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포기하면 편한데.
어둑해진 산길을 승합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췄다. 승합차 뒤쪽에는 곤히 잠든 동아리원들이 있었다. 강우는 운전대를 잡은 상태였다. 강우의 옆에는 이지용이 앉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졸리면 좀 자.”
강우가 유창한 영어로 물었다. 이지용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말했잖아.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자는 건 매너가 없는 거라고.”
“괜찮다니까.”
이지용이 콘솔박스를 부스럭거리더니 껌을 꺼내 들었다. 운전하던 직원이 졸음을 쫓기 위해 샀던 껌이었다. 이지용이 껌 하나를 까서는 입에 넣었다. 그리고 하나를 더 까더니 강우의 입에 가져다 댔다.
“하나 씹어. 졸음 쫓는 데 좋으니까.”
“땡큐.”
강우가 입을 벌려서 이지용의 손에 들린 껌을 덥석 삼켰다. 이지용이 픽하고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강우야, 그런데 말이야. 오늘 참 힘들었는데 생각해보면 한국 와서 또 이렇게 즐겁고 뿌듯한 적이 있었나 싶다.”
“그래? 좋은 경험이었지?”
강우가 씩 웃으며 물었다. 이지용이 고개를 끄덕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실 외국에 있으며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잘 알 기회가 없었거든. 대학에 와서는 더 배울 기회가 없고 말이야.”
“그렇겠지.”
이지용의 말에 강우가 크게 공감했다. 사실 한국의 역사에 대해 배울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바로 초중고등학교라는 교육과정에서뿐이었다. 그러하니 외국에서 살다 대학 때 넘어온 이지용이 한국사에 대해 잘 알 리가 없었다.
“오늘 제대로 보고 배웠다. 강우 네가 앞으로 나 같은 재외교포들이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알려주는 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거 진짜 좋은 생각인데?”
강우가 이지용을 슬쩍 보며 감탄했다. 이지용이 멋쩍게 웃었다. 커다란 덩치와 근육질에 숨겨져서 그렇지 이지용은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는 서울대생이었다.
“뭐지? 그 표정은? 마치 곰이 재주를 부리는 걸 본 표정이군.”
“어? 들켰나?”
강우의 농담에 이지용이 픽하고 웃었다. 그렇게 강우와 이지용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서울로 향했다.
부우웅.
강우와 동아리원들을 태운 승합차가 서울대 정문에 도착했다. 정문 앞에는 이미 도착한 동아리원들이 모여있었다. 강우가 한쪽에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 왔으니까 일어나세요.”
강우의 말에 직원을 포함한 동아리원들이 벌떡 일어났다. 특히 직원은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주변을 확인하더니 화들짝 놀랐다.
“서···. 서울입니까?”
“네, 서울입니다.”
강우의 대답에 직원이 울상을 지었다. 잠깐 자라는 강우의 말에 그야말로 깊이 자버렸다.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강우 혼자 운전을 한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을 너무 자버렸습니다.”
“아니에요. 저 운전하는 거 좋아해요. 오랜만에 드라이브하고 좋았어요.”
강우는 운전하는 것을 좋아했다. 직원이 볼을 긁적이며 민망해했다. 강우는 정말 괜찮다며 다시 말해주었다.
“그런데 난 서울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안 깼어.”
동아리원 중 한 명의 말에 다른 동아리원들도 ‘어?’ 하는 표정이 되었다.
“진짜네. 난 우리 집 침대에서 자는 줄 알았어.”
“나도.”
동아리원들의 말에 이지용이 씩 웃었다.
“강우가 운전을 참 잘한다. 베스트드라이버. 스트롱가이.”
재미교포의 어색한 한국어와 이상한 콩글리시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차에서 내리자 기다리던 동아리원들이 다가왔다.
“강우야!”
신원주와 연정호가 강우를 반겼다. 강우가 손을 들어 반갑게 웃었다.
“다들 오늘 고생 많았지?”
