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51/402)
  • 힘들 때는 서로 돕고 나누고 살아야 하는 게야.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우가 현관으로 들어왔다. 거실에는 할아버지와 최준 그리고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세 분은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강우가 거실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오? 그래. 강우 왔구나.”

    할아버지가 대번에 강우를 반겼다. 강우가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할아버지 정말이에요? 정말 청와대에서 할아버지랑 최준 할아버지를 초대한 거예요?”

    “그래, 오늘 보훈처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 광복절 날 청와대 오찬에 초대됐다.”

    강우가 짧게 탄성을 뱉어냈다. 독립유공자 가족을 청와대 오찬에 초대하다니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그만큼 할아버지와 최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은 것이었다.

    “우리 강우도 그런 표정을 할 줄 아는구나. 나도 연락을 받고는 조금 얼떨떨했지.”

    “그러니까요. 두 분이 대통령을 만난다고 하니 저도 얼떨떨해요.”

    강우의 말에 할아버지가 씩 웃었다.

    “강우 너도 만나게 될 텐데?”

    “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설명해주었다. 청와대에서 이번에 초청한 것은 할아버지와 최준 그리고 강우 가족 전부였다.

    “그랬군요.”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와대에 가게 된다니 조금은 설렜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자긍심이 가슴속에서 차올랐다. 강우가 할아버지와 최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대로 된 해방을 맞이했다면 결코 지금의 모습에서 끝났을 분들이 아니다.’

    물론 할아버지와 최준만 놓고 하는 생각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너무나 많은 훌륭한 독립운동가분들이 있었다.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몸을 바친 분들이 나라를 이끌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늦지는 않았다.’

    강우가 속으로 더욱더 굳게 결심했다. 지금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확신도 더욱 생겼다. 상념에 빠진 강우의 손을 할아버지가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손자 덕분에 할아버지가 대통령도 만나보는구나.”

    “아니에요. 제가 두 분 할아버지 덕분에 대통령을 만나보는 거죠.”

    강우의 말에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최준도 대견한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다.

    “강우야, 오늘 봉사활동 다녀온 건 잘 끝내고 왔니?”

    아버지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음 시작한 건데 정말 잘 마무리됐어요.”

    “그래그래, 정말 장한 일을 했어.”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최준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님.”

    할아버지도 최준의 말에 동감했다. 하지만 무더운 여름이었다. 연세가 많은 두 분이 움직이기에는 힘든 일이기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지난번처럼 영상을 찍거나 그런 건 없어?”

    아버지가 아쉬워하는 두 할아버지를 위해 물었다.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네, 보여주기식으로 한 건 아니라서요. 영상은 제가 못 찍게 했어요.”

    “허···. 우리 강우가 속도 아주 깊구나.”

    최준이 감탄을 하며 말했다.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겸손할까?”

    “음···. 할아버지요?”

    강우의 대답에 아버지가 이 녀석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가 씩 웃으며 오늘 종일 다니며 생각했던 일을 말했다.

    “이제 며칠 더 다니면 전국에 있는 독립유공자분들 그리고 후손들을 전부 방문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서 광복절을 전후해서 전부 초청해서 즐겁게 지내볼까 해요.”

    강우의 말에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오늘 보니까요. 그분들한테 정말 필요한 건 물질적인 도움도 도움이지만, 결코 스스로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게 더 급해 보였어요.”

    강우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오늘 만났던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며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다들 흩어져서 힘들고 외롭게 사시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했어요. 누군가 구심점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버팀목이 되어줄 그런 존재 말이에요. 그리고 꼭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고, 대단한 일을 하신 분들의 후손이라는 걸 말이에요.”

    강우의 말에 할아버지와 최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강우의 말을 듣고 있던 아버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강우야. 너라면 꼭 그분들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을 거다. 우리 가족에게 네가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말이야.”

    아버지의 말에 강우가 더욱 용기를 얻었다. 강우가 아버지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버지가 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따라 유독 커 보이는 아들이었다.

    “그래, 우리도 너를 응원하마.”

    “너라면 꼭 해낼 거야. 중국에서 너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운명처럼 알 수 있었지.”

    할아버지와 최준도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거실에 네 남자의 기이한 열기가 차올랐다. 그렇게 한바탕 뜨거운 감정이 휘몰아치고 사라졌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까 재원이가 회식하고 있다던데. 우리 때문에 급하게 온 건 아니고?”

    “괜찮아요. 어차피 저 없어도 신나게 놀고 있을 거예요.”

    강우가 회식 장소를 떠올리며 픽하고 웃었다. 강우가 자리를 비웠으니 더욱 결점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귓구멍이 계속 간지러운 걸 보니 분명했다.

    “다시 가보지 그래?”

    아버지의 말에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 돌아오지 말라던 이재원의 당부를 떠올렸다.

    “아니에요.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요.”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와 최준. 이렇게 네 남자는 한참을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무르익자 두 분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막걸리가 빠질 수 없었다. 강우는 주방으로 살금살금 가서 안주를 급조해왔다. 그렇게 강우가 가장 좋아하는 뒤풀이가 시작됐다.

    * * *

    쏴아아-

    광복절을 며칠 앞둔 어느 오후. 베란다 창밖으로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베란다 창가에 선 강우의 뒤쪽의 텔레비전에서는 뉴스 특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 오후부터 서울지역에 다시 많은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도로 곳곳이 통제됐고 서울 시내 전 지역 퇴근길이 극심한 교통혼잡을 빚었습니다.-

    뉴스의 내용대로였다.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벌써 침수 피해를 본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다들 잘 계시려나.’

