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165/402)
  • 이걸 한 번에 다 먹는다고?

    현관문으로 하루오와 기무라가 들어왔다. 조금은 긴장한 듯 조금은 설레는 듯 두 사람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들어오게.”

    할아버지가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하루오와 기무라가 일본어로 ‘실례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들어섰다. 그러자 강용이가 대번에 두 사람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강용입니다.”

    강용이의 약간은 서툰 일본어에 하루오와 기무라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리고는 손자를 보듯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강용아, 오랜만이구나.”

    “거참 녀석 볼 때마다 힘이 넘쳐.”

    강용이가 씩 웃으며 두 손을 안쪽으로 향했다.

    “저희 가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강용이의 약간은 과장된 행동에 모두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렇게 하루오와 기무라가 거실로 앉았다. 할아버지가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인사들 할 거지?”

    하루오와 기무라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이미 차 안에서 이야기된 일이 있었다. 바로 최준과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사실 하루오와 기무라는 최준을 만나는 것에 조심스러웠다.

    “정말 언짢아하시지는 않겠지?”

    하루오의 말에 할아버지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는 조금은 높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본인이라고 무조건 미워하는 게 우리가 아닐세. 그런 말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 미안하네.”

    하루오가 빠르게 사과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최준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형님, 계시죠?”

    “들어오게.”

    할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풍스럽게 꾸며진 방 안에서 최준은 혼자 바둑을 두고 있었다. 고고한 듯 몸을 세우고 있는 최준의 모습에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형님.”

    할아버지의 말에 최준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 왔는가? 손님분들은 오셨고?”

    “네, 형님.”

    “그래, 어쩐지 밖이 시끌벅적해지더구나.”

    역시 최준은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혹여 할아버지의 손님들이 불편해할까 봐서였다.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일본에 유학하러 갔을 당시의 동기들인 하루오와 기무라입니다. 형님하고 인사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

    탁.

    최준의 손에서 마지막 바둑돌이 놓였다.

    “가세.”

    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방을 나갔다. 방 밖에서 기다리던 강우가 최준을 보고는 스르륵 웃었다.

    “할아버지, 식사하셔야죠.”

    “그래, 밥 먹자.”

    최준이 거실로 나오자 하루오와 기무라가 벌떡 일어났다. 주름진 얼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최준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최준이라고 합니다.”

    간단한 일본어였다. 일제 강점기에 사업까지 했던 최준이었다. 간단한 일본어는 가능했다.

    “하루오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기무라입니다. 저도 영광입니다.”

    세 사람이 간단히 악수하였다. 거실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음식을 나르던 주방도 거실에 앉아있던 아버지와 마사토도 말이다. 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지자 강우가 나섰다.

    “일단 음식 차려질 때까지 방에 가서 이야기들 나누실래요?”

    “그래, 그게 좋겠다.”

    할아버지가 대번에 좋다고 했다. 최준도 고개를 끄덕했다. 강우가 일본어로 하루오와 기무라에게 최준의 방에 잠시 들어가자고 했다. 하루오와 기무라가 고개를 끄덕했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방으로 들어갔고, 하루오와 기무라가 뒤를 따랐다.

    “그럼 준비들 하고 계세요.”

    강우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잠시 얼었던 분위기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강우가 슬쩍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강용이가 씩 웃었다.

    “형아, 알겠어.”

    분위기 메이커로 강용이는 최고의 존재였다. 강우와 강용이가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뜻밖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최준과 하루오가 바둑판에 모여있었다.

    “바둑을 좀 두십니까?”

    “제 취미가 바둑입니다.”

    최준의 얼굴에 호기심이 서렸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나섰다.

    “형님, 있다가 식사 끝나고 바둑 한판 두시죠.”

    “좋지.”

    할아버지가 하루오에게도 바둑을 권했다. 그러자 하루오도 좋다고 말했다. 그렇게 취미가 공유되자 조금은 딱딱했던 분위기가 풀렸다.

