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친구는 뭐로도 이길 수가 없지요.
어머니와 료코 그리고 김세아는 주방에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대화가 안 통하지만, 예전처럼 보디랭귀지에 간단한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맞아요. 조만간 백화점 가요. 백화점.”
“네, 좋아요.”
어머니와 료코가 백화점에 갈 약속을 잡았다. 료코가 김세아를 보더니 작게 감탄을 했다.
“참 예뻐요.”
“고맙습니다.”
김세아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세 여자는 후식을 준비하며 정다운 대화를 이어갔다. 거실에서는 최준과 하루오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할아버지와 기무라 그리고 아버지와 마사토가 둘러앉아 있었다.
“으음···.”
하루오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흑돌을 쥐고 있는 손이 연신 망설였다. 그런 하루오의 모습에 최준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바둑 두는 사람 어디 간 거야?”
할아버지가 빠르게 일어로 통역을 해주었다. 하루오의 얼굴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그리고는 이내 돌을 한 곳에 두었다. 최준이 기다렸다는 듯 백돌을 한 곳에 두었다. 하루오가 크게 당황하며 손을 떨었다.
“이런···.”
기무라도 침음성을 흘렸다.
“하루오! 질 수는 없다고!”
기무라의 말에 하루오가 미간을 좁혔다. 오늘 바둑은 있다가 밤에 있을 술자리를 계산하는 내기 바둑이었다.
“가만히 좀 있어 봐. 정신 사나워 죽겠네.”
“흠흠···.”
하루오의 말에 기무라가 조용해졌다. 한일전은 치열하게 이어졌다. 재산을 통 크게 기부하는 거부들이 술값 내기를 두고 과열된 양산을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우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강우야, 마사토 아저씨 가족이 살 집은?”
강우 옆에 앉아있던 이재원이 물었다.
“구했어요. 우리 집 근처로요.”
“오? 진짜? 잘됐네.”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씩 웃었다. 그러자 이재원이 헛기침을 했다.
“뭐 부족한 건 없어?”
“집에 들여놓을 가구랑 전자제품은 전부 샀어요. 입주 청소하고 들어가기만 하면 돼요.”
“그렇군.”
이재원의 시선이 강우의 방문으로 향했다. 이나은과 미나 그리고 강용이는 방 안에서 앨범을 보며 놀고 있었다. 모두 강우와 강용이의 추억이 담긴 앨범이었다.
“그나저나 너는 참 복도 많아. 한·중·일 삼국의 돈이 너한테 다 모이네.”
“좋은 곳에 쓸 돈이 많아지는 건 좋은 일이죠.”
이재원이 강우를 보며 감탄한 표정을 했다.
“참 보면 넌 나이도 어린놈이 대단해. 욕심도 안 부리고.”
“욕심이요? 나도 욕심 많아요. 돈 욕심.”
“말만 그렇지.”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이재원이 강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나중에 진지하게 해보자고.”
“네.”
사단법인 광복의 일은 곧 이재원의 일이기도 했다. 이재원은 강우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사람 사는 집은 이래야 하는 건데 말이야.”
이재원이 북적거리는 집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강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 사는 냄새를 만끽했다.
“맞아요. 사람 북적이는 게 참 좋네요.”
이윽고 후식이 준비됐다.
“아버님, 이건 드시면서 보세요.”
“고맙다. 어멈아.”
할아버지가 최준과 하루오의 대국에 잔뜩 집중한 채 답했다. 그 모습에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의 잔뜩 집중한 모습이 강우와 너무 닮아서였다.
“너희들도 먹어.”
어머니가 강우와 이재원의 앞에도 후식을 놓아주었다. 그사이 료코는 쟁반을 들고 강우 방으로 향했다. 열린 방문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강용이 아기 때 너무 귀여워.”
미나는 강용이 사진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나은도 강용이의 양 볼을 늘어트리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렇게 대국이 계속 이어지던 때였다.
“졌습니다.”
하루오가 패배를 인정했다. 최준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좋아했다.
“허허···. 내가 재봉한테는 져도 다른 사람한테는 지지 않습니다.”
최준의 말을 할아버지를 통해 들은 하루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봉 저 친구는 뭐로도 이길 수가 없지요.”
할아버지가 웃음을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나가세. 요 앞에 내가 형님과 자주 가는 술집이 있는데 거기 음식솜씨가 괜찮아.”
할아버지의 말에 하루오와 기무라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났다. 최준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마사토를 보며 말했다.
“너희들도 갈 테야?”
할아버지의 말에 아버지와 마사토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동시에 어머니와 료코를 바라보았다.
“다녀와요. 아버님이랑 어르신들 잘 모시고요.”
“다녀오세요.”
아내들의 허락에 아버지와 마사토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바람처럼 현관으로 향했다.
“너희들은 안 갈래?”
아버지가 강우와 이재원에게 물었다.
“저희는 집에 있을게요.”
이재원이 재빨리 답했다.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자기도 집에 있겠다고 했다. 할아버지 일행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가서 뒷정리 좀 도와드리자.”
“네.”
강우와 이재원이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강우는 설거지를 이재원은 정리를 했다. 정리가 끝나고 남은 인원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우리도 맥주 한잔할까?”
어머니의 주도로 주방에서 맥주 파티가 벌어졌다. 강우와 이재원이 빠르게 정리를 끝내고 자리를 피해줬다. 방으로 들어간 강우가 이나은을 불렀다.
“나은아, 집에 데려다줄게.”
“응.”
이나은이 나갈 채비를 하며 미나를 바라보았다.
