했을 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판단했어요.”

“아…. 그랬군.”

황규범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공업체에 대한 지분을 확보한다면 조금 더 주도적으로 업체들을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황규범 부장이 강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역시 주도면밀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가공업체들 지분을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관리까지 할 생각인 거야?”

“그건 아니고요. 투자하면서 제가 요구할 게 있긴 해요.”

세 명의 시선이 강우에게 쏠렸다. 강우가 물을 한잔 마시고는 말을 이어갔다.

“다른 건 아니고요. 비정규직 고용금지. 그게 제가 요구할 딱 하나의 조건이에요.”

“허….”

황규범 부장이 탄성을 뱉어냈다. 90년대 중반을 넘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이 비정규직 고용이었다. 특히 IMF 사태는 기업들의 비정규직 고용에 면죄부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강우는 특히 비정규직 고용이 많은 생산업체에 정규직 고용을 권유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뭐….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요. 아무래도 일자리가 보장되어야 일의 능률도 오르고 자기가 생산하는 제품에 대한 자부심도 생기지 않겠어요? 당장 돈을 조금 아끼려고 비정규직을 늘리면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길 거에요.”

“역시 강우 이사는 참 대단한 사람이야. 그런 생각을 다 하고.”

황규범 부장이 다시 한번 감탄했다. 강종민 과장과 김지숙 과장도 멍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자신들과는 생각하는 깊이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일단 제가 바꿀 수 있는 것부터 바꿔나가려고요.”

강우의 말에 삼인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자 활발한 성격의 강종민 과장의 입이 근질거렸나 보다.

“부장님, 오늘 강우 이사 덕분에 미팅도 아주 수월했습니다. 업체 관계자들 표정을 보니 조만간 연락이 바로 오지 않을까 싶네요.”

강종민 과장이 호언장담했다. 황규범 부장이 씩 웃었다. 김지숙 과장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강 과장님, 사업은 그렇게 섣부르게 판단을 내리면 안 돼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업무를 추진해야죠.”

“네~네~ 김 과장님.”

강종민 과장이 씩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그런 강종민 과장의 모습에 김지숙 과장이 픽하고 웃어버렸다.

“제2 김치공장 건설이 마무리되면 생산량을 두 배 이상 늘릴 건데 국산 원자재 확보는 잘 끝났나요?”

강우가 김지숙 과장에게 물었다. 한국의 김치 수출도 점점 활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원자재인 배추와 고추의 수급에 경쟁이 더 해가고 있었다.

“일단 강우 이사 지시대로 처음에 계약했을 때 장기 계약을 한 농민들이 많아서 기본 수급량에는 문제가 없어. 그런데 앞으로 물량을 늘리려면 조금 단가가 올라갈 수도 있을 거 같아.”

“기존에 계약한 농민분들도 섭섭하지 않게 계약단가가 올라가면 거기에 맞춰 같이 올려주세요. 대신 품질은 꼼꼼히 관리해 주시고요.”

강우는 원자재인 배추와 고추를 확보하면서 장기 계약을 맺었다. 농민들은 안정적인 수입을 바탕으로 농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계약은 품질 저하의 위험성이 있었다. 강우는 절대 품질 저하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알겠어. 걱정하지 마. 사람 입맛이라는 게 얼마나 예민한 건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품질이 떨어지면 바로 매출에 영향이 오겠지.”

“네, 부탁드려요.”

역시 꼼꼼하고 치밀한 김지숙 과장이었다. 강우가 강종민 과장과 김지숙 과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완전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었지만, 일 처리는 확실했다.

“식사 다했으면 일어나죠.”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사로 돌아왔다. 사무실은 한적한 분위기였다. 사원들은 곳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일부 사원들은 휴게실에서 낮잠을 자고 있기도 했다.

“이사님.”

사원 몇 명이 강우를 발견하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강우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쉬는 시간에는 사장이 와도 그냥 쉬세요. 이 시간만큼은 회사가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강우의 농담에 사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다시 편안한 자세를 취하며 휴식에 들어갔다. 이러한 분위기는 모두 강우가 주도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일단 동양 무역의 점심시간은 다른 곳보다 30분이 많은 1시간 30분이었다. 강우의 주의가 잘 먹고 잘 쉬어야 능률이 오른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들 조금 있다가 회의실에서 봬요.”

강우의 말에 식사를 같이했던 삼인방이 휴식을 취하러 흩어졌다. 특히 강종민 과장과 김지숙 과장이 같이 어디로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한 후 아버지가 사용하는 방으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퉁퉁 부은 얼굴을 보아하니 아직 술기운이 강하게 남은 듯했다.

“이거 좀 드세요.”