    “할아버지!”

    강용이가 부드러워지는 분위기에 쐐기를 박았다. 최준의 품에 뛰어들며 씩 웃었다. 최준의 얼굴이 단번에 녹아내리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인석아, 할아비 뼈 부러져.”

    “헤헤….”

    분위기가 풀리자 최준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한국어를 사용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강우가 빠르게 통역을 시작했다. 하루오가 고개를 꾸벅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재봉의 집에 오니 마음이 참 편하고 좋습니다.”

    “친구의 집에 오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죠.”

    최준과 하루오 그리고 기무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오와 기무라는 특히 최준에게 깍듯했다. 강우는 열심히 대화를 통역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할아버지가 본론을 꺼냈다.

    “하루오, 정말 자네의 결정에 변함이 없는 건가?”

    “그래, 내 오래전부터 막연히 생각하던 일일세. 나는 꼭 한국에 진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어.”

    하루오의 말에 할아버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형님도 그렇고 자네가 한국에 속죄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니 나라도 책임을 지겠다는 걸세. 그게 내 형님의 뜻이었기도 하네.”

    친형을 언급하는 하루오의 말에 할아버지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짧게 한마디를 했다.

    “고맙네.”

    고맙다는 말에 하루오가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나는 강우에게 또 짐을 지우는 것일 수도 있어. 자네에게 미안할 뿐이네.”

    “아닐세. 강우는 기꺼이 받아들였어. 그리고 이미 계획도 다 세워놓았지.”

    하루오의 얼굴에 호기심이 짙어졌다. 기무라도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강우가 입을 열었다.

    “하루오 어르신이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그 돈을 일본에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쓰고 싶습니다.”

    강우의 말에 하루오와 기무라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물들었다. 지나간 일본의 잘못을 너무나 통감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하루오가 강우의 손을 잡았다.

    “그래, 과연 너답구나. 그렇게 해준다면 나는 여한이 없다.”

    “이거….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군.”

    기무라도 말을 거들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일본에서 진행 중인 어르신의 형님에 대한 소송 건도 제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강우야! 그럴 필요 없다. 너에게 그런 짐을 지우려 내가 유산을 준다고 한 게 아니야.”

    하루오가 화들짝 놀라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기무라도 목소리 톤을 높이며 말했다.

    “그래, 강우야. 부담 가질 필요 없다.”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강우의 의지는 확고했다. 기억 속에서 보았던 변호사의 얼굴이 떠오르며 강한 의지가 생겨났다. 물론 하루오에게도 후손들이 있었다. 하지만 하루오는 후손들에게까지 자신의 짐을 지우기 싫다고 결정한 상태였다. 그래서 유산을 모두 강우에게 주고 좋은 곳에 쓰이기를 원했다.

    “허…. 이러려고 한 게 절대 아닌데.”

    하루오가 난감해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보게 하루오. 우리 강우를 그렇게 모르는가? 다 감당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이런 결정을 내린 거야. 우리 강우를 믿게.”

    “알겠네.”

    결국, 하루오가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기무라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나도 질 수 없지. 강우야, 기다려 보거라. 나도 곧 한몫하마.”

    “아니, 어르신까지 그러실 필요는….”

    기무라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내 자식들한테는 줄 만큼 줬어. 그 돈이면 대대손손 떵떵거리고 살 수 있다. 나에게 남겨진 몫이니 자꾸 거절하면 난 오늘 그냥 돌아가련다.”

    “네….”

    기무라의 황소 같은 고집에 강우가 두 손을 들었다. 돈을 주겠다는 사람이 강권하고 받는 사람이 거절하는 이상한 그림이었다. 하루오가 말했다.

    “조만간 일본으로 오거라. 와서 내 변호사랑 이번 일을 마무리 짓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똑똑.

    그때, 방문을 노크하고 어머니가 얼굴을 조심히 내밀었다.

    “식사 준비 끝났어요.”