신원주와 연정호가 무슨 소리냐며 손을 저었다. 두 사람 모두 그 어느 때보다 보람차고 뿌듯한 하루를 보냈다.
“고생은 무슨···. 가는 곳마다 너무 좋았어. 다들 너무 반겨 주셔서.”
“맞아. 손자들 놀러 온 거 같다고 먹을 거도 엄청나게 챙겨 주셨어.”
두 사람의 표정 또한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윽고 다른 동아리원들도 강우를 향해 다가왔다. 강우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이 생겨났다.
“다들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강우의 말에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더운 여름 땀을 흠뻑 흘린 동아리원들의 모습에 강우가 뿌듯함을 느꼈다.
“오늘같이 좋은 날 그냥 집에 갈 수는 없죠?”
동아리원들이 바라던 이야기가 강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동아리원들의 눈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강우가 시원하게 소리쳤다.
“뒤풀이 갑시다!”
떠나갈듯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강우가 씩 웃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재원이 형이랑 보라 누나는?”
강우의 질문에 신원주가 씩 웃었다.
“벌써 자리 섭외한다고 갔다.”
“역시 최고네.”
강우와 동아리원들이 맨바닥에 상자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이재원에게 연락이 왔다. 이동할 수 있는 차량도 있으니 제법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강우가 앞장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를 공유하고 다시 조별로 승합차에 올라탔다.
부우웅. 부우웅.
목적지에 승합차의 행렬이 이어졌다. 커다란 소 모양의 건물이었는데 한우를 파는 곳이라 했다. 오늘 이재원이 제대로 지갑을 열 생각인가 보다.
드르륵.
승합차에서 내린 동아리원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소고기?”
“대박!”
강우가 씩 웃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강우 일행을 알아본 종업원이 예약된 이 층으로 안내했다. 이재원은 이 층을 통으로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강우야!”
채보라가 강우를 반겼다. 가게의 이 층은 수십 명이 들어가기에도 충분한 공간이었다. 상 위에는 이미 모든 세팅이 끝난 상태였다.
“누나, 저희 왔어요.”
“응, 기다리고 있었어. 준비는 다 해놨고, 고기 굽기만 하면 돼.”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보라가 동아리원들을 향해 자리를 잡고 앉으라 했다. 동아리원들이 조별로 모여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준비가 끝나자 일 층에서 종업원들이 고기를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우와! 꽃등심?”
고생한 동아리원들을 위해 강우가 이 층으로 올라오며 주문한 특별 메뉴였다. 고기가 나오니 술이 빠질 수 있겠는가. 시원한 맥주와 살짝 얼린 소주까지 각 테이블에 놓이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각 테이블의 불판 위로 붉은 자태를 자랑하는 꽃등심이 올려졌다. 고기가 익는 냄새가 금세 이 층 안에 가득 찼다. 종일 땀을 흘리고 힘을 쓴 동아리원들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고기! 고기!”
연신 고기를 연호하며 빨리 익기를 기원하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고기가 익어가자 또 술잔이 채워졌다. 역시 술의 시작은 소맥이라며 시원하게 말아가기 시작했다.
“진짜 다들 놀라긴 종일 놀랐지.”
강우 옆자리에 앉은 신원주가 맥주를 벌컥 마시며 말했다. 연정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나 오늘 너무 충격이었다. 어떻게 전부 그렇게 힘들게들 사실 수가 있지?”
“너희들 그거 알아? 독립운동가 본인은 물론이고 후손분들 중 대부분이 저소득층인 거?”
채보라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강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연정호가 강우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강우만 봐서 몰랐지.”
“너 몰랐어? 강우 고1 때까지만 해도 집안 사정 엄청 안 좋았다.”
신원주가 말을 하더니 힐끗 강우를 바라보았다. 행여 지나간 안 좋은 기억을 들추어냈나 싶었다. 하지만 강우는 말없이 씩 웃어주었다. 그러자 채보라를 비롯해 주변의 동아리원들의 시선이 쏠렸다.
“정말? 강우가?”