강우가 돌아오는 길에 산 숙취해소 음료를 아버지 앞에 놓았다. 아버지가 뚜껑을 단숨에 따서는 벌컥 먹었다.

“고맙다 아들.”

“속은 좀 괜찮으세요?”

아버지가 손으로 배를 슥슥 문질렀다.

“이제 좀 살만해. 그나저나 오늘 늦게 나와서 미안하다. 미팅도 있었는데 말이야.”

“어제는 특별한 날이었으니까요. 할아버지들은 괜찮으세요?”

“어, 두 분 모두 멀쩡하시다. 어째 요즘은 나보다 더 쌩쌩하신 거 같아.”

아버지의 말대로였다. 할아버지와 최준은 요새 들어 활력을 더해가고 있었다. 두 분이 같이 지내며 운동도 하고 말벗도 되어주는 것이 삶의 활력이 된 것이다. 특히 할아버지는 눈에 띄게 좋아지고 계셨다. 역시 두 분을 같이 지내게 한 것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마사토 아저씨는요?”

“오는 길에 호텔에 전화해봤는데 가족들 데리고 나갔다고 하더라. 아마 새집에 간 거 같은데?”

“아…. 오늘 이사 날이죠?”

“맞아. 아마 지금 정신없을 거야.”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상황이 궁금한데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연락이 안 되니 걱정이네요. 핸드폰부터 하나 장만해야겠네요.”

“그거 좋은 생각이다. 지금 마사토에게 꼭 필요한 게 바로 핸드폰이겠지.”

“있다가 저녁에 이사할 집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때 이야기해볼게요.”

강우와 아버지가 대화를 마치고 회의실로 향했다. 오늘 있었던 미팅 건으로 아버지와 함께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실 안의 분위기는 성장해가는 회사의 상황만큼이나 화기애애했다.

* * *

딩동.

강우와 아버지가 마사토가 이사할 집에 도착했다. 양손 가득 두루마리 휴지를 든 채였다. 문이 열리고 땀을 잔뜩 흘리고 있는 마사토의 얼굴이 나타났다.

“오? 왔어?”

마사토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강우와 아버지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강우네 집과 똑같은 구조의 집이었다. 다만 인테리어가 달랐다.

“우리가 너무 늦게 왔나? 벌써 정리가 많이 됐네?”

아버지가 집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사토의 집에는 가구들과 가전제품들이 도착해 있었다. 다만 마사토 혼자라 정리까지는 못해 놓은 상태였다.

“아니 이제부터 정리 시작이지. 부탁한다.”

마사토의 말에 강우와 아버지가 웃옷을 벗었다. 그리고는 마사토와 함께 열심히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장정 둘이 합류하자 집 안이 금세 그럴싸한 배치를 갖추어 갔다.

“아직 한참 남았어. 방들은 하나도 정리 못 했다고.”

“이제 우리 왔으니까 후딱 해치우자고.”

아버지와 마사토가 의지를 불태웠다.

뚜르르. 뚜르르.

그때,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나야. 지금 어디냐?-

이재원의 목소리에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지금 마사토 아저씨 집이에요.”

-그래? 오늘 짐 들어가는 날이라고 했지?-

“네, 오려고요?”

강우의 물음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이재원 특유의 넉살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가져갈 것도 조금 있고. 금세 갈게. 저녁은 조금 기다렸다가 같이 먹자.-

“네, 기다릴게요.”

통화가 끝나자 마침 미나가 주방에서 나왔다. 강우와 아버지에게 줄 시원한 음료를 가지고서였다.

“미나야, 재원이 형이 온다는데?”

“재원 상이요?”

미나가 살짝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말없이 웃으며 음료를 받아 마셨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짐 정리를 했다.

딩동.

한참 후 벨이 울렸다. 미나가 현관으로 다가가 어설픈 한국어로 말했다.

“누구세요?”

“이재원입니다.”

미나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조금은 부끄러운듯한 표정을 지었다. 문밖에는 훤칠한 이재원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두 사람의 풋풋한 모습에 강우가 다가가며 슬쩍 웃었다.

“아니,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요?”

“나? 마사토 아저씨가 한국에 오셨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이재원이 집 안으로 들어오며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는 힘쓸 곳을 찾아다녔다. 주방에 있던 료코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강우에게 말했다.

“강우야, 재원 상까지 안 도와주어도 되는데….”

“괜찮아요. 형이 도와주고 싶나 보죠. 사람 하나 더 늘고 좋죠. 그리고 저 형이 원래 참견하는 거 좋아해요.”

료코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이재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사토에게 듣기는 했는데 사람이 참 바르네.”

“그렇죠. 사람 참 착해요. 정도 많고요.”

강우의 말에 료코가 다시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재원의 옆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미나를 바라보았다.

“좋을 때네.”

료코의 말에 강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재원과 미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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