    강우가 전국 곳곳에 퍼져있는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을 떠올렸다. 특히 시골이나 산간에 대부분이 살고 있었으니 그 걱정이 컸다. 강우가 손에 들린 핸드폰으로 어디로인가 연락했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의 신호가 가고 통화가 연결됐다.

    “박강우입니다. 지금 진행 상황이 궁금해서 전화했습니다.”

    -네, 감사님. 지금 저희 쪽에서 예약한 콘도로 전부 이동 중입니다.-

    강우의 얼굴에 안도감이 서렸다. 비가 오고 상황이 심상치 않자 강우가 나섰다. 위험한 도서와 산간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분들과 후손들을 긴급히 콘도로 대피시킨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계속되는 봉사활동이 끝나고 마침 주거환경 개선 사업을 시작하려던 차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편한 점이 없도록 특히 신경 써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빠진 분들이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독립투사분들이 감사님은 언제 오는 건지 묻습니다.-

    강우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모임도 만들 생각이었다. 주기적으로 모여 행사하고 친분을 다질 생각이었다. 그렇게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의 유대감을 키워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는 청와대에 갔다가 바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네, 그럼 그렇게 전달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창밖으로 번쩍하는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우르릉’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천둥이 ‘콰앙!’하고 울렸다. 강우의 얼굴에 근심이 더해졌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두 안전하게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직원분들도 조심하시고요.”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통화가 끝나고 강우가 고개를 돌렸다. 뉴스에서는 수재를 입은 사람들의 소식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강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한숨을 그리 쉬어?”

    방문이 열리고 할아버지가 나왔다. 힐끗 베란다를 보더니, 창가로 다가갔다. 아파트 베란다 멀리 한강이 보였다. 거칠게 넘실거리는 한강은 그 수위가 많이 올라와 있었다.

    “한강에 물이 많이 차올랐구나. 옛날에는 이 정도 비면 무조건 한강이 넘쳐서 난리가 났는데 말이야.”

    “강변 정비를 잘해놨다고는 하는데요. 그래도 침수 피해 본 곳도 많은가 봐요.”

    할아버지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강우를 불렀다.

    “강우야.”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소파로 다가갔다. 강우가 할아버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혀드렸다.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기부금을 좀 내야겠다.”

    “기부금이요?”

    할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수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한 성금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 우리가 다 국민의 관심으로 이렇게 좋은 날을 보내고 있으니 이제 보답을 좀 하자꾸나.”

    “네, 알겠어요. 아버지랑 상의해서 기부할게요.”

    강우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할아버지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힘들 때는 서로 돕고 나누고 살아야 하는 게야.”

    “네, 할아버지.”

    * * *

    부우웅.

    강우 가족을 태운 승합차가 광화문을 지나가고 있었다. 차 안에 앉아있는 강우 가족의 분위기는 살짝 경직되어 있었다. 오늘은 광복절이었다. 그리고 강우 가족이 청와대에 초청된 날이기도 했다.

    “오늘 오찬하고 바로 광복절 행사까지 참여해야 해요.”

    운전하는 강우가 가족들을 향해 말했다.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던 가족들이 동시에 움찔하더니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오늘 오찬하고 행사까지 참여해야 한대요.”

    강우 가족이 동시에 알겠다고 답했다. 강용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씩 웃었다.

    “대통령님이 사시는 곳의 밥은 우리 엄마 밥보다 맛있어요?”

    “어??”

    아버지가 당황하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어머니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거기 있는 요리사분들이 얼마나 대단한 분들인데. 엄청 맛있을걸?”

    “좋아! 오늘 내가 평가해주겠어.”

    강용이가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불살랐다. 그 모습에 차 안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센스 만점인 강용이의 행동으로 차 안의 긴장감이 옅어졌다. 그사이 차는 경복궁의 옆길을 지나 청와대 쪽으로 향했다.

    “정지!”

    청와대로 올라가는 길을 지키는 경찰들이 강우 가족의 승합차를 멈춰 세웠다. 강우가 창문을 내리자 경찰관의 표정이 대번에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어? 혹시 박강우 씨?”

    “네? 아···. 네.”

    경찰이 열린 창문을 통해 안쪽을 확인하고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대번에 몸을 세우더니 경례를 했다.

    “박재봉 님, 안녕하십니까?”

    “허허···. 반갑네.”

    할아버지가 경찰의 깍듯한 인사를 받아주었다. 경찰은 최준에게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최준도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쪽으로 올라가시면 청와대 관계자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는 청와대로 향하는 차량은 통제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우 가족의 승합차는 통과 대상이었다. 강우가 차를 몰아 조금 더 올라가자 청와대의 정문이 나타났다. 강우 가족은 안내를 받아 청와대의 앞쪽에 주차했다.

    드르륵.

    차 문이 열리고 잘 차려입은 강우 가족이 내렸다. 입구 쪽에서 청와대 직원이 달려왔다.

    “박재봉 님 가족과 최준 님이십니까?”

    직원의 질문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네, 저희는 박재봉 님과 최준 님의 가족입니다.”

    “네? 아···.”

    직원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 가족과 최준의 사연은 잘 알려진 것이었다. 청와대 직원이 공손한 몸짓으로 청와대 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셔서 먼저 절차를 좀 밟아야 할 게 있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협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우 가족이 알겠다고 하며 직원을 따라갔다. 청와대 안으로 들어서며 강우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평소라며 굳게 닫혀있을 청와대의 정문이 오늘은 활짝 열려 있었다. 강우가 그 안으로 보이는 청와대 건물을 바라보았다.

    ‘대통령이라······.’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오며 또다시 미래 기억의 파편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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