갑자기 주변의 시선이 몰리자 신원주가 살짝 당황했다. 본인이 있는 앞에서 과거사가 흘러나오게 생겼으니 말이다.
“어어···. 강우야···.”
신원주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신원주에게 강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사교성이 부족해 늘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지 못했던 신원주에게 강우는 안내서였고 지침서였다. 강우가 옆에 있었기에 인간관계를 넓혀가고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이었다.
“괜찮아. 다 지나간 이야기인데 뭐. 네가 재밌게 좀 풀어봐라.”
강우가 씩 웃으며 말하자 신원주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그리고는 차근차근 자신의 기억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강우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 별명이···.”
채보라가 말을 얼버무렸다. 함부로 말하기조차 미안한 별명이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 맞아요. 노숙자. 아버지 사업 실패하시고 한동안 여기저기 전전하며 살았거든요.”
강우의 말에 주변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지금의 강우와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과거였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강우의 입에서 과거사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말도 안 돼! 거짓말.”
채보라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동아리원들도 멍한 표정이었다. 강우가 말없이 웃으며 맥주를 한잔했다. 그러자 신원주가 바통을 이어받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무결점의 괴물 박강우가 탄생하게 된 겁니다.”
신원주가 짧게 숨을 뱉어냈다. 생각해보니 정말 못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강우였다. 연정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어느 날부터 강우가 저렇게 슈퍼맨이 돼버렸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박강우. 도대체 결점이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채보라가 답답하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자자! 주목.”
채보라의 말에 왁자지껄하던 이 층의 시선이 단번에 쏠렸다. 채보라가 강우를 보며 씩 웃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인간 박강우의 결점을 찾는 게임을 해보겠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박강우의 결점을 한 명씩 돌아가면서 말해 봅시다.”
채보라의 말에 강우가 마시던 맥주를 뿜어냈다. 신원주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채보라를 불렀다.
“누나···.”
“왜? 이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쯤은 결점이라고 생각하는 게 있겠지.”
채보라의 제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먹던 고기를 오물거리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아니···. 그걸 또 뭐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들을 해?”
강우의 말에 신원주와 연정호가 슬쩍 고개를 저었다.
“그냥 포기하면 편한데.”
“맞아. 강우 결점 찾는 건 포기하는 게 편하지.”
두 절친의 말대로였다. 동아리원들의 입에서 나온 결점이라는 건 별것이 없었다. 아니 차라리 결점이 없는 게 결점이라는 의견이 큰 동감을 얻었다. 그렇게 장난으로 시작된 논의는 엄청난 열기를 더해갔다.
“와···. 이게 이렇게까지 진지해질 문제였나?”
강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자 신원주와 연정호가 울컥했다.
“당연하지!”
“이 괴물아!”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채보라가 강우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언젠가는 뭐라도 하나 나오겠지.”
강우가 이제는 반은 포기하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때 이 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이재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뭐가 이렇게 뜨거운 분위기야?”
이재원이 강우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강우에게 오면서 동아리원들의 대화를 들은 이재원이었다. 강우의 옆자리에 앉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고들 있군. 그냥 강우는 그러려니 이해하고 사는 게 마음 편한데 말이야.”
강우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이재원이 강우를 보며 툭 말했다.
“너 핸드폰 배터리 나갔어?”
“네? 아···.”
강우가 핸드폰을 열어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핸드폰의 배터리가 다 되어 꺼져있었다. 이재원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얘들아! 결점 하나 찾았다. 강우 핸드폰 충전을 안 하네.”
사방에서 그게 무슨 결점이냐며 아우성쳤다. 이재원이 강우를 향해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집에 전화 걸어봐. 할아버지가 너 급하게 찾으신다.”
“할아버지가요?”
강우가 눈을 크게 떴다. 급하게 찾으신다고 하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었다. 강우가 재빨리 집에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의 신호가 가고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할아버지, 저예요 강우.”
-오! 강우야. 전화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어서 전화 못 받았어요.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강우의 질문에 할아버지의 입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강우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네에? 정말요? 거기서 전화가 왔다고요?”
할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