    어머니의 말에 하루오와 기무라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 * *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진 음식상에 하루오와 기무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한 번에 다 먹는다고?”

    소식하는 일본인들에게 눈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은 신세계였다.

    “이거 재봉이 며느리 음식솜씨를 그렇게 자랑하더니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이는구나. 강우야, 정말 고맙다고 좀 전해주거라.”

    하루오와 기무라가 어머니를 보며 고마움을 표했다. 강우가 어머니에게 하루오와 기무라의 말을 전해주었다. 어머니가 활짝 웃으며 맛있게 드시라고 했다.

    “다들 먹읍시다.”

    식사가 시작됐다. 어머니는 일본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여러 한식을 준비했다. 갈비찜부터 잡채 그리고 온갖 전들. 그리고 강우의 친할머니가 전수한 토란국까지 끓여냈다. 어머니가 정말 중요할 때만 내놓는다는 비장의 무기 중 하나였다.

    “오오! 정말 맛있군.”

    “하루오, 우리 한국에 오기를 잘한 거 같아.”

    하루오와 기무라는 어머니의 음식이 입에 맞는 거 같았다. 어머니 옆에 앉아있는 료코도 크게 감탄한 눈치였다. 연신 ‘맛있어.’를 연발했다.

    “강우야, 이거 먹어. 잡채는 내가 했어.”

    이나은은 강우의 옆에서 음식을 챙겨주고 있었다. 평소보다 강한 이나은의 애정 공세에 강우의 입이 헤벌쭉해졌다.

    “누나, 이거 먹어요.”

    강용이는 미나의 옆에서 음식을 챙겨주고 있었다. 미나는 연신 고맙다며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안 그래도 한식을 좋아하는 마사토는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의 음식을 먹으며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딩동. 딩동.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역시나 강용이가 벌떡 일어났다.

    “누구세요?!!”

    다람쥐처럼 달려가는 강용이의 모습에 미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덜컥.

    “우리 강용이!”

    문이 열리고 이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용이가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도 났다.

    “하하하! 재원이 형 간지러워요.”

    잠깐의 소란스러움이 끝나고 이재원과 강용이가 거실로 들어왔다. 거실에서 식사하던 모두의 시선이 이재원을 향했다.

    “어…. 안녕하세요?”

    이재원이 꾸벅 인사를 했다. 강우가 일본어로 이재원을 소개해주었다. 강우의 설명을 들은 하루오와 기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 네가 말하던 친형 같은 사람이 바로 저 아이구나?”

    “거참 잘생겼네.”

    하루오와 기무라의 말에 강우가 씩 웃었다. 이재원이 마사토와도 영어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미 안면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한국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맙다.”

    아들이 나타나자 김세아가 대번에 밝아진 얼굴로 이재원을 불렀다.

    “아들~ 이쪽으로 와.”

    이재원이 김세아의 옆에 앉았다. 마침 미나의 옆이었다.

    “안녕하세요. 미나입니다.”

    미나가 제법 또렷한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이재원이 움찔하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이재원입니다. 한국말 잘하시네요.”

    “연습 많이 했어요.”

    미나가 싱긋 웃었다. 그 순간, 이재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나가 다시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이재원을 김세아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강용이가 미나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미나 누나, 재원이 형 잘생겼지?”

    “어? 으응….”

    미나의 대답에 강우와 강용이가 씩 웃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이재원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거 일어를 배우든가 해야겠네. 답답해서 원….”

    강용이가 미나를 보며 일어로 말했다.

    “어? 그러면 미나 누나가 재원이 형한테 일어 가르쳐주고.”

    그다음에 이재원을 보며 한국어로 말했다.

    “재원이 형이 미나 누나한테 한국어 가르쳐 주면 되겠다.”

    강용이의 제안에 이재원과 미나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이재원이 얼굴을 붉혔다. 강우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혹시?’

    강우와 눈이 마주친 이재원이 움찔했다. 강우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이재원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