“미나야, 다음에 또 보자.”
“네, 언니.”
간단한 한국어로 인사를 끝낸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이 급속도로 친해진 게 신기했다.
“엄마, 나은이 데려다주고 올게요.”
강우의 말에 어머니가 현관까지 나왔다.
“나은아, 오늘 정말 고마웠어. 우리 다음에 밖에서 맛있는 거 먹자.”
“네, 어머니.”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덜컥.
문을 열고 나서자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 불어왔다. 이나은이 강우의 팔짱을 꼈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
“그래? 일만 하다 가는 거 같아서 미안하네.”
“아니야. 나도 궁금했어. 우리 강우 도와주는 일본분들.”
“좋으신 분들이지.”
이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강우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너무 부담스럽거나 힘들면 나한테 다 이야기해. 내가 다 들어줄게.”
“고마워.”
강우가 이나은의 따듯한 감정을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이나은의 집으로 향했다.
* * *
딸랑.
사무실 문이 열리고 강우가 들어왔다. 직원들이 일제히 인사를 건네왔다.
“이사님, 오셨습니까?”
강우가 손을 들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런 강우의 뒤쪽으로 일 층 카페의 아르바이트생들이 뒤따라왔다. 역시나 시원한 음료를 쟁반에 든 채였다.
“더운데 시원한 거 마시면서 일합시다.”
강우의 말에 직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강우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강종민 과장이 들어왔다.
“강우 이사님, 오늘 김 이차 가공 업체 미팅이 있습니다.”
“아···. 그래요?”
원래대로라면 아버지가 참여해야 할 미팅이었다. 하지만 어제 과음으로 어른들 모두가 단체로 사우나를 간 상태였다.
“제가 들어가죠.”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 들어가자 몇 명의 남성들이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박강우 이사입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업체 관계자들이 대번에 강우를 알아보았다. 그리고는 차례로 자신의 소개를 했다. 오늘 찾아온 업체들은 대진 그룹이 소개해준 식품 가공업체들이었다. 모두 세 군데였는데 제법 규모가 있는 공장을 운영 중인 사장들이었다.
“이사님 이번에 새로 가공할 김 스낵 제품 목록입니다.”
강종민 과장이 강우에게 팸플릿을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회의실에 있는 사장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팸플릿을 읽어본 사장들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얼마 전 샘플을 만들어 테스팅을 했습니다. 그중에서 반응이 좋았던 몇 개 제품을 골라 대량생산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강우의 말에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한성 푸드시스템 이창인 사장입니다. 이건 기존에 있던 제품이 아니라서 라인을 새로 깔아야 합니다. 이 라인을 한번 깔고 나면 원래 가공하던 생산 물량에 조금 타격이 있을 거 같습니다. 먼저 지속적인 생산이 가능한지 그리고 판매처 확보가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창인 사장의 질문에 다른 사장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강우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강우가 여유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와 계약하신다면 기존의 라인을 갈아엎지 않고, 새 라인을 깔 수 있게 투자를 해드리겠습니다.”
강우의 제안에 사장들의 눈이 번뜩였다. 보통 2차 가공업체라 하면 하도급이라 생각해야 했다. 원청 업체에서 라인을 새로 만드는데 투자까지 해주는 경우는 드물다고 봐야 했다. 더군다나 동양 무역이 최근 이름을 알리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중소기업이 아니던가.
“동양 무역에서 보내온 자료에 따르면 기존의 김도 생산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 라인까지···.”
그럴만한 자금이 충분하냐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음···. 걱정되실 만하죠. 그럼 잠시 상반기 저희 동양 무역의 매출 실적을 확인하고 가실까요?”
강우의 말에 한쪽에 있던 강종민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강종민 과장이 서류를 들고 와서는 사장들의 앞에 놓아주었다.
“한번 확인하시죠. 우리 회사는 상반기에 기록적인 매출을 올리고 영업이익까지 남겼습니다. 투자하기에는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는 상황이죠.”
서류를 확인한 사장들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상장도 하지 않은 회사가 올리기에는 너무나 큰 영업이익이 기록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경기가 크게 침체되어 있는 IMF 상황이었다.
“대단합니다. 이렇게 큰 영업이익을···.”
“그것도 전부 해외 영업으로···.”
강우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회사와 계약을 하게 되신다면 아마 다른 곳의 물량을 받을 여유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투자를 한다는 게 꼭 공짜로 한다는 것도 아니고요.”
사장들이 강우의 말을 대번에 이해했다. 강우는 투자하는 대신 가공업체들의 지분을 받아올 생각이었다. 앞으로 김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을 할 것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경험 있고 규모가 있는 가공업체들을 꽉 붙잡고 있어야 해.’
물론 강우의 회사와 계약한다면 가공업체도 날개를 달게 될 것이었다. 서로가 좋은 윈윈이었다. 회의실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장들은 회사의 앞날을 두고 심사숙고했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돌아가서 회의도 해보시고 결정해주세요. 다만 저희가 계약할 업체의 숫자가 한정적이라는 건 염두에 두시고요.”
강우의 말에 사장들의 얼굴에 기이한 열기가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계약을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신중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더 자세한 건 사업 담당인 강종민 과장이랑 상의해주세요.”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들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며 미소 지었다.
“그럼.”
사장들이 강우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강우가 회의실을 나가자 사장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린 강우에게서 마치 수십 년을 경영한 사람의 분위기를 느낀 것이다.
“자 그럼 나머지 미팅을 진행해 볼까요?”
강종민